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A 국장도 있었다 '비밀주의' 엘리트 그룹, 트럼프와 핫라인 트나 [세계한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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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틸 페이팔·팔란티어 창업자, 마르쿠스 발렌베리 스웨덴 발렌베리 그룹 회장, 에릭 슈밋 전 구글 최고경영자(CEO), 존 소어스 전 영국 해외정보국(MI6) 국장….

유럽·북미의 정·재계 실력자·억만장자·왕족·석학 등 130여 명이 4일간 모여 국제 현안을 논의하는 모임 빌더버그 그룹(Bilderberg Group)의 운영위원 면면이다. 

국제 현안 배후서 조종하다 변신? 

지난 25일(현지시간) 영국 일간 가디언은 막강한 구성원과 철저한 비밀주의로 주요 국제 현안을 배후에서 조종한다는 음모론이 끊이지 않던 모임 빌더버그를 조명했다. 이 모임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의 백악관 귀환을 앞두고 바뀌고 있다면서다.

이 모임은 최근 옌스 스톨텐베르그 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사무총장을 새 공동의장에 임명하고 파리드 자카리아 CNN 진행자를 운영위원으로 선출했다. 수십 년간 기자회견을 열지 않던 빌더버그가 미디어 브리핑에 익숙한 이들을 전면에 내세운 것이다.


이런 변화는 트럼프의 복귀를 앞두고 이뤄졌다. 가디언은 “스톨텐베르그는 대서양 횡단 관계를 강화하는 데 집중할 것”이라며 “트럼프의 귀환과 미국 우선주의 외교 정책으로 쉽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스톨텐베르그는 지난달 파이낸셜타임스에 “대서양 횡단 관계는 강대국 경쟁 시대에 핵심 전략 자산임을 (트럼프) 차기 행정부에 상기시키기 위해 우리는 국방에 더 많은 투자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나토 회원국에 방위비를 국내총생산(GDP) 대비 5%로 증액하라고 요구할 것으로 예상되는 트럼프의 입장과 일맥상통한다.

2019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영국에서 열린 나토 회원국들과의 업무 오찬에서 옌스 스톨텐베르그 당시 나토 사무총장이 연설하는 것을 듣고 있다. AP=연합뉴스

2019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영국에서 열린 나토 회원국들과의 업무 오찬에서 옌스 스톨텐베르그 당시 나토 사무총장이 연설하는 것을 듣고 있다. AP=연합뉴스

 

방위 산업 고위직 포진 

공교롭게도 빌더버그 안엔 나토 회원국의 방위비 지출 증가로 수혜를 입을 이들이 많다. 빌더버그 운영위원 31명 중 상당수가 방위 산업 고위직을 맡고 있어서다. 

에릭 슈밋은 앞서 미국 인공지능국가안보위원회(NSCAI) 의장을 지낸 데 이어 최근 자폭 드론 회사를 시작했다. 마르쿠스 발렌베리도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올해 3분기 동안 주문이 71% 증가한 방산업체 사브(SAAB)의 회장이다.

피터 틸도 로봇 회사인 안두릴을 만들었다. 틸의 측근이자 AI기업 팔란티어의 CEO로 빌더버그 이사를 지낸 알렉스 칼프는 지난 8월 뉴욕타임스에 “미국이 곧 중국, 러시아, 이란과 3면 전쟁을 벌일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피터 틸 페이팔·팔란티어 창업자가 2022년 플로리다주 마이애미 비치에서 열린 비트코인 컨퍼런스의 기조 연설에서 참석자들에게 100달러 지폐 한 쌍을 보여주고 있다. J.D 밴스 미국 부통령 당선인의 멘토이고, 그를 트럼프에게 부통령 후보로 소개했다. AP=연합뉴스

피터 틸 페이팔·팔란티어 창업자가 2022년 플로리다주 마이애미 비치에서 열린 비트코인 컨퍼런스의 기조 연설에서 참석자들에게 100달러 지폐 한 쌍을 보여주고 있다. J.D 밴스 미국 부통령 당선인의 멘토이고, 그를 트럼프에게 부통령 후보로 소개했다. AP=연합뉴스

 

모임과 트럼프의 백악관 사이 핫라인? 

틸은 빌더버그 그룹과 트럼프의 백악관 사이 핫라인이 될 수도 있다. 틸은 J.D 밴스 미국 부통령 당선인의 멘토이고, 그를 트럼프에게 부통령 후보로 소개했다.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와 함께 실리콘밸리 연쇄 창업자의 요람이 된 ‘페이팔 마피아’의 창시자이기도 하다.

