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의 인터넷 서비스 제공업체인 허치슨글로벌커뮤니케이션스(HGC)는 4일(이하 현지시간) 중동 지역 4개 주요 통신사의 해저 케이블이 크게 손상돼 홍해를 지나는 아시아ㆍ중동ㆍ유럽의 통신망 중 25% 가량이 영향을 받았다고 밝혔다. 아시아 트래픽의 약 15%가 서쪽으로 이동하는데, 이 중 80%는 홍해의 해저 케이블을 거쳐 간다.
이동통신 시장조사기관인 텔레지오그래피에 따르면 유럽과 아시아를 오가는 인터넷 트래픽의 90%가 홍해의 해저 케이블을 이용한다. 한마디로 홍해는 인터넷 통신의 요충지다. 이번 사태로 인도, 파키스탄과 동아프리카 일부 지역의 인터넷 연결이 불안정해졌다. 하지만 다른 곳으로 트래픽을 돌리면서 인터넷이 완전히 먹통이 되진 않았다.
다만 케이블 복구 작업이 상당히 늦어질 전망이다. 현재 예멘이 내전을 벌이고 있는데, 해저 케이블을 다시 깔려면 내전 양쪽의 허가를 모두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누가 해저 케이블을 끊어놨을까?
하이브리드 전쟁에 적합한 해저전
이스라엘 매체인 글로브스는 지난달 26일 예멘의 후티 반군을 범인으로 지목했다. 앞서 지난달 5일 예멘 정부와 예멘 정부 산하 통신회사는 후티 반군 관련 텔레그램 채널에서 홍해의 해저 케이블 지도가 올려진 점을 들며 후티 반군이 해저 케이블을 사보타주할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했다.
후티 반군은 즉각 이 같은 의혹에 대해 부인하면서 미국과 영국의 소행이라고 주장했다. 일부 전문가들은 지난달 18일 후티 반군에 공격당한 뒤 침몰한 화물선 루비마르호를 사고 원인으로 추정하고 있다.
홍해 해저 케이블 사태의 교훈은 두 가지다. 하나, 범인을 찾기 어렵다. 잠수부의 소행일 수도 있고, 닻이나 어망을 끌고 가는 배의 소행일 수도 있다. 범인이 찾더라도 고의성을 입증하기 어렵다. 그래서 요즘 뜨고 있는 하이브리드 전쟁(군사적 조치와 비군사적 조치를 적절히 섞은 전쟁)에 적합하다.
둘, 그런데 효과는 크다. 영국 국방부는 전 세계 인터넷 통신의 99%가 해저 케이블을 이용한다고 추정했다. 스타링크와 같은 위성 인터넷은 아직 해저 케이블의 보조 수단에 불과하다. 특정 국가의 해저 케이블을 모두 결딴내면 인터넷 대란이 일어나 그 나라의 경제와 사회에 큰 타격을 줄 수 있다.
이제 새로운 형태의 전쟁이 나타나고 있다. ‘해저전(Seabed War)’. 해저전의 전쟁터는 깊은 바다 밑이다. 목표는 해저 케이블과 가스 파이프 등 해저에 깔린 인프라다. 새로운 기술이 나오면서, 바다의 전쟁터는 바다 위에서 바다 속으로, 이제는 바다 밑으로 점점 더 깊어지고 있는 세상이다.
대만 해저 케이블 절단의 진짜 범인은
해저전은 생각보다 역사가 깊다. 시작은 제1차 세계대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1914년 8월 4일 영국은 독일에 선전포고한 뒤 독일로 가는 해저 케이블을 끊어놨다. 당시 해가 지지 않은 제국이었던 영국은 전 세계 구석구석까지 뻗은 해저 케이블망을 자랑했는데, 이를 통해 독일의 통신을 가로채기도 했다. 영국은 1945년 7월 31일 잠수정으로 베트남 인근에서 사이공과 홍콩, 사이공과 싱가포르를 연결하는 해저 케이블을 절단해 일본군 잠수함 통신을 방해했다(세이버 작전).
지난해 2월 2일과 8일 대만(臺灣) 본섬과 마쭈(馬祖) 열도를 잇는 해저 케이블 2개가 각각 불통했다. 마쭈 열도는 대만과는 200㎞ 떨어졌지만, 중국 푸젠(福建)성과는 30㎞ 거리에 있다. 대만 국가통신위원회는 같은 달 16일 중국 어선과 화물선이 지나가면서 케이블이 끊어졌다고 밝혔다.
