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통령' 예상했는데 '소통령'…이재명이 어색한 재벌 총수들

이 대통령의 기업관, 진짜 달라진 걸까

경제+
이재명 정부 초대 내각에선 기업인 3명이 장관 후보자에 지명됐다. 세간에서는 그가 취임 일성으로 밝힌 ‘실용적 시장주의’가 구체화됐다고 평가한다. 과거 “재벌 해체에 정치 생명을 걸겠다”고 외치며 재벌개혁 전사로 불렸던 그는 이제 “경제의 핵심은 기업”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여전히 노동·지배구조 개혁에는 한 치 물러섬이 없다. 재계가 긴장하는 이유다. 이 대통령의 성남지사·경기도지사 시절 행보를 통해 ‘실용주의자’라는 이 대통령의 기업관을 자세히 살펴봤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달 13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간담회를 열고 5대 그룹 총수와 경제단체장들을 만났다. 왼쪽부터 구광모 LG그룹 회장,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이 대통령,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사진 대통령실사진기자단]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달 13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간담회를 열고 5대 그룹 총수와 경제단체장들을 만났다. 왼쪽부터 구광모 LG그룹 회장,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이 대통령,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사진 대통령실사진기자단]

#1 “족벌 재벌 해체에 제 정치생명을 걸겠다.” 2017년 1월 15일. 당시 이재명 성남시장은 지지 모임 출정식에서 이렇게 선언했다. 전국에서 모인 1만5000여 명의 지지자들은 “혁명하라”를 연호하며 색색깔 풍선을 흔들었다. 당시 이 시장은 “대한민국을 틀어쥐고 있는 거악은 정치권력이 아니다. 바로 정치 권력조차 쥐락펴락하는 경제권력”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2 “경제의 핵심은 바로 기업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달 13일 용산 대통령실에서 5대 기업 총수 등과 만나 “기업이 경제성장에 기여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협조하는 게 정부의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밝혔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그는 “언제든 휴대전화로 연락해 달라. 메시지를 남겨놓으면 꼭 다 읽어보겠다”고 하며 소통 의지를 드러냈다.

◆오락가락? 유연? 기준은 “법대로”=재벌 해체 전사에 가까웠던 이 대통령의 ‘우클릭’에 대해 야권에선 “우클릭 사회주의”(오세훈 서울시장), “영혼 없는 C급 짝퉁”(권성동 전 국민의힘 원내대표)라는 날 선 비판이 쏟아졌다.

박경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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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에 이 대통령과 ‘40년 지기’인 이한주 국정기획위원장은 지난 5월말 중앙일보와 만나 “여건이 달라졌다”고 변화의 배경을 설명했다. 이 대통령이 재벌을 향한 신랄한 발언을 쏟아냈던 건 박근혜 정부 시절로 당시는 재벌의 하청업체 ‘갑질’ 등 구조적 문제 해결이 시급했지만, 지금은 글로벌 경쟁 심화로 기업의 생존 자체가 과제가 됐고 지배구조 문제도 상당 부분 해소됐다는 것이다. 이 위원장은 1986년 성남에서 이 대통령과 처음 만나 멘토 역할을 해 온 인물이다. 성남시장 시절 ‘3대 무상 복지’(무상 교복·청년 배당·산후조리원)를 설계했고 경기도지사·민주당 대표 시절 각각 경기연구원장·민주연구원장을 맡아 정책을 총괄했다. 대선 캠페인에선 선대위 정책본부장을 지냈다.

그런 이 위원장이 본 이 대통령 경제 철학의 핵심은 ‘법대로’다. “기업이 법을 어기지 않는다면 최대한 협조하겠다”는 태도가 원칙이며 개별 상황에 대해서는 ‘실용주의’라는 관점에서 대처하겠다는 것이다. 이 위원장은 “이 대통령은 철저하게 실용주의적인 사람”이라며 “이념적으로 행동하는 걸 염려한다면, 그건 아니다”고 선을 그었다. 또 유연한 변화에 대해서는 “살아 움직이는 경제에 하나의 고정된 잣대를 대는 게 되레 어리석다”고 했다.


그래서 이 위원장은 전 정부가 세금을 깎은 걸 ‘부자 감세’로 몰아붙여 즉각 세금을 올리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세수 기반이 굉장히 악화돼 있다”면서도 “지금처럼 대외 상황이 악화돼 경제가 안 좋고 기업이 경쟁력이 떨어져 있을 때 (법인세 등) 세금을 올리게 되면 기업이 더 헤맬 수 있다”며 신중론을 유지했다.

다만 이 위원장은 “원칙 없는 실용주의는 안 된다”고 경계했다. 그 예로 든 것이 ‘상속·증여세 인하’ 문제다. “부의 부당한 상속이라는 것은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도 했다. 특히 “‘기업들이 (상속·증여세 인하) 안 해주면 우리 사업 안 해’ 이런 식의 행태는 단호하게 대처해야 한다”며 “편법이 누적돼 생긴 법의 빈틈이 마치 ‘새로운 법’처럼 굳어진 경우라도, 정부가 이를 미리 차단하지 못했다면 사후에는 반드시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못박았다.

