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평중 교수가 본 12·3 계엄 사태
합리적 보수주의자로 불린 윤평중 한신대 명예교수가 24일 오전 1시 소셜미디어에 올린 글에서 12·3 비상계엄을 그리 표현했다. 윤 교수는 “현대 한국문명의 총체적 위기”라고 보면서도 “우리는 흔들릴지언정 결코 난파하지 않을 것”이라고 썼다.
다음날인 25일 그를 만났다. 그는 “12·3 사태 이후 충격을 받아 대부분 시민들이 그랬겠지만 굉장히 아팠다. 그만큼 충격과 트라우마가 컸다”고 했다. 비관적이기만 한 건 아니었다. 안토니오 그람시의 ‘인식의 비관론, 의지의 낙관론’을 언급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윤석열의 난은 극우반동 시도였다. 역사에선 반동은 반동을 부른다. 극우반동의 시도는 실패했지만 엄청난 상처를 남겼고 까딱 잘못하면 극좌 반동이 나올 수도 있다. 인식의 비관론이다. 그러나 극우반동의 시도를 시민들의 힘으로 좌초시킨 것처럼 만약 극좌 반동의 시도가 있다 하더라도 현대 한국문명의 공통 토대가 절대 용인하지 않을 것이다. 의지의 낙관론으로 확신한다. 그렇게 풀려가길 바란다.”
그에게 먼저 12·3 사태를 그리 규정하는 이유부터 물었다.
윤석열의 난이라고 칭한 이유는.
“(6공화국의) 현대 한국문명의 공동규범 중 하나인 자유롭고 평등한 보통선거에 의한 평화적 권력교체의 틀을 군대를 동원해 깨뜨리려 한 것이다. 선진국 시민인 한국 시민들을 총체적으로 모욕했고 반만년 한반도 역사 최전성기인 대한민국의 국격을 수직으로 추락시켰다. 또 다른 치명적 문제는 전 지구적 그레이트 게임(Great Game, 지정학적 충돌)과 동아시아 그레이트 게임이 위태롭게 교차하면서 국가의 운명이 한순간에 결정될 수 있는 이런 중차대한 순간에 국가 대전략을 완전한 공백 상태로 만든 것이다. 국가의 실패를 부를 수도 있어서 쿠데타·내란보다 포괄적으로, 그야말로 윤석열의 난이라고 부른 거다.”
문 전 대통령 적폐청산, 적대 정치로 고착
막상 우리 사회에서 공동규범이랄 만한 게 줄어들고 있지 않나. 특히 여의도에선 그렇다.
“맞다. 여의도가 대한민국에서 고립된 섬 같은 형국이다. 당파싸움이다. 더불어민주당이 이재명 대표의 법적 리스크를 피하기 위해 적대적 비토 정치를 일삼아온 배경도 있다. 민주정치가 작동하기 위해선 암묵적인 상호 약속이나 규범, 권한 행사의 자제란 문지방(threshold)이 있는데 민주당은 민주주의의 문지방을 넘나드는 행태를 보여왔다. 그럼에도 고위공직자에 대한 민주당의 탄핵 조치는 헌법과 법률에 의해 보장된 것이다. 윤석열 도당은 민주공화정의 틀을 완전히 파괴하려고 했다. 둘은 구분해야 한다.”
민주당이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까지 탄핵한 것은 우리 헌법이 가정하지 않은 상황이다.
“전례 없는 일이다. 범야가 192석까지 된 가장 큰 책임은 윤 대통령의 오만과 무능, 시대착오적인 불통과 적대정치에 의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지금 국가적인 위기 상황 아닌가. 이 과정을 조율하고 이끌어 간 한 대행 체제까지 탄핵한 건 민주당의 명백한 오버다. 물론 한 대행도 헌재 정상화를 위해 국회 몫 헌법재판관을 임명해야만 했다. 하지만 민주당은 민주적 수권 능력을 국민 앞에서 증명할 책임이 있는 압도적 다수 정당이다. 서로 더 협의했어야 한다. 탄핵 남발은 대한민국을 무정부 상태로 몰고 가는 자충수가 될 수 있다.”
윤 교수는 민주당이 탄핵사유로 거론한 내란죄·김건희 특검법에 대해선 “필요하지만 악법적 성격과 위헌 소지들을 손 봐서 여야 합의로 통과시키는 게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사실 8년 전 촛불시위 때 민주주의 회복을 기대했지만 그렇게 전개되지 않았다. 이번엔 더 안 좋은 상황인 듯하다.
“당시 촛불도 그렇고 이번도 그렇고 K정치, K민주주의를 빛내는 훈장 같은 것이다. 한국 시민사회의 힘과 역동성, 재기발랄함 평화적인 집회 등 이런 건 위대했다. 그럼에도 충분한 건 아니었다. 잘못된 대통령을 몰아내는데 성공했으나 안정적인 민주공화정의 정치 질서를 장기적으로 재생산하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다. 불행하게도 문 대통령이 촛불의 약속 즉 통합된 민주공화정의 꿈을 저는 배신했다고 생각한다. 적폐청산의 미명 아래 적대 정치를 구조화시켰고 정치적 양극화를 극단적으로 악화시켰다. 그래서 나온 게 윤석열 정부인데, 한국 정치사에서 가장 미소한 24만 표 차로 당선됐다. 문 대통령에게 실망한 합리적 진보, 중도 시민, 보수 시민의 최대 정치 연합으로 간신히 당선됐다. 그랬으면 윤 대통령이 갈 길은 자명했다. 최대 정치 연합에 근거한 통합정치를 폈어야 했는데 시종일관 반대로 갔다. 4월 총선에서 유례 없는 참패 이후에도 국민의 지지를 민주적으로 끌어올 생각은 하지 않고 친위 쿠데타를 꿈꿔왔다는 걸 우리는 이번에 알게 된 거다.”
