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국어 표음화를 위해 기존 한글 자모를 활용해 치두음과 정치음 등을 제작했다. 외국어 발성 방법이 적힌 훈민정음 언해본이 담긴 월인석보. 사진 국립한글박물관
중국어 학자인데 왜 훈민정음을 연구하세요?
첫 질문에 환갑의 교수는 훈민정음 언해본을 펼친 뒤, 낯설면서 익숙한 ‘ᅎ, ᅔ, ᄼ’, ‘ᄾ, ᄿ, ᅐ’ 글자를 보여줬다. ㅈ(지읒), ㅊ(치읓), ㅅ(시옷) 좌우획 중 왼쪽이 늘어졌다면 혀끝이 윗니 뒤에 닿는 엷은 소리인 치두음(齒頭音), 오른쪽으로 늘어졌다면 혀끝이 아랫잇몸에 닿는 두터운 소리인 정치음(正齒音)으로 불리는 옛 한글 자모다. 쓰임새가 사라졌다고 가치가 사라졌을까. “중요한 가치를 지닌 옛 한글에 주목할 때”라고 답한 심소희 이화여대 중어중문학과 교수를 지난 4일 만났다.

심소희 이화여대 중어중문학과 교수는 성운학을 공부하면서 한글의 우수성을 깨달았다. 심 교수는 “500년 전 집현전에서 발음 부위, 방법 등을 바탕으로 가장 정확한 표음문자를 만들었다는 사실이 놀랍다”고 말했다. 심소희 교수 제공
심 교수가 처음부터 한글을 연구했던 건 아니다. 석사과정에서 성운학을 배우며 어떻게 한자를 읽어야 하는지 고민했다고 한다. 그러던 중 우연히 훈민정음을 접하면서 한글의 우수성과 매력에 빠졌다. 심 교수는 “중국은 1958년이 되어서야 표음체제가 확립됐지만, 불안정하다”며 “500년 전 집현전에서 발음 부위, 방법 등을 바탕으로 가장 정확한 표음문자를 만들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고 말했다.
심 교수는 고서에 있는 옛 한글을 주목한다. 옛 한글이 동아시아사 500년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연구가치가 높은 고서는 훈민정음 언해본과 역관을 위한 중국어 교본 노걸대(老乞大)다. 특히 훈민정음 언해본 사본은 페이지가 덜렁거릴 정도로 수백번을 봤다.

역관(통역 관리)을 위해 편찬한 중국어 교본인 노걸대는 회화 내용을 한글과 외국어로 기록됐다. 1517년 편찬된 번역노걸대. 심소희 교수 제공
노걸대에는 “말 15마리를 85정에 팔자”고 제안하는 중개인 말에 “말을 사려고 온 것이냐. 말을 놀리러 온 것이냐”고 화를 내는 상인 등 회화 내용을 한글과 중국어로 기록했다.

1517년 번역노걸대와 1795년 중간노걸대언해에 따르면, ‘去(갈 거)’의 음은 구개음화가 진행됐다. 중국과 몽골은 한글과 같은 표음문자가 없어, 당시 발음법을 구현하지 못한다. 심소희 교수 제공
심 교수는 한국연구재단의 학술연구지원사업을 통해 정년인 2030년까지 노걸대 등 고서 152권을 바탕으로 동아시아 언어 체계 연구한다. 중국어·일본어·몽골어·만주어·산스크리트어가 연구대상으로, 박진호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이경철 동국대 일본학과 교수, 김바로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도 함께한다. 심 교수는 “과거 동아시아 언어를 음성 데이터베이스로 구축해 무료로 공유하는 것이 목표”라며 “당시 주변국의 발화를 생동감 있게 재구현할 수 있어 사극 등 문화 콘텐트에도 활용될 것”이라고 말했다.

심소희 이화여대 중어중문학과 교수는 “한글을 배우는 외국인, 한글을 통해 소수언어를 표기하는 이들을 위해 외국어표현법을 도입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심 교수가 노걸대에 적힌 옛 한글을 설명하고 있다. 이찬규 기자
※휴대전화 기종에 따라 폰트가 지원되지 않아 옛 한글 자모가 구현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