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만에 우리 땅에서 재현된 전쟁
1895년 끝난 청일전쟁의 결과는 조선의 위정자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불과 3년 전 청은 임오군란을 진압한 직후 흥선대원군을 납치해 톈진(天津)으로 끌고 간 뒤 조정을 압박해 영약삼단(另約三端)이라는 족쇄를 채웠다. 병자호란 이후 260여 년 동안 위세가 등등했던 청이 청일전쟁으로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순식간 상실한 것이었다.
그동안 조정은 청을 견제하는 세력으로 일본을 적당히 이용했으나 이제 팽팽했던 균형이 무너지면서 일본의 침탈이 가속화할 것은 분명해 보였다. 그런데 일본의 급속한 팽창을 우려한 러시아의 주도로 삼국간섭이 가해지자 상황이 다시 급변했다. 기세등등했던 일본이 서구 열강의 외교적 압력에 굴복한 것이었다.
일본이 승전 대가로 차지한 랴오둥(遼東)반도를 토해내는 모습을 본 조선은 적극적인 친러 정책을 펼쳤다. 물론 러시아도 한반도를 노리는 또 다른 외세였으나, 청 대신 일본을 견제할 적당한 세력으로 여긴 것이었다. 을미사변에 놀라 1896년 러시아 공사관으로 왕과 세자가 피난 간, 이른바 아관파천(俄館播遷)을 단행했을 정도로 친러 행보는 노골적이었다.
결국 한반도를 통해 대륙으로 진출하려는 집념을 포기하지 않는 일본과 역시 만주를 거쳐 한반도로 세력을 확장하려는 러시아의 충돌은 피할 수 없었다. 제국주의가 판을 치며 세계사가 요동치는 격변의 시기에 우리 위정자들이 눈을 감고 개혁과 근대화에 처절히 실패한 대가는 이처럼 위태롭게 하루하루를 연명해야 했을 만큼 파장이 컸다.
1904년 2월 8일, 뤼순(旅順)항에 있던 러시아의 극동 함대를 일본이 기습하면서 마침내 러일전쟁이 시작됐다. 그리고 다음 날 제물포 앞바다에서도 해전이 벌어졌다. 6척의 순양함으로 구성된 일본 함대가 제물포항(인천항)에 정박 중인 바략과 코리예츠를 기습해서 격침했다. 일본은 잔여 러시아 함정을 뤼순에 가두고 서해를 완전히 장악했다.
일본이 정식으로 선전포고한 것은 최초 공격이 있은 지 이틀이 지난 2월 10일이었다. 전쟁사에서 자주 발견할 수 있는 일본의 야비함은 이처럼 뿌리가 깊었다. 러시아는 대응을 선언했지만, 정작 그때부터 전쟁 준비에 돌입해야 했을 만큼 부족한 점이 많았다. 지난 10년 동안 러시아를 향해 칼을 갈아 온 일본의 움직임은 정교하고도 빨랐다.
다섯 번이나 상륙작전이 있었던 곳
일본은 서해 일대에서 러시아 극동 함대를 공격함과 동시에 지상전을 염두에 두고 교두보를 확고하게 다지기 위해 한반도 점령에 나섰다. 제물포 해전이 벌어진 2월 9일, 3000여 명의 육전대가 인천에 상륙한 뒤 서울로 진군했다. 이는 일본의 두 번째 인천상륙작전이었는데, 10년 전인 청일전쟁 당시에 실시했던 첫 번째 상륙과 목적과 내용이 동일했다.
역사상 인천(강화도 제외)에 현대식 군대에 의한 상륙작전은 다섯 차례가 있었다. 그중 두 번이 이처럼 일본의 침략 과정 중에 있었고, 모두 우리의 국권이 유린당한 경우였다. 한마디로 치욕이었고 두고두고 곱씹어야 할 역사의 아픔이다. 이처럼 한반도가 우리의 의사와 상관없이 다시 전쟁터가 되었음에도 조정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1897년 독립국임을 주창하며 대한제국이라는 그럴듯한 옷으로 갈아입었지만, 무능함은 변하지 않았던 것이다. 러시아와 일본의 대립이 격화하던 1904년 1월 23일 중립을 선포했어도 지구상에서 대한제국의 중립을 인정하고 보호할 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게 인천에 상륙한 일본군은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서울을 점령했다.
2월 12일, 주한러시아공사와 직원들이 서울을 떠났고 러시아와 대한제국의 국교는 단절됐다. 그러자 일본은 총칼을 앞세워 대한제국 조정을 압박해 2월 23일 한일의정서를 체결했다. 이에 따라 일본군은 어느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한반도에서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게 되었고 곧바로 주둔 병력을 5만까지 증강했다.
손쉽게 서울을 확보한 일본은 평양과 압록강을 거쳐 펑톈(奉天)까지 진격했다. 이 또한 10년 전 청일전쟁에서 있었던 방법을 재방송한 것이었으나 청과 달리 러시아는 뤼순과 펑톈에서 극렬히 저항했다. 하지만 보급 문제로 결국 1905년 3월 지상전에서 패했고 5월 쓰시마(對馬島) 해전에서 발트함대가 궤멸 되면서 러일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그리고 11월 17일 일본은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했다. 이 모든 것이 인천에 일본군이 상륙한 지 불과 2년도 되지 않아 벌어진 일이었다. 청일전쟁 이후 10년 동안 단지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옷만 갈아입었을 뿐이지 국권을 수호하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못한 한심함의 결과였다. 두고두고 잊지 말아야 할 역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