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텔서 첫눈 기다리는 마음…내장산엔 가을·겨울 교차했다

진우석의 Wild Korea 〈20〉 내장산 

내장산은 누가 뭐래도 단풍산이다. 그러나 겨울 설경도 가을에 뒤지지 않는다. 올해는 첫눈이 빨랐다. 단풍이 채 지지 않은 지난달 27일 눈이 쏟아져 이채로운 풍광을 만났다. 전망대에서 드론을 띄워 서래봉과 벽련암이 어우러진 모습을 담았다.

내장산은 누가 뭐래도 단풍산이다. 그러나 겨울 설경도 가을에 뒤지지 않는다. 올해는 첫눈이 빨랐다. 단풍이 채 지지 않은 지난달 27일 눈이 쏟아져 이채로운 풍광을 만났다. 전망대에서 드론을 띄워 서래봉과 벽련암이 어우러진 모습을 담았다.

첫눈이 기별하면 내장산으로 간다. 끝물 단풍이 마지막 불꽃을 태우고, 여린 눈송이가 소복소복 내려앉는 곳. 흰옷으로 갈아입은 산은 옅은 홍조를 띠며 웃는다. 가을과 겨울이 극적으로 교차하는 내장산을 다녀왔다.

모텔방에서 첫눈 기다리는 마음

전북 정읍 버스터미널 앞 모텔. 첫눈 예보를 듣고 지난달 26일 달려왔다. 밤이 깊어지자 수도권 폭설 소식이 들려왔다. 창문을 열어보니 한두 방울 비가 떨어진다. ‘헛다리를 짚었나?’ 12월에는 호남 지방에 눈이 많이 내리고, 내장산은 눈이 많기로 유명한 곳이라 찾아왔건만. 그래도 내일 눈 예보를 믿어본다. 꼭 눈을 보게 해달라고 두 손 모아 기도했다.

이튿날, 첫차를 타고 내장산 버스정류장에 내렸다. 어둑한 새벽길을 뚜벅뚜벅 걸었다. 시나브로 밝아오는 하늘은 잔뜩 찌푸리며 눈물 같은 빗방울을 짜낸다. 이윽고 다다른 내장사 일주문. 문 안으로 단풍나무 숲길이 보인다. 단풍나무 고목들이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맞으며 속절없이 젖는다.

벽련암에서 폭설을 만났다. 눈이 반짝반짝 빛난다.

벽련암에서 폭설을 만났다. 눈이 반짝반짝 빛난다.

일주문 앞에서 오른쪽 벽련암 방향을 따른다. 가파른 오르막길에서 흰 송이가 흩날리자 환호성이 터졌다. 허기와 피로가 사라지고 기분이 달뜬다. ‘벽련선원’ 현판이 적힌 누각에 올라 산세를 감상한다. 대웅전 뒤로 서래봉 바위 봉우리들이 웅장하다. 내장산의 최고봉은 신선봉(763m)이지만, 형세나 기상으로 보아 서래봉(624m)이 주봉 역할을 한다. 건너편으로 장군봉에서 연자봉으로 이어진 주릉과 연자봉에서 내려와 문필봉으로 흘러내리는 지릉이 눈에 들어온다. 풍수지리에서는 제비가 새끼에게 모이를 먹이는 형세라고 한다.

제비집 명당에 자리한 벽련암

원적암 가는 길에 눈이 펑펑 내렸다. 눈이 그린 설경이 환상적이었다.

원적암 가는 길에 눈이 펑펑 내렸다. 눈이 그린 설경이 환상적이었다.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더니 눈보라가 몰아친다. 서래봉을 하얗게 지우고, 대웅전까지 야금야금 집어삼킨다. 순식간에 온 세상이 하얗다. 애타게 눈을 기다리는 마음은 어느새 걱정으로 바뀐다. 원적암 가는 길로 접어들었다. 순백의 세상에 첫 발자국을 찍는 맛이 일품이다. 눈이 내려앉은 산죽은 까르르 웃는 것 같고, 눈을 무겁게 인 젖은 단풍잎들은 흐느끼는 것 같다. 


원적암 앞의 비자나무 군락지. 굴거리나무, 단풍나무 등이 눈과 어우러진다.

원적암 앞의 비자나무 군락지. 굴거리나무, 단풍나무 등이 눈과 어우러진다.

원적암 앞에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우람한 비자나무들이 총총 서 있다. 비자나무는 더는 북쪽으로 뻗어가지 못하고 이곳에 모여 북방한계 군락지를 형성한다. 큰 우산 같은 비자나무 아래로 굴거리나무와 단풍나무가 옹기종기 모여있다. 하얀 눈, 붉은 단풍, 초록 잎이 절묘하게 어우러진다.

천천히 걸어 다다른 내장사. 절 마당에 서면 왠지 마음이 따뜻해진다. 사방을 둘러보니 내장 9봉이 커다란 원을 그리며 둘러싸고 있다. 이 자리에 아홉 봉우리의 정기가 모인다고 한다. 대웅전이 공사 중이라 조금 산란하다.

내장사에서 금선계곡으로 이어진 길을 ‘조선왕조실록 이안길’로 꾸몄다.

