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가 있는 제철 음식 〈끝〉
“매일 소 500~1000마리 도살” 기록
난로회 때 주로 먹었던 육류는 소고기였다. 당시 소는 식재료인 동시에 농사지을 때 꼭 필요한 노동력이었다. 그래서 나라에서는 소를 잡아먹지 못하도록 우금령까지 시행했지만 소고기의 인기는 식을 줄 몰랐다. 박제가는 『북학의』에서 “우리나라에서는 날마다 소 500마리를 도살하고 있다” 썼고, 『승정원일기』에서는 그 두 배인 “도성의 시전에서 각 고을의 시장, 거리의 가게까지 모두 합해 하루에 죽이는 것이 1000마리로 내려가지 않는다”라는 기록도 보인다.
정조는 난로회를 열어 종종 신하들과 같이 시를 지으며 연회를 즐겼다. 정조의 시문집 『홍재전서』에는 1781년 정조가 신하들과 함께 매화나무 아래에서 난로회를 즐기는 모습과 함께 매(梅)자를 뽑아 칠언절구를 짓게 한 시가 남아 있다. 정조는 수고한 신하들을 치하하는 의미에서도 난로회를 자주 열었다. 『일성록』(1782년 10월 3일)을 보면 정조가 신하들을 대상으로 치르는 정기 시험인 과시에서 시의 제목을 난로회로 했다는 기록도 나온다.
정약용은 “관서 땅 시월이면 눈이 한 자 넘게 쌓이리니 겹겹 휘장 부드러운 담요에 손님을 잡아두고는 삿갓 모양 뜨거운 솥뚜껑에 벌건 노루고기 구워 나뭇가지 꺾어서 냉면에 퍼런 배추절임 먹겠지”라며 초겨울 노루고기 구워먹는 풍경을 시조로 남겼다. 또 문인 김종수는 “화로에 둘러앉아 연한 고기 굽고, 시골 맛으로 채소까지 더하였네. 그저 매일 술이나 마시게 하면 늘 가난하여도 내 후회하지 않으리”라는 시를 남겼으니 18세기 무렵 화로에 솥뚜껑을 올려놓고 고기를 구워 먹는 난로회가 꽤 인기였던 모양이다.
난로회에선 화로에 솥뚜껑이나 번철을 올려놓고 고기를 굽기도 했지만, 고기와 채소를 함께 끓여 먹는 전골 형태 방식도 보인다. 19세기 화가로 알려진 성협의 풍속화첩에 실린 ‘야연’의 풍경이 그렇다. 그림 속 화로 위에는 벙거짓골이 올려 있다. 벙거짓골은 모양이 마치 벙거지를 엎어 놓은 것과 같이 생긴 일종의 전골냄비다. 가장자리에 고기를 구우면 안쪽의 움푹한 부분으로 국물이 흘러들어 채소를 익혀 먹을 수 있다. 이는 ‘전립투’라고도 불렸는데 ‘전립’은 조선시대 무관이 쓰던 벙거지 형태의 모자를 뜻한다.
19세기 후반 저자 미상의 『언문 후생록』에는 구자탕(신선로)과 전골이 나온다. 구자탕은 소고기는 물론 양(위)·천엽·두태(콩팥)·곤자손이(대창)·부아(허파)·창자·비장·우골 등의 소 내장과 해삼, 전복, 송이·표고·참버섯, 도라지, 미나리, 고비, 박오가리, 호두, 은행, 대추 등이 총동원된 호화판 신선로였다. 전골도 마찬가지로 소고기와 온갖 채소, 버섯(석이·참·표고)이 들어있다. 이렇게 고기에 버섯과 다양한 채소를 넣어 함께 끓이면서 먹는 음식문화는 점차 민간으로도 퍼져 나간 것으로 보인다.
요즘 ‘코리안 바비큐’라 불리는 한국식 고기 요리가 K푸드 대표주자로 인기를 이끌고 있다. 뉴욕의 한식당 중 불판을 테이블에 그대로 올려놓고 먹는 곳이 미쉐린 가이드 별을 받기도 했다. 젊은 층에선 고기를 끓인 탕 요리나 소고기 전골도 인기다. 바로 우리 민족이 전통적으로 다양하게 고기를 즐긴 방식이다.
뉴요커 홀리는 한류 고기요리 DNA
미식 전문가와 관련자, 세프들이 모여 왕성하게 활동 중인 모임의 이름도 ‘난로회’인데 일하는 분야는 다 다르지만 우리 전통 음식문화에서 한식의 미래를 찾고 이를 전승하자는 의미로 읽힌다. 또 ‘NARO(나로)’라는 이름의 한식 파인 다이닝도 뉴욕에 문을 열었다.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고기 요리 DNA가 계속 살아 전승되는 느낌이다.
올겨울도 여러모로 힘들고 어렵겠지만 함께 모여 고기라도 구우면서 한껏 이야기를 풀어낸다면 행복할 것이다. 우리 선조들이 그러했듯 시를 노래하고 문학 이야기를 하면 더 행복한 자리가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