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규현 국가정보원장이 지난 23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정보위원회 전체회의에 출석해 자리하고 있다. (왼쪽부터)권춘택 1차장, 김 원장, 김수연 2차장. 국회사진기자단
이번 인사는 북한이 첫 군사정찰위성을 발사하는 등 안보 이슈가 산적한 상황임에도 후임 원장 후보자 지명조차 없이 전격적으로 이뤄졌다. 윤 대통령이 해외에서 엑스포 유치를 위해 애쓰는 중에도 국내에서 국정원발 인사 문제가 언론에 보도되고 논란이 이어지자 수뇌부 전면 교체라는 초강수 카드를 꺼내 든 것이다.
실제로 오는 28일(현지시간) 개최지 선정 투표가 이뤄지는 프랑스 파리를 비롯, 투표권이 있는 국제박람회기구(BIE) 회원국에서는 주재 공관을 중심으로 첩보전을 방불케 하는 유치전이 치열하게 펼쳐지고 있다는 게 외교 소식통의 설명이다.
특히 한국이 접촉한 상대가 알려지면 경쟁국인 사우디아라비아 당국자들이 곧바로 해당 국가를 다시 방문해 후한 '오일 머니'를 제시하는 등 막판 표 단속이 한창이다. 기밀을 유지하는 동시에 경쟁국의 움직임, 주재국의 판단 변화 여부 등 정보를 모으기 위해 외교관들은 물론이고 파견된 정보관(화이트 요원)들도 발벗고 나선 상황이라고 한다.
윤 대통령이 파리에서 막판 유치전을 펼치는 가운데 기민한 정보전으로 이를 뒷받침해야 할 국정원에서 잡음이 불거져 나온 걸 더 엄중하게 인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국정원장 연말 교체설은 이미 몇 달 전부터 흘러나왔지만, ‘국가적인 차원에서 역량을 집중해야 할 시기’라는 점도 윤 대통령의 결정에 상당부분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프랑스 파리를 방문한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23일(현지시간) 파리 시내의 한 호텔에서 열린 국제박람회기구(BIE) 대표 교섭 만찬에서 환영사를 하는 모습. 대통령실 제공, 뉴스1
또 다른 소식통은 "김규현 원장은 처음 부임 때부터 권춘택 1차장과 엇박자를 보였다"며 "1차장이 미리 뽑아놓은 비서실장을 김 원장이 몇 시간 만에 측근으로 교체하는 초유의 사태로 원내 분위기가 뒤숭숭했다"고 전했다.
'견제파'를 중심으로 김 원장이 본연의 임무보다는 자신의 자리를 보전하기 위해 여러 가지 행태를 보였다는 주장도 나왔다. 정보라인 관계자는 "김 원장이 VIP 동선이나 관심사, 잠재적인 원장 후보군을 견제하는 것에 더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얘기가 심심치 않게 흘러나왔다"고 말했다.
반면 김 원장과 가까운 진영에선 "국정원 내 인사 갈등과 관련한 메시지를 외부로 퍼트리는 배후를 용산에서도 주목하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이번 인사에서 1·2차장까지 경질하면서 수뇌부에 공동으로 책임을 물은 것 자체가 이런 인식을 방증하는 것이란 해석을 내놓으면서다.

국가정보원 전경. 사진 국가정보원
실제 국정원 내 인사 갈등으로 인해 용산에는 한동안 '투서'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급기야 언론 제보를 통한 폭로전 양상까지 보이자 양쪽 모두에게 책임을 묻는 상황에 이르게 됐다는 게 익명을 원한 여권 관계자의 설명이다. 이 관계자는 "정보기관에서 권력 다툼으로 일부만 경질된다면 살아남은 라인이 득세하거나 인사의 본질이 왜곡될 수 있기 때문에 이를 방지하기 위한 차원에서 핵심 수뇌부를 모두 경질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대통령실 안팎에선 정보기관의 인사 갈등이 정부의 국정 동력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는 문제 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후문이다. 이 때문에 후임 원장을 물색하는 기준은 정부와 조직에 대한 충성심이 핵심이라고 한다. 이와 관련해 여권 관계자는 "국정원장이 인사청문회를 통과하기 전까지 직무대행을 맡게 된 1차장에 군 출신을 임명한 것이 충성심 깊은 후임 원장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힌트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규현 국가정보원장이 27일 오후 국정원 청사에서 열린 이임식에서 이임사를 하는 모습. 국정원 제공
이어 김 원장은 "대통령의 국가 운영에 가장 중요한 기관인 국정원을 바로 세우고 본연의 임무를 잘 수행하도록 하는 임무를 맡았는데 충분히 기대에 부응했는지 다소 아쉬움이 남는다"면서도 "그러나 지난 정부에서 길을 잃고 방황했던 국정원의 방향을 정하고 직원 모두가 다 함께 큰 걸음을 내딛은 것에 자부심을 느낀다"고 밝혔다.
국정원은 이날 기자단에 배포한 보도자료를 통해 김 원장의 재임 기간 주요 성과로 ▶국정원의 정체성 확립과 조직역량 강화 ▶안보 침해세력 척결 ▶가치동맹과 국익 창출 뒷받침 등을 꼽았다. 앞서 윤 대통령은 전날 국정원 1차장에 홍장원 전 영국 공사를, 2차장에는 황진원 전 북한정보국장을 각각 임명했다. 홍 1차장은 윤 대통령이 후임 국정원장 후보자를 지명한 후 국회 정보위원회 인사청문회를 통과하기 전까지 원장 직무대행을 맡을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