그런데 중국이 대만의 인터넷을 교란하려는 군사작전을 연습했다는 분석이 나왔다. 대만 국방부 싱크탱크인 국방안전연구원(INDSR)의 차이야오친(蔡堯欽) 대만 육군 대령은 중국이 앞으로 대만의 해저 케이블을 계속 파손해 대만군의 전비태세를 떨어뜨리고 대만은 국제사회로부터 고립하게 할 것으로 전망했다.
해저에는 통신 케이블만 깔린 게 아니다. 가스나 석유를 보내는 파이프라인도 있다. 그리고 이를 노리는 공격도 일어났다. 2022년 9월 발트 해의 해저 가스 파이프 라인인 노르드스트림 폭발 사고가 대표적이다. 지난해 10월 초에는 핀란드와 에스토니아를 잇는 해저 가스 파이프가 손상됐다. 두 사건 모두 범인이 드러나진 않았다.
해저전에 동원하려고 돌고래를 훈련한 러시아
해저전에 가장 열심인 나라는 러시아다. 닐스 안드레아스 스텐쇠네스 노르웨이 군사정보국장은 지난달 러시아가 민간 통신 케이블과 수중 시설에 대한 지도를 만들면서 잠재적 방해 행위를 준비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이는 노르웨이는 물론 서방권 모두의 통신과 에너지 부문에 상당한 위협이 된다.
러시아는 핵추진 잠수함 3척을 심해용 특수 잠수정 모선으로 개조했다. 이들 잠수함엔 70m의 AS-31과 길이 55m의 AS-21, AS-35 등 심해용 특수 잠수정을 탑재한다. 러시아는 또 돌고래 등 해양포유류도 군사목적으로 훈련하고 있다. 지난해 11월 세바스토폴에서 러시아 해군의 해양 가두리가 부숴진 게 발견됐다. 이 곳은 돌고래 우리로 추정된다.
중국도 해저전에 적극적으로 투자하고 있다. 2019년 10월 1일 중국 건국 70주년 열병식에서 처음 등장한 HSU001 무인 잠수정은 중국 해저전의 비밀 무기다. 이 잠수정은 길이 약 5m, 지름 약 1m로 작은 편이다. 중국 국영 조선업체인 중국조선중공업(CSIC) 연구소는 HSU001을 ‘기뢰 제거, 적 해저 케이블 도청ㆍ파괴, 특수전 침투 등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차세대 군용 무인 잠수정’이라고 소개했다.
러시아와 중국의 위협에 서방권도 손을 놓고 있지 않다. 가장 적극적인 국가는 영국이다. 영국은 ‘중요 수중 인프라전(CUIW)’이란 개념에 따라 지난해 10월 해저 자산 보호 함선인 프로테우스함을 도입했다. 이 배엔 첨단 센서를 달았고 자율주행 잠수정을 운용해 해저 케이블이나 가스 파이프를 방어할 수 있다. 영국은 유사 함선을 1척 더 도입할 계획이다.
프랑스는 2022년 2월 14일 해군의 작전 영역을 수심 6000m까지 확대하는 해저 전략을 발표했다. 미국은 버지니아급 블록 Ⅳ 공격 핵 추진 잠수함 1척을 대형무인잠수정(LUUV) 운용 능력을 추가해 해저전을 위해 개조할 예정이다. 스웨덴도 건조 중인 A26 블레 킹에급 잠수함에 해저전 지원을 위한 설계를 반영했다. 호주는 해저전을 위해 최대 6000m까지 잠항할 수 있는 무인잠수정 고스트 샤크를 3척 도입하려 한다.
테러 단체도 무인 잠수정을 보유한 세상
북한도 해저전 동향을 눈여겨 볼 것이다. 해저전은 군사 강국이나 기술 선진국만이 벌이는 전쟁이 아니다. 팔레스타인 무장 단체인 하마스는 이스라엘의 해상 천연가스 생산시설을 노린 무인 잠수정(UUV)을 개발했다. 이스라엘군은 하마스 무인 잠수정의 공격을 여러 번 격퇴한 적 있다.
북한도 ‘해일’이라는 핵탑재 수중 드론을 개발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군 당국은 해일의 핵탑재 능력을 의심하고 있지만, 적어도 해저전을 벌일 수 있는 무인 잠수정을 연구하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해졌다.
군사 전문 자유 기고가인 최현호씨는 “기술이 발전하면서 위협이 진화하고 있지만, 대응은 늘 뒷북을 울리는 경우가 많다. 해저전의 주요 목표인 해저 케이블은 이미 상당히 높은 위험에 노출됐다”며 “국가의 중요한 인프라를 보호하기 위해 최근 정부가 신경을 쓰기 시작한 대(對) 드론처럼 해저 인프라 보호에 대한 종합적인 로드맵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