"비은행권 방치 못한다"…감독권 없는 이창용의 작심발언, 왜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12일 서울 중구 한국은행에서 열린 한국은행 창립 제73주년 기념식에서 기념사를 낭독하고 있다. 사진 한국은행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12일 서울 중구 한국은행에서 열린 한국은행 창립 제73주년 기념식에서 기념사를 낭독하고 있다. 사진 한국은행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의 연이은 작심 발언이 금융권에서 화제가 되고 있다. 그간의 한은 총재들과 달리 이 총재는 부동산, 주식 투자 등 통화정책과 다소 거리가 있는 경제 사안에 대해서도 주저 없이 견해를 밝혀 주목을 받았다. 최근엔 한 발 더 나아가 정부 당국과의 조율이 필요한 사안에 대해서도 먼저 화두를 던지고 있다.

이 총재는 12일 서울 중구 한은에서 열린 창립 73주년 기념식에서 “비은행 금융기관에 대한 감독권이 없다는 이유로 (금융안정) 문제를 방치할 수는 없다”며 “감독기관과의 정책공조를 더욱 강화하고 필요하다면 제도개선을 통해서라도 금융안정 목표 달성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총재는 저축은행·새마을금고 등 비은행권의 수신(예금) 비중이 2000년대 들어 은행을 넘어선 점 등을 언급하면서 “은행만을 대상으로해서는 국민경제 전체의 금융안정 목표를 달성하기가 어려운 것이 현실”이라고 했다.

지난 3월 미국 실리콘밸리은행(SVB) 파산 이후 금융안정의 중요성이 커진 만큼 한은 총재로서 못 할 말은 아니다. 중요한 건 이 총재가 언급한 ‘제도개선’의 강도와 방향이다. 이번 발언은 한은법 개정을 통해 은행ㆍ비은행에 대한 조사나 감독권한을 확대하자는 주장으로 받아들여질 소지도 있다. 

현행법상 한은이 비은행의 유동성 위기에 ‘구원투수’ 역할을 하기 어렵다는 지적은 꾸준히 제기돼 왔다. 한은법 제80조에 따르면 금융기관으로부터의 자금조달에 중대한 애로가 발생하거나 발생할 가능성이 높을 경우 한은이 금융통화위원회 의결로 금융기관이 아닌 금융업 등 영리기업에 여신(대출)을 제공할 수 있다. 이 총재는 이 조항을 이용해 ‘비은행 대출’이 좀 더 쉬워지도록 하는 방안을 구상 중이다. 다만 이마저도 한은법 65조에 따라 “정부의 의견을 들어야” 하도록 돼 있다 

한은은 확대 해석을 경계하며 진화에 나섰다. 한은 관계자는 “건전한 비은행 금융기관이지만 악성 루머 때문에 일시적으로 유동성이 부족해지는 경우 현행 법 테두리 안에서 한은이 어떻게 자금 지원을 할 수 있는지 등을 고민하고 있다”며 “한은법 80조 ‘영리법인에 대한 대출’ 조항에 따라 비은행에 대한 대출을 상시화할 수 있는지, 실효성이 있는지 향후 금융통화위원회에서 논의할 것으로 보인다”고 해명했다.


이날 이 총재의 발언이 또 한번 주목받은 이유는 그가 최근 발언 수위를 높여왔기 때문이다. 이 총재는 지난달 25일 금통위 후 기자간담회에서도 연금ㆍ교육 개혁 등 구조개혁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재정ㆍ통화정책 등으로 (저성장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건 나라가 망가지는 지름길”이라고 힘줘 말했다. 평소 하고싶던 말을 내부적으로 공유하고 가다듬어서 작심하고 내뱉은 발언이었다고 한다. 

지난 1일 BOK 국제컨퍼런스에서도 해외 석학들에게 “한국처럼 저출산 고령화가 심각한 아시아 일부 국가들은 그로 인해 구조적 장기침체에 직면할 가능성이 있는데, 이때 재정정책을 활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보느냐”고 묻는 등 논의를 재점화시키려 했다.

일각에선 이 총재의 소신 발언을 향후 정치 행보와 연관지으려는 시각이 있다. 이 총재가 지난 4월말 직원 100여 명과 진행한 타운홀 미팅에선 차기 경제부총리설에 대한 질문이 나왔다. 이 총재는 “사실 무근”이라는 취지로 일축했지만 그만큼 내부에서도 ‘이색 총재’에 대한 설왕설래가 많다는 의미다.

이런 시각을 의식해서인지 이 총재는 당분간 한은 수장으로서의 실력 입증에 주력하겠다는 암시도 덧붙였다. 이 총재는 “물가와 성장 간 상충관계(trade-off)에 따른 정교한 정책대응이 중요해졌다”며 “앞으로의 1년은 한국은행의 진정한 실력을 검증받는 한 해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