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사자성어는 설중탐매(雪中探梅. 눈 설, 가운데 중, 찾을 탐, 매화 매)다. 앞의 두 글자 ‘설중’은 ‘눈 속에서’라는 뜻이다. ‘탐매’는 ‘매화를 찾아다니다’라는 뜻이다. 이 두 부분이 합쳐져 ‘설경(雪景) 속에서 매화를 찾아 감상하다’라는 의미로 쓰인다. ‘산수(山水)를 읊은 시인’ 가운데 시인 왕유(王維)와 함께 으뜸으로 평가받는 맹호연(孟浩然. 689-740)의 일화에서 유래했다.
맹호연은 두보, 이백(李白), 왕유 등이 활동하던 당나라 중기의 시인이다. 그는 지금의 후베이(湖北)성 양양(襄陽)의 비교적 유복한 지식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시 창작 세계에 몰입해 과거 응시와 입신양명과는 거리를 두었다.
헌칠한 키와 준수한 외모에 지적으로도 조숙했던 그는 20세 무렵에 이미 ‘제녹문산(題鹿門山)’을 지어 독특한 산수시(山水詩) 경지를 주변에 선보였다. 23세부터는 아예 녹문산에 거처를 마련하고 은거하며 시작(詩作)에 더욱 전념했다.
거리에 나서면 뭇 여인들의 시선을 충분히 사로잡을 조건들을 가졌지만 거꾸로 속세와는 일정한 담을 쌓고 애써 거리를 유지하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젊은 시인의 각오와 의지가 예사롭지 않게 느껴진다. 절친이었던 왕유가 수도에서 태어나 일찍 과거에 급제하고 중앙 관료 생활을 하다가, 말년에 이르러서야 산속 은거를 병행한 것과도 대조된다.
25세부터 35세까지 창장(長江)을 따라 각지를 여행하며 문인들과 교류했다. 37세 무렵엔 이백을 만났고, 둘은 깊은 우정을 쌓았다. 38세에 처음으로 수도 창안(長安)에 들어가 과거에 응시했으나 아쉽게 낙방했다. 이 시기 수도에 머물며 왕유를 만났다. 이때부터 둘은 평생토록 귀한 우정을 이어나갔다.
맹호연이 관직과는 인연이 먼 운명이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일화가 하나 존재한다. 하루는 궁궐에서 당직 근무를 하던 왕유와 방문객 맹호연이 문학에 관해 담소하고 있었다. 그런데 하필 그 순간에 현종(玄宗)이 왕유를 만나기 위해 나타났다. 맹호연은 급히 몸을 숨겼다. 궁궐에 왕유를 따라 허가 없이 출입했으니 무단출입이란 죄명을 피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현종도 이미 눈치를 채고 있었으므로, 왕유는 맹호연을 불러내어 난처한 상황을 해명도 할 겸 현종과 인사를 시킨다.
워낙 문인 자질이 뛰어났고 호탕한 성격이었던 현종은 죄를 눈감아 주고는, 처음 본 맹호연에게 시 한 수를 즉석에서 지어보라고 청했다. 당황한 때문인지 과하게 자신을 낮추려는 의도였는지 알 수 없으나 맹호연은 ‘재주가 없으니 명군이 나를 버리고’라는 구절을 포함하는 시를 읊고 말았다. “그대가 내게 관직을 구한 적도 없었는데, 내가 언제 그대를 버렸다는 것인가. 대체 왜 날 무고하는 것이냐?” 심히 불쾌감을 느낀 현종은 그 문제의 구절을 문제 삼아 이렇게 질책하곤 바로 떠나버렸다.
이 일이 있고 다음 해에 맹호연은 수도를 떠나 고향으로 내려갔다. 훗날 시인 장구령(張九齡)의 지방관 시절에 참모 생활을 잠시 한 것이 관료 생활 인연의 전부였다. 질병으로 향년 51세에 일찍 세상을 떴다. 왕유, 이백 등 다수의 문인들이 애도했고 그리움을 담은 시를 남겼다.
‘설중탐매’는 맹호연이 매화를 사랑하여 추운 겨울에 당나귀를 타고 매화를 찾아 나선 일화에서 유래한다. 심사정(沈師正) 등 조선의 문인과 화가들도 즐겨 그린 소재 가운데 하나였다. 맹호연은 살면서 대부분의 시간을 자연과 가까운 곳에 머물려 무진 애를 썼다. 한적한 자연 속에서 바람 소리, 새 소리, 꽃 떨어지는 소리, 당나귀 방울 소리, 매화 피어나는 소리 등에 끊임없이 집중했다.
살펴보면, 맹호연 계보는 동서고금에 늘 있다. 그들은 무언가 이상한 힘에 이끌려 고향과 자연에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 탁월한 기록을 남긴다. 인류의 천성이고 소중한 귀소본능이다.
홍장호 ㈜황씨홍씨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