양당 모두 한계, 주권자가 주의 깊게 봐야
두 당의 한계도 분명히 드러났다.
“국민의힘은 말도 못하게 퇴행적 반동에 가까운 모습을 보이고 있다. ‘윤석열의 난’ 팩트 자체를 인정 안하려고 하고 있다. 조기 대선이 이뤄진다면 대선후보를 낼 수 있을까. 지방선거나 총선에서 정당으로 존속할 수 있을까. ‘영남 자민련’ 비슷하게 존속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유의미한 정치 세력으로서는 거의 소멸에 가까운 길이 예정돼 있다고 생각한다. 민주당은 ‘다수의 폭정(tyranny of majority)’이란 개념으로 조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민주주의는 원래 다수 인민의 자기 지배인데 그걸 다수결의 지배로 왜소·왜곡한 것이 민주당이 지난 2년 반 국회에서 해온 일이다. 극단적 모습이 윤석열 정부의 무력화를 위한 고위공직자의 연쇄적 탄핵 시도다. 대한민국 헌정사에서 전무한 것이다. 민주당이 긍정적·전향적으로 극복하지 못하면 민주당에 대한 국민의 의구심이나 유보적 관망 상태가 확산될 수밖에 없다.”
새로운 세력이 등장할 수 있을까.
“지금 국면에서 불투명하고 불확실해보인다. 한국 현대정치사에서 거대 양당 정치의 압도적인 관성과 현실 규정력이라고 하는 것이 있다. 다만 적대적 공존 관계인 두 거대 정당이 한국 시민들을 볼모로 잡는 정치를 해왔다고 생각한다. 지금 권력의 진공 상태에서 정치개혁을 바라는 폭풍같은 집합적 에너지가 지표면 밑에서 축적되고 있는 건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한다.”
개헌 얘기도 나온다.
“87년 체제가 시효를 다했다는 게 다수설처럼 보인다. 나는 좀 달리 생각하는데 (개헌이)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고 본다. 차기 대통령 권력이 눈앞에 있다고 생각하는 정당 지도자가 그걸 받아들이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이재명 대표의 태도를 보면 바로 확인할 수 있다(※최근 “지금은 탄핵에 집중할 때”라고 말했다). 더 중요한 건 국민이 대통령을 내 손으로 뽑겠다는 소망이 잦아들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귤이 강을 건너가면 탱자가 되듯, 아무리 이상적인 권력구조 개편의 틀도 왜곡될 수 있다. 개헌이 가능하더라도 최소주의적으로, 즉 한두 가지 조항만 하는 게 낫다. 여야가 합의할 수 있고 차기 대선의 유력주자도 양보할 수 있는 선에서다. 더 현실적으로 설득력 있는 건 현행 정치 질서 안에서 정치지도자를 훈련하는 정당 정치의 성숙, 정당정치와 연결된 민주공화국 정치 질서의 성숙화, 공고화에 더 주의를 기울이는 게 맞는 행보가 아닌가 생각한다.”
선거제도 개편도 방편일 수 있나.
“맞다. 오랫동안 주장해 왔는데, 소선거구제(한 선거구에서 1명 선출)를 중대선거구제로 개편은 진지하게 논의해보면 어떨까 생각한다. 승자독식 체제에서 소선거구제는 민의가 굴절된다. 민주당이 압도적 의석을 가졌지만 국민의힘과의 차이가 5%포인트 남짓 아닌가. 개헌은 최소주의적 접근을 하고, 선거법 개정하는 데 관심을 집중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갖고 있다.”
민주주의가 성숙하려면 공론의 장도 활발해야 하는데, 이번에 보니 진영 논리를 펴는 지식인들이 많더라.
“비판적 지식인이라고 하면 권력 비판과 지식 생산 두 가지 존재 이유가 있다. 한국의 지식인들이 그런 임무를 제대로 하고 있느냐에 대해서 회의적 답변을 내릴 수밖에 없다. 진영 정치에 동원되거나 자발적으로 부역하는 경우가 너무 많았다. 건강한 시민사회도 크게 위축되었다. 진영적 파당정치에 오염된 경우가 너무 많다. 저는 이걸 한국 시민사회의 식민화라고 부른다. 이게 공론장의 위축 사멸 현상과 궤를 같이 한다. 굉장히 심각하다.”
사실 민주주의는 시간이 걸리는 제도이고 인내와 숙고가 필요한데 이게 부족한 게 아닌가.
“약간 부족한 게 아니라 엄청나게 부족하다. 정치적 영웅에 대한 과잉 기대를 국민이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라고 저는 생각한다. 백마 타고 온 초인이 복잡다단하게 엉클어져 있는 이런 국가적인 과제를 ‘신선하다’는 이미지 하나만으로 해결할 순 없다. ‘정치적 신상품, 정치적 초인이 나를 구원해 줄 것’이란 과잉 기대가 제왕적 대통령제하고 맞물리면서 오늘날의 비극을 초래한 측면이 있다. 대통령이 되겠다는 사람은 밑바닥부터 의원, 장관직까지 장기간에 걸쳐 훈련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공론의 장에 오래 노출돼 도덕성과 정치적 능력을 검증할 수 있는 시간도 국민에게 줘야 한다. 후보자들을 공직에 뽑을 때 주권자인 국민이 주의 깊게 들여다봐야 한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