내장사에서 금선계곡으로 이어진 길을 ‘조선왕조실록 이안길’로 꾸몄다.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했던 용굴암. 선비 안의와 손홍록이 전주사고의 실록을 이곳으로 옮기고 지켜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했던 용굴암. 선비 안의와 손홍록이 전주사고의 실록을 이곳으로 옮기고 지켜냈다.

이제 금선계곡을 따라 걷는다. ‘조선왕조실록 이안길’이란 안내가 붙어 있다. 계곡 끝 지점에서 가파른 계단을 10개쯤 오르면 용굴암에 닿는다. 정읍에 살던 선비 ‘안의’와 ‘손홍록’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주사고에 보관된 조선왕조실록과 태조 어진을 내장산 용굴암으로 옮겼다. 두 선비는 그리 크지 않은 동굴 안에서 1년 동안 실록을 보관하고 지켜냈다. 당시 다른 사고에 보관했던 실록은 모두 잿더미가 됐다.

전망대에서 드론을 띄워 바라본 내장산 산세. 설경 속에서 끝물 단풍이 잔잔한 홍조를 띤다. 사진 오른쪽에 벽련암, 왼쪽에는 전망대, 가운데에 내장사가 자리한다.

전망대에서 드론을 띄워 바라본 내장산 산세. 설경 속에서 끝물 단풍이 잔잔한 홍조를 띤다. 사진 오른쪽에 벽련암, 왼쪽에는 전망대, 가운데에 내장사가 자리한다.

용굴암 쪽에서 까치봉이나 신선봉 오르는 길은 완전히 눈에 파묻혔다. 다시 내장사로 발길을 돌린 뒤 가파른 계단을 20분쯤 올라 전망대에 닿았다. 설산으로 변한 내장 9봉이 큰 원을 그리며 내장사 일대를 감싸고 있다. 바로 이 산세가 실록을 지키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으리라.

전망대에서 펼쳐진 내장 9봉 설산  

건너편 서래봉 아래의 단풍나무들은 눈을 뒤집어쓰고 수줍은 듯 홍조를 띤다. 갑자기 시끌벅적하게 사람들이 몰려온다. 물어보니 케이블카를 타고 왔다고 한다. 너도나도 사진 찍으며 첫눈을 즐긴다. 전망대 아래 자리한 전망대휴게소에서 몸을 녹인다. 40년 넘게 한자리를 지킨 휴게소다. 케이블카가 생기기 전부터 산꾼들의 사랑방 노릇을 톡톡히 했다.  

케이블카 상부 정류장 근처의 전망대휴게소. 40년 넘게 내장산을 찾는 사람들의 사랑방으로 자리했다.

케이블카 상부 정류장 근처의 전망대휴게소. 40년 넘게 내장산을 찾는 사람들의 사랑방으로 자리했다.

“올해 단풍이 얼마나 예뻤는지 아세요.”  
묻지도 않았는데 주인아주머니가 휴대전화에 저장된 사진을 보여준다. 벽련암 일대가 새빨갛다. 불과 며칠 전 사진이다.

휴게소를 나와 다시 눈길을 밟는다. 연자봉에 오르려고 가파른 계단 길을 따른다. 아무도 밟지 않은 채 소복이 쌓인 눈을 뽀득뽀득 밟는다. 소리도 느낌도 경쾌하다. 다시 눈보라가 산을 두들긴다. 앞이 컴컴하다. 첫눈이 이렇게 센 적이 있었던가. 잠시 고민하다 발걸음을 되돌린다. 눈과 싸우지 말자. 첫눈이지 않은가. 왠지 올해는 눈이 많이 내릴 것 같다.

케이블카를 탔다. 고도를 내릴수록 눈이 줄고 단풍이 눈에 띈다. 어느새 내장산 계곡은 눈이 녹고 늦가을로 변해 있었다. 잠시 딴 세상에 갔다가 온 기분이다. 올해 첫눈은 짧고 강렬했다. 마치 우리의 첫사랑처럼.  

여행정보
박경민 기자

박경민 기자

서울 용산에서 정읍 가는 KTX가 하루 5회 운행한다. 1시간 40분 소요. 정읍역과 정읍 버스터미널 앞에서 내장산 가는 171번 버스가 출발한다. 시설 좋은 숙소가 정읍 시내에 많다. 눈꽃 트레킹 코스는 일주문~벽련암~원적암~내장사~용굴암~연자봉~전망대~일주문 코스를 추천한다. 거리는 약 9㎞, 넉넉하게 4시간 30분 걸린다. 전망대에서 케이블카를 타고 하산할 수 있다.

진우석 여행작가 mtswamp@naver.com
시인이 되다만 여행작가. 학창시절 지리산 종주하고 산에 빠졌다. 등산잡지 기자를 거쳐 여행작가로 25년쯤 살며 지구 반 바퀴쯤(2만㎞)을 걸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을 걷고, 세상에서 가장 멋진 캠프 사이트에서 자는 게 꿈이다. 『대한민국 트레킹 가이드』 『해외 트레킹 바이블』 등 책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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