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35년의 압박에서 벗어난 지 이틀째, 김씨는 “밤에는 자리에 들어도 한동안 잠들지 못했다. 내 마음 흥분했을까”라고 썼다. “병중의 아내가 너무 기뻐서 떡과 술 준비를 하느라 밤늦게까지 애쓰는 것이 고맙기도, 불안스럽기도 하다”라고 적었다. 그는 이튿날 이렇게도 썼다. “노래도 하고, 만세도 부르고, 내 일생 중에 가장 기쁜 하루가 아닐까. 이것이 꿈이라도 좋을 것인데. 하물며 생시이랴.”
김씨는 해방의 감격에만 취하지 않았다. 나라의 앞날을 걱정했다. “기뻐 날뛰는 것만이 우리의 능(能)이 아니다. 하루바삐 훌륭한 나라, 세계에 으뜸가는 나라를 만들도록 모든 우리가 힘써야 할 것”(8월 19일)이라고 적었다. 또 그런 나라를 만들려면 교육이 급선무이고, 아이들은 물론 청장년층 모두의 재교육이 시급하다고 여겼다.
『역사 앞에서』의 전편에 해당하는 ‘해방일기’가 새로 발견됐다. 김 교수가 1945년 8월 16일부터 11월 29일까지 해방 직후 한국의 일상을 촘촘하게 기록했다. 지금껏 잃어버린 것으로 알려졌으나 김 교수의 아들이자 역시 역사학자인 김기협(75)씨가 어머니 이남덕 전 이화여대 국문과 교수(1920~2012)의 유품에서 최근 찾아냈다. 아들 김씨는 32년 전 『역사 앞에서』 또한 어머니가 보관해 오던 원고를 찾아 단행본으로 엮었다.
“지난해 10월 말 오랜만에 찾은 목포의 둘째형님댁에서다. 형님께서 ‘이건 네 일거리 같다’며 두툼한 공책을 건네주었다. 200자 원고지로 600매가량 된다.”
-감회가 남다르겠다.
“『역사 앞에서』의 대부분은 6·25 이후의 기록이다. 이로써 1945년 8월~1946년 4월의 ‘해방일기’와 1950년 6월~1951년 4월의 ‘전쟁일기’ 두 파트가 완성된 셈이다.”
-선친의 두 번째 유고인데….
“흔히 불초(不肖)라는 말을 수사적으로 쓰는데, 내게는 절실한 표현이다. 역사학자를 직업으로 내걸고 살아왔지만 그분과 같은 의미의 ‘역사학자’는 되지 못했다, 그분의 흔적을 정리하는 것이 그나마 보람을 느끼는 일이다.”
예컨대 “아는 것이 힘. 배워야 산다, (…) 실력 함양에 힘쓰고 함부로 경거망동 말자.”(8월 23일), “이 어려운 과도기에 우리 겨레끼리 상잔상해(相殘相害)하는 일은 없어야 할 텐데”(9월 7일),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모르고 공연히 날치는 축들”(9월 16일), “이조 5백년의 모든 죄과를 세종대왕의 한글 하나로 능히 보상하고 남음이 있다”(10월 10일), “조선은 정치적·종교적으로 남에게 예속될지라도 우리 마음가짐에 따라선 문화적으로 언제든지 완전한 독립국일 수 있다” 등이다.
김기협씨는 “선친께서는 아직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사실을 매우 의아해하실 것”이라며 “지금의 소란한 정국을 보면서도 ‘불의 타도’ 같은 과제에 몰두하기보다 그런 불의가 형성된 원인에 주목하셨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원고 전문은 오는 4일부터 매주 토요일 ‘김성칠의 해방일기’ 제목으로 중앙일보 온라인에 공개된다. 아들 김씨가 간단한 설명을 붙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