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이 인공지능(AI) 변호사·법률가 시대를 개막한 원년으로 기록될까. 리걸테크, 법률 플랫폼 기업은 물론 대형 로펌들이 AI 법률 상담 챗봇에서 판례 검색·요약 서비스를 개발·활용하면서다. 가장 보수적인 법원도 고질적인 인력난에 AI 시스템 도입을 추진하고 나섰다.
생성형 인공지능(AI) 이후 법조계의 법률 AI 도입이 빨라지고 있다. 셔터스톡
전통적으로 ‘법조삼륜’(판사·검사·변호사) 가운데 변화의 속도가 가장 느린 법원이 다양한 AI 활용 방안 모색에 나선 것은 상징적이다. 대법원 사법정보화실은 지난 10일 ‘재판 지원을 위한 AI 개발 정보화 계획(ISP)’에 대한 최종 내부 보고를 받았다. ▶소송 준비서면·의견서 등 자동 요약 ▶조정·화해 적합 사건 자동 추천 ▶민원 상담 챗봇 등 AI가 보조할 수 있는 영역에 대한 개발 사업에 착수한 것이다. 법원행정처 관계자는 “재판 지연 해소 등 법원에 가장 큰 도움이 될 영역부터 떼어냈고, 기획재정부에서도 시의적절하게 호응해줬다”며 “국회에서 내년 예산안에 반영하면 곧바로 개발에 착수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대법원은 내년 개통할 차세대 전자소송시스템에 AI를 활용한 유사 판결문 추천, 소송 절차 안내봇 기능 등도 도입할 예정이다. 지난 7~8월엔 판사체험단 100명을 꾸려 ‘엘박스AI’ ‘슈퍼로이어’ 등 각종 리걸테크 서비스 체험을 진행하고 있다. 앞서 법무부·검찰·경찰 등은 지난달 형사사법정보시스템(KICS·킥스)을 업그레이드하며 AI 유사 사건 추천, 음성 인식 조서 작성 기능 등을 도입했다.
10대 로펌·스타트업, 올해 ‘법률 AI’ 대거 선보여
대형 로펌들은 한발 빠르게 움직였다. 14일 중앙일보가 김앤장·광장·태평양 등 국내 10대 로펌을 전수조사한 결과 대부분이 소속 변호사를 위한 내부용 AI 서비스를 갖췄다고 응답했다. 특히 올해는 사건 관련 판례·법령 검색 AI, 법률 용어에 특화된 전문번역 AI, 의견서·소장·제안서·변론요지서 등 법률 문서 분류 및 초안 작성 AI 등 통상 ‘어쏘(저연차) 변호사’들이 맡아온 단순 업무를 보조하거나 대체하는 기능들이 대폭 향상했다고 한다.
법무법인 세종과 화우는 지난 7월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지원하는 ‘AI 법률보조 서비스 확산 사업’ 사업자로 선정됐다. 세종은 리걸테크업체 페르소나AI와 함께 국민 체감형 서비스인 ‘AI 변호사 플랫폼’(지원액 44억원)을, 화우는 로앤컴퍼니(로톡)과 함께 민간 전문가용 서비스인 ‘법률 사건 분석 플랫폼’(18억원)을 만들고 있다. 전문분야별 AI도 나오는 중이다. 법무법인 율촌은 지난 8월 중대재해처벌법·노동법 등과 관련 자체 유튜브·세미나 영상 링크와 요약 등을 제공하는 ‘AI 중대재해’ 검색 서비스를, 법무법인 바른은 사내용 ‘AI 선거법’ 챗봇을 만들었다.
리걸테크 어디까지 왔나 그래픽 이미지. [자료제공=각 부처·기관·회사 취합]
리걸테크 스타트업들도 올 1~7월 판례·법령 리서치와 문서 요약, 법률 문서 초안 작성이 가능한 AI 서비스를 대거 출시했다. 지난 4월 베타출시된 엘박스 AI는 법조인 사용자 6000명을 모았고, 엘박스는 지방변호사회 14곳 중 13곳과 업무협약(MOU)을 체결했다. ‘슈퍼로이어’(로앤컴퍼니)는 지난 7월 정식출시(3월 베타출시) 이후 석 달 간 법조인 회원 4300명을 확보했다. 이밖에도 국내외 계약 검토 및 자문 AI ‘앨리비’(BHSN), 선거법·성범죄·이혼·개인정보·금융 등 분야별 검색 AI ‘로앤서치’(로앤굿) 등이 각각 지난 1월과 3월 기업·기관용으로 출시됐다.
