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3년 백상예술대상 TV부문 교양 작품상 수상작인 휴먼 다큐멘터리 '어른 김장하'는 경남 진주에서 60년 넘게 펼쳐진 김장하 선생의 숨은 선행을 담아냈다. 사진 MBC경남
그는 자신이 가난 탓에 못 배운 한을 40대에 전재산을 털어 고등학교를 지은 걸로 달랬다. 1991년 110억원 가치의 건물·땅과 함께 학교를 국가에 헌납했다. 진주에서 고등학교를 나온 문형배 헌법재판관을 비롯해 서울대 출신 과학자, 의대 교수 등 1000명은 족히 넘는 장학생을 배출했다. 오죽하면 “살아 움직이는 사회보장제도”(김현지 감독)란 별명이 붙었을까. 정작 자신은 헤진 양복, 오래된 찻잔 등을 수십년간 쓰는 검소함이 몸에 뱄다.
언론 인터뷰는 물론 상도 거절해온 탓에 그간 잘 알려지지 않았던 그의 선행을 지역 언론인 김주완(59) 기자(전 경남도민일보 국장)가 30년 시도 끝에 4년 전부터 취재했고, MBC경남 PD 김현지(42) 감독이 합류하며 다큐로 완성했다. 지난해 말 MBC경남에서 첫 방영된 뒤 입소문을 타며 올해 설 특선으로 전국에 방송됐다. 지역 방송국 다큐론 드물게 백상예술대상 TV부문 교양 작품상을 받았다.
감독 "선생, 살아있는 사회 보장제도"
“돈은 똥과 같아서 모아두면 구린내가 나고 흩어버리면 거름이 된다” “(한약업을 하며) 세상의 병든 이들, 곧 누구보다 불행한 사람들에게서 거둔 이윤이겠기에 자신을 위해 쓰여서는 안 되겠다” 등 선생의 어록도 화제다. 지난해 5월 남성당 한약방이 폐업한 뒤 12월 김주완 기자가 펴낸 취재기 제목도 그의 입버릇에서 따온 『줬으면 그만이지-아름다운 부자 김장하 취재기』(피플파워)다.
극장판 개봉 다음날 서울 용산의 한 카페에서 만난 김현지 감독은 “창원MBC가 통합되며 진주로 옮겨온 뒤 2019년 우연히 ‘김장하’라는 낯선 이름과 믿지 못할 선행에 대해 들었고 좋은 우연이 겹쳐 다큐를 만들 수 있었다”면서 “이런 사람이 진짜 어른이구나, 생각했기에 첫 기획서 제목부터 ‘어른 김장하’였다. 널리 알리고 싶어서 처음부터 극장판을 염두에 두고 만들었다. 지역민들도 뿌듯해 하신다”고 했다. “어른이라는 단어 자체가 기대고 싶고 따뜻한 말인데, 자꾸 잊는 것 같다. 다큐를 보고 위로 받고 우는 관객이 많다”면서다.
“돈 모아두면 똥 되고 흩어버리면 거름 돼”

김장하(왼쪽) 선생이 폐업 전 한약방을 찾아온 김주완 기자를 내치지는 못 하고 손님의 약 주문 전화를 받고 있다. 인터뷰를 거절해온 선생의 목소리가 다큐에서 처음 제대로 들려오는 장면이다. 사진 MBC경남
같은 해 사천에 연 한약방은 갓 스무살 원장이 실력 좋고 정직하단 소문이 나 전국에서 손님이 밀려왔다. 많은 재산을 사회에 환원할 수 있었던 배경이다. 1973년 진주로 이전해 어려운 이웃, 학생들을 후원했다. 1923년 진주에서 일어난 백정의 해방운동이자 한국 최초 인권운동인 형평운동 기념사업회 초대이사장을 맡아 ‘진주 정신’을 알리는데 힘을 쏟았다.
아낌없이 베푼 그의 철학은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다. 불학에서 기대 없이 베푸는 것을 뜻한다. 다큐에 나온 장학생 출신 김종명씨가 “선생님 장학금을 받고도 특별한 인물이 못 되어서 죄송합니다”라고 했더니 선생이 그러더란다. “그런 걸 바란 게 아니야. 우리 사회는 평범한 사람들이 지탱하고 있는 거야.”
김장하 “우리 사회는 평범한 사람들이 지탱한다”
한약방 시대가 저물면서, 운영난도 겪었다. 그럼에도 한약방을 비우면 안 된다며 대통령 당선인의 식사 초대도 거절했다. 그만큼 정치와는 거리를 뒀다. 2000년 출범한 남성문화재단을 2021년 12월 해산하면서, 남은 재산 34억원은 경상국립대에 기증했다.

다큐 '어른 김장하'에서 김주완 기자와 김장하 선생이 같이 걷는 뒷모습을 카메라가 포착했다. 다큐에선 선생 못지 않게 김주완 기자도 '좋은 어른'을 고민하는 또다른 인물로 그려진다. 사진 MBC경남
그는 “2021년 11월 촬영을 시작할 때 약방을 닫으려고 하시던 상황이었는데, 옛날만큼 북적이진 않았지만 약 포장하고, 손님 전화를 받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고 했다. 지난해 폐업할 때까지 감사를 표하려고 찾아오는 시민‧장학생의 발길이 잇따랐다.
김 감독은 “자신의 매일을 평범하지만 성실하게 사시는 모습이 존경스러웠다”고 했다. “100억원대 돈을 번 사람이 60년 간 매일 한약방에 출근한다는 게 대단했다”면서 “자기 연민을 내려놓고 그 빈자리에 다른 사람을 연민할 수 있는 여유를 가져야 비로소 어른의 시작점에 선다는 걸 김장하 선생에게 배웠다”고 덧붙였다.

다큐 '어른 김장하'에 출연한 (왼쪽부터) 김주완 기자, 김장하 선생, 김현지 감독. 사진 MBC경남, ⓒ강호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