주 52시간제를 반도체 연구개발(R&D) 직군 등에 한해 완화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노동부 훈령으로도 주 52시간제를 유연하게 운영하는 게 가능한데도 이를 건너뛰고 법 자체를 바꾸려는 시도는 신중해야 한다”고 선을 그었다. 중대재해처벌법에 대해서는 “현장에서 사람이 목숨을 잃는다면 그로 인해 돈을 벌고 회사를 운영하는 이상 (법적) 책임을 지는 게 당연하다”고 봤다.

◆‘직접 뛴다’ 이재명의 실용 프레임=성남시장과 경기도지사 시절 함께 일한 공직자들은 이 대통령에 대해 “필요하다면 누구에게든 적극적으로 접촉하고 설득하는 타입”이라고 입을 모았다.

박경민 기자

박경민 기자

코로나19 시기였던 2021년 4월 새벽 경기도청 집무실. 당시 경기지사였던 이 대통령은 독일 머크 일렉트로닉스의 카이 베크만 대표와 화상으로 연결된 스크린 앞에 앉아있었다. 이 대통령은 “한국엔 ‘3대 부자도, 3대 거지도 없다’는 말이 있는데 350년 넘는 세월 동안 13세대가 한 기업을 지켜온 건 정말 위대한 일”이라며 인사를 건넸다. 당시 투자 정보 분석부터 입지 조율, 협력 방안 논의까지 실무 수준의 대화가 오간 화상 회의 끝에 머크는 2500억원 규모의 경기도 투자를 결정했다.

그해 이 대통령은 정용진 신세계그룹 회장에게 공개적으로 감사 편지를 보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신세계가 10여 년간 표류하던 화성 국제테마파크 투자를 맡으면서다. 이 대통령은 페이스북에서 “통 큰 결단에 감사한다”며 “친기업, 반기업의 이분법을 넘어 오직 주권자인 도민의 삶을 최우선에 두고 판단할 따름”이라고 적었다.

‘족벌 재벌 해체’를 주장하던 성남시장 시절과 확 달라진 행보에 대해 주변에선 인구 1400만의 경기도정을 맡으며 달라졌다고 평가한다. ‘성장’과 ‘분배’를 동시에 해결해야 하는 자리를 맡으며 관점도 변했다는 해석이다. 후보 시절인 지난 3월 이 대통령은 한 인터뷰에서 “일선 병사, 일선 사령관의 입장과 전체를 다 총괄해야 하는 전략사령관일 때는 사물을 보는 시각도 다르고 책임도 다르다”고 했다.

경기도청 미래성장정책관을 지낸 임문영 더불어민주당 디지털특위위원장은 중앙일보에 “이 대통령은 기업의 본질은 사회 정의 실현이 아니라 이윤 창출이라는 점을 정확히 이해한다”고 말했다. 지사 시절 함께 일했던 경기도의 현직 공무원도 “‘공정하게 룰(rule)을 행사하지 않으면 너무 큰 피해가 국민에게 돌아간다’는 말을 이 지사로부터 귀가 따갑도록 들었다”고 전했다.

지난 2021년 4월, 이재명 당시 경기도지사(오른쪽)가 경기도청 상황실에서 카이 베크만 머크 일렉트로닉스 대표와 화상 투자회의를 진행하며 인사를 나누고 있다. [사진 경기도]

지난 2021년 4월, 이재명 당시 경기도지사(오른쪽)가 경기도청 상황실에서 카이 베크만 머크 일렉트로닉스 대표와 화상 투자회의를 진행하며 인사를 나누고 있다. [사진 경기도]

◆재계의 복잡한 셈법은=이 대통령은 후보 시절 산업 재해 문제에는 타협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강하게 내비쳤다. 또 노란봉투법(노조법 2·3조 개정안)과 상법 개정안에 대한 의지도 변함 없다. 최근엔 고용노동부 장관 후보자에 김영훈 전 민주노총 위원장이 지명되면서 재계의 긴장감은 더욱 높아졌다. 김 후보자는 “노란봉투법은 반드시 가야 할 길이다.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고 공언했고, 이한주 국정기획위원장도 “좀 더 전향적으로 끌어안을 방법이 있는지 검토해 봐야 한다”고 밝혔다. 노란봉투법은 하청 근로자에 대한 원청 책임을 강화하고, 파업 행위에 대한 기업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가압류를 제한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기업들은 노조의 불법 파업이 더 잦아질 것이라 우려한다.

재계는 이 대통령의 ‘법대로 실용주의’가 어디까지 유연하게 작동할 수 있을지 지켜보며 최대한 몸을 낮추는 분위기다. 익명을 요구한 재계 관계자는 “‘실용적 시장주의’란 가치도 어디에 방점이 찍히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를 낳을 수 있다”며 “시나리오별로 움직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당장 상법 개정안이 시험대가 될 전망이다. 기업 이사회의 충실 의무 대상을 현행 ‘회사’에서 ‘회사 및 주주’로 확대하는 이 법안에 대해 재계는 경영권 공격 대상에 노출될 것이라 우려하지만, 이 대통령과 여당은 주주 권익 보호를 위해 법 개정이 필요하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