‘퍼스트 펭귄’ 대륙아주 논란 끝 중단…변협·법무부 빗장 관건
하지만 현재로선 AI 변호사 서비스 대부분이 로펌 및 법원 등 기업·기관용에 머물고 있다. 로스쿨을 갓 졸업한 청년 및 개인 변호사 시장을 잠식할 것이란 대한변호사협회(변협) 등 법조단체의 우려와 반발 역시 크기 때문이다.
실제 대국민 법률상담 챗봇 ‘AI 대륙아주’를 선보였던 법무법인 대륙아주는 지난 8일 출시 7개월 만에 스스로 서비스를 접었다. 변협이 “24시간 무료 상담을 표방하는 AI는 변호사법·변호사 광고 규정 위반”이라며 징계 절차에 착수했기 때문이다. 대륙아주 관계자는 “평판으로 먹고 사는 로펌이 대표변호사 전원 징계까지 감수하면서 서비스를 유지하긴 어렵다”고 털어놨다.
지난 8일 서울 역삼동 법무법인 대륙아주 대회의실에서 열린 AI 대륙아주 징계 관련 기자회견에서 (왼쪽부터) 특별대리인 최창영 법무법인 해광 대표변호사, 이규철 대륙아주 경영전담 대표변호사, 이재원 넥서스AI 대표가 지난 3월 출시한 'AI 대륙아주' 서비스 잠정 중단을 발표하고 있다. 김정민 기자
변협 관계자는 “AI가 단순 법률업무를 대체하는 흐름이 계속된다면 대형 로펌들이 신입·어쏘 변호사 채용을 줄일 가능성이 크고, 도제식 교육 역시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시장이 빈익빈부익부로 양극화될 것”이라며 “AI가 의뢰인 개인정보 등을 무단 학습하는 문제, AI가 부정확한 정보를 제공했을 때 책임 소재가 불분명한 문제 등도 산적해있다”고 말했다.
반면에 복수의 10대 로펌 관계자는 “변호사 제명권을 가진 변협이 대국민 법률 AI 서비스에 징계 방침을 고수하고 있어 적극 알릴 순 없지만, 물밑에서 내부용 AI의 대국민 서비스 전환이나 개발을 검토하는 곳은 꽤 많다”고 말했다. 리걸테크 연구모임을 창립한 판사 출신 이현곤 변호사는 “AI는 막는다고 막아질 흐름이 아니다”라며 “국내 여러 규제와 불안정한 제도적 기반 탓에 발전 자체를 못하고 있는데 어떻게 폐해를 논할 수 있겠나”라고 말했다.
그러나 갈등을 중재할 정부부처 간에도 엇박자가 나고 있다. 법무부가 “변호사 1차 징계권은 변협에 있다”며 ‘법률 AI 가이드라인’ 제정에 미온적이다. 대신 과기부가 대국민 법률 AI 확산 사업을 적극 나서고 있다. 과기부 관계자는 “법무부로서는 제도 기반을 새로 만들어야 한다는 어려움이 있겠지만 부처 간 속도 차가 큰 것이 사실”이라며 “지난 7월 추진한 시범 서비스들 역시 혁신을 추구하기보다는 현행법을 준수하는 범위에서 제한적으로 만들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지난 7월 권칠승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대표발의한 ‘리걸테크산업진흥법’ 역시 개별 사업자가 법무부 허가를 받아 사업을 진행하는 것이 골자다. 결국 변협과 법무부가 국내 리걸테크 시장의 빗장을 풀 핵심 관건인 셈이다.
법무부는 “법무부 변호사제도개선특별위원회를 통해 객관적인 법률 AI 운영 기준 마련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며 “관련 산업의 육성 필요성에 공감하며, 국민의 사법 접근성을 제고하면서도 변호사 제도의 공공성과 조화될 수 있는 방안을 연구하고 있다”고 밝혔다. 특위 소속의 한 로스쿨 교수는 “국내에서 안 하면 해외 AI 기업에 시장·기회·데이터를 모두 넘길 뿐”이라며 “시장의 발전 속도와 환경 변화를 생각하면 가이드라인 제정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는데, 법무부에선 우선순위가 많이 밀린다”고 지적했다.
구태언 리걸테크산업협의회장(변호사)는 “주무부처인 법무부에 담당 부서가 없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며 “디지털 혁신 관련 부서를 신설한 다른 부처들처럼 디지털법무혁신국 등의 조속한 설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정민 기자 kim.jungmin4@joongang.co.kr, 최서인 기자 choi.seoi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