최근 지정학적 분위기가 빌더버그가 탄생했던 1954년과 유사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냉전이 시작되던 당시엔 ‘공산제국주의의 출현’을 우려했고 지금은 러시아·중국·북한이 이끄는 ‘신흥 독재자의 축’과 대결할 수 있다는 점에서다.

빌더버그의 변화는 내년 스웨덴 모임에서 두드러질 전망이다. 스톨텐베르그는 나토 사무총장 재임 당시 스웨덴을 나토에 가입시켰다. 스웨덴의 나토 가입 수석 협상가였던 오스카 스텐스트롬은 발렌베리 일가에 고용돼 스웨덴에서 열릴 빌더버그 모임의 조직을 맡았다. 모임은 발렌베리 일가가 소유한 그랜드호텔에서 열릴 예정이다.

가디언은 “빌더버그에 초대받은 모든 금융계 거물은 군사, 방위 투자에 대한 열띤 세일즈를 기대할 수 있다”며 “대서양 횡단 인맥을 쌓고 전쟁을 계속하고 군사 기술 자금을 확보해야 할 때”라고 꼬집었다.

2019년 방한한 마르쿠스 발렌베리 회장 모습. 스웨덴 최대 기업집단인 발렌베리 그룹 일가인 발렌베리 회장은 당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만났다. 중앙포토

2019년 방한한 마르쿠스 발렌베리 회장 모습. 스웨덴 최대 기업집단인 발렌베리 그룹 일가인 발렌베리 회장은 당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만났다. 중앙포토

 

☞빌더버그 그룹(Bilderberg Group)은
냉전이 본격화되던 1954년, 폴란드 출신 정치가 조지프 레팅거와 네덜란드 율리아나 전 여왕의 남편 베른하르트 공작 등이 유럽과 미국의 대화를 촉진하자는 취지로 시작했다.  

이름은 첫 회의가 열린 네덜란드 호텔 이름에서 땄다. 매년 5~6월 미국·캐나다·유럽 호텔이나 오래된 성에서 열리는데, 자유로운 의견 교환을 위해 누가 어떤 발언을 했는지 비밀에 부치는 채텀하우스 룰(영국 왕립 국제문제연구소 채텀하우스가 1927년 도입한 토론규칙)에 따른다.  

지난 수십 년간 대전략가이자 전쟁광으로 불렸던 헨리 키신저가 주도했다. 윌리엄 번스 미 중앙정보국(CIA) 국장도 멤버였다.  

이 모임은 나토 사무총장도 연이어 배출했다. 스톨텐베르그는 노르웨이 총리 시절부터 모임에 왔고 마르크 뤼터 현 나토 사무총장도 네덜란드 총리 시절부터 참석했다. 스톨텐베르그는 내년 2월 세계 최대 규모의 연례 국제안보포럼인 뮌헨안보회의 의장직도 맡을 예정으로, 대서양 횡단 전략 중심에서 빌더버그 그룹의 역할을 더 확고히 할 것으로 예상된다.

네덜란드에 위치한 빌더버그 호텔. 사진 빌더버그 호텔 홈페이지 캡처

네덜란드에 위치한 빌더버그 호텔. 사진 빌더버그 호텔 홈페이지 캡처

 
앞서 이 모임엔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 재러드 쿠슈너 백악관 선임고문, 빌럼 알렉산더르 네덜란드 국왕이 참석한 모습이 포착된 적이 있다. 올해 마드리드 회의엔 미국 국방부 고위 관리 등이 합류했다.  

빌더버그가 각국 정부보다 더 강한 힘을 발휘하는 것 아니냐는 음모론도 꾸준히 제기된다.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한 2002년 빌더버그 모임에서 관련 논의가 있었다는 주장,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2005년 빌더버그 모임에 참석한 몇 달 뒤 총리가 됐다는 설, 마가렛 대처 전 영국 총리의 경력이 이 회의의 결과로 시작됐다는 설이 있다.

빌더버그 그룹 홈페이지. 모임 일정과 주제는 소개하나 사진은 한 장도 첨부하지 않았다. 사진 빌더버그미팅스닷오알지 캡처

빌더버그 그룹 홈페이지. 모임 일정과 주제는 소개하나 사진은 한 장도 첨부하지 않았다. 사진 빌더버그미팅스닷오알지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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