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대학살의 신'(연출 김태훈)은 두 부부가 자녀의 폭력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모이면서 시작된다. 피해자 부모 미셸과 베로니끄는 가해자 부모 알랭과 아네트를 집으로 초대해 대화를 나눈다. 아들의 앞니가 부러졌는데도 "대화로 해결해 나갈 수 있어 기쁘다"며 인사치레를 하는 베로니끄는 얼마 지나지 않아 본성을 드러낸다. 아네트가 거실 한복판에서 먹고 있던 파이를 게워내는 바람에 비싼 테이블에 토사물이 튀면서다.
두 중산층 부부의 고상한 대화는 유치한 설전으로 변질하고 급기야 삿대질, 물건 던지기, 욕지거리, 눈물이 뒤섞인 거친 육탄전으로 이어진다. 가해 아동 부부와 피해 아동 부부의 대립이 엉뚱하게도 남자와 여자의 대립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관전 포인트는 네 명의 배우들이 쏟아내는 '티키타카'의 궁합. 인터미션 없이 90분 동안 진행되는 극은 이렇게 할 무대 장치는커녕 조명이나 음향 효과도 거의 쓰지 않았다. 네 명의 배우들은 아파트 거실에서 단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은 채, 쉼 없이 대사를 쏟아내면서 연기로 관객들을 사로잡는다.
지적 허영심으로 가득한 작가 베로니끄는 알랭의 말을 하나하나 꼬투리 잡으며 일을 키운다. 잘난 척이 심한 알랭은 제약 회사의 스캔들을 덮는 일을 하는 '하수인' 변호사다. 미셸은 평화주의자인 척 하지만 딸이 키우던 햄스터를 길에 내다 버리는 인물이다. 조신해 보이는 아네트에게는 분노조절 장애가 있다. 모두가 속으로 상대를 무시하는 와중에 가식적인 대화가 계속된다.
지난달 10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프레스콜에서 김태훈 연출은 제목' 대학살의 신'의 의미를 설명했다.
"네 명의 인물은 각자의 탐욕과 이기심을 갖고 있습니다. 때로는 다른 이들을 무시하기도 합니다. 다른 이들을 짓밟거나 남의 것을 뺏는 것을 큰 의미에서 학살이라고 보면 우리 주변에서도 학살은 계속되고 있는 것 아닐까요."
중산층의 위선을 꼬집는 블랙 코미디로 세계적인 극작가 반열에 오른 프랑스 작가 야스미나 레자의 작품이다. 한국에서는 미술 작품을 둘러싼 세 친구의 설전을 다룬 연극 '아트'로 널리 알려진 작가다.
2008년 희곡으로 발표한 '대학살의 신'은 2008년 영국 웨스트엔드 초연 후 2009년 브로드웨이 무대에 올라 그해 토니상 작품상, 여우주연상, 연출상을 받았다. 2011년에는 '피아니스트'의 로만 폴란스키 감독이 '카니지' (대학살)이라는 제목의 영화로 제작했다.
국내에선 2010년 초연해 대한민국연극대상, 동아연극상을 받았다. 다섯 번째 시즌인 이번 공연은 배우 김상경과 이희준이 미셸을, 신동미와 정연이 베로니끄를 연기한다. 알랭 역에는 민영기와 조영규, 아네트 역에는 임강희가 캐스팅됐다. 연극은 1월 5일까지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에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