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기 동안 포르투갈은 인도총독부(Estado da India, 1505년 설치되고 1516년 고아에 자리 잡음)를 중심으로 인도양의 제해권을 유지했다. 그러나 17세기를 통해 네덜란드동인도회사(VOC, Vereenigde Oostindische Compagnie)에게 제해권을 빼앗기고 만다.
VOC와 같은 시기에 설립된 영국동인도회사(EIC, East India Company)가 VOC의 최대 경쟁자였으나 격차가 컸다. 17-18세기를 통해 VOC는 250만 톤 이상의 화물을(노예 포함) 유럽으로 운반했는데, EIC의 실적은 그 5분의 1 수준이었다. VOC 설립 당시에 독립전쟁을 치르고 있던 네덜란드가 단기간에 최강의 해양국가로 떠오른 것은 놀라운 일이다.
질서 유지보다 이익 추구를 앞세운 정복자들
법인의 출현은 고대로마가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넘어오던 시점의 일이었다. 국가의 성격이 바뀌는 과정에서 국가의 책임이 명확하지 않은 영역의 업무를 법인에게 맡긴 것이다. 중세에도 법인 성격의 조직들이 있었다. 그러나 법인의 역할이 세상을 휩쓸게 된 것은 근대세계에서였고, 두 동인도회사가 그 출발점이었다.
국가의 첫 번째 목적은 질서 유지에 있고 회사의 목적은 이익의 추구에 있다. 하나의 국가기관이던 포르투갈의 총독부(Estado da India)에게는 이익 추구 외의 임무들이 있었고, 총독부 근무자들에게는 사적 이익과 공적 임무가 충돌할 수 있었다. 두 동인도회사는 회사 이익을 앞세우는 원리를 분명히 함으로써 효율성을 늘리고 경쟁력을 키울 수 있었다.
두 회사가 뛰어난 실적을 보이자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등지의 해외 경영을 위한 회사들이 연달아 세워졌다. 그러나 장기간에 걸쳐 가장 큰 성공을 거둔 것은 인도양 지역의 두 회사였다. 그 성공의 원인은 무엇보다 본국에서 멀다는 데 있었다. 왕복에 1년 이상 시간이 걸리는 곳에서 본국 상황에 영향을 덜 받고 경영의 독립된 주체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영국보다 선진국이고 강대국이던 17세기 네덜란드
윌리엄 번스틴의 〈교역의 세계사: 멋진 주고받기〉(2009)를 인용해 VOC의 EIC에 대한 우위를 설명한 일이 있다. 출자금 규모도 압도적이었고 선진적 경영 원리도 먼저 도입한 데 이유가 있었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66460)
스페인 치하의 네덜란드-벨기에 지역은 스페인의 재력을 발판으로 상공업이 고도로 발달해 있었다. 벨기에 지역이 스페인 통치하에 남으면서 그 발전 역량이 네덜란드 쪽으로 쏠렸다. 네덜란드는 독립전쟁 진행 중에 이미 스페인에 맞서는 해상강국이 되어 있었고, 영국의 위상은 아직 조그만 주변세력에 머물러 있었다.
EIC가 VOC보다 먼저 설립된 것은 조그만 우연이었다. 공화국이던 네덜란드에서는 여러 함대가 경쟁적으로 활동하고 있었던 반면 영국의 해상세력은 왕권과 경쟁할 만한 규모에 이르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왕권을 발판으로 한 동인도회사가 먼저 설립될 수 있었던 것이다.
1688년의 명예혁명(Glorious Revolution)도 네덜란드의 꼬마 동생 같던 영국의 위상을 보여준 하나의 사례였다. 17세기 내내 청교도혁명 등 정치적 불안에 시달리던 영국이 제임스 2세 왕을 쫓아내면서 그 사위였던 네덜란드 통치자 오란예공 윌리엄 부부를 공동군주로 영입한 것이다. 이 정변을 통해 영국의 입헌군주제가 확실한 틀을 잡았다고 평가되는데, 교역 활동의 조율을 통해 EIC가 획기적 발전의 길로 나서는 계기도 되었다.
상업자본주의? 농업자본주의? 자본주의의 기원
우드의 책은 1999년 〈자본주의의 기원〉이란 제목으로 나온 것을 2002년 확장한 것이다. 저자는 “길게 본”이란 말을 제목에 붙인 것이 책 길이가 120쪽에서 2백여 쪽으로 늘어난 때문만이 아니라고 농담했다. 19세기에 나타난 산업자본주의보다 그 앞 단계의 ‘농업자본주의’에 주목한다는 것이다.
우드는 영국 자본주의의 초기 발전을 인클로저 현상에 따른 농민의 위상 변화로 설명한다. 이윤 추구 노력을 자본주의의 동력으로 흔히 제시하는데, 단순한 이윤 추구는 자본주의와 관계없이 모든 경제활동에 나타나는 것이다. 이윤 추구가 사회 전체에 압도적 강박으로 작용할 때 비로소 자본주의가 성립한다고 그는 본다.
어느 농업사회에서나 경작자와 농지 사이에는 떼어내기 힘든 관계가 있다. 경작자의 신분이 농노든 소작인이든 농지에 대한 경작자의 점유 상태가 널리 위협받을 때는 사회의 혼란을 누구도 감당하기 힘들다. 인클로저 현상으로 경작자와 농지가 분리되고 지주만이 아니라 농민도 이윤 추구의 외길로 몰리면서 시장의 지배력이 강화되어 ‘농업자본주의’가 성립하고, 그것이 19세기 산업자본주의의 발판이 된 것으로 우드는 설명한다.
농업의 시장화는 17세기에 프랑스 등 가톨릭 지역보다 영국과 네덜란드에서 빨리 진행된 현상이었다. 산업자본주의의 앞 단계로 17-18세기의 상업자본주의(mercantile capitalism)를 흔히 떠올려 왔는데, 우드가 제시하는 농업자본주의(agrarian capitalism)에는 변화의 굴곡을 더 잘 설명해 주는 측면이 있고 이 측면이 두 동인도회사의 경쟁 과정에도 나타났다.
근대국가 발전으로 필요가 사라진 ‘국가대행업자’
네덜란드와 영국의 동인도회사가 결과적으로는 인도네시아와 인도의 거대한 ‘식민제국’을 만들어냈으나 그 과정은 직선적인 것이 아니었다. 아시아 일대에는 무굴제국, 오토만제국, 중국(명-청)처럼 17-18세기 유럽 국가들보다 강대한 세력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VOC와 EIC는 낮은 자세로 이 세력들을 상대하며 기반을 넓혀 나갔다.
아사아의 큰 제국들은 기본적으로 대륙세력이었다. 중국의 경우 내륙에서 위협이 생기면 ‘심복지환’으로 여기고 전력을 기울여 대응했으나 바다에서 벌어지는 일은 ‘피부병’ 정도로 경시했다. 해양활동을 비교적 중시하던 오토만제국도 16세기 포르투갈인의 무모한 도발에는 발끈했지만 17세기 VOC와 EIC의 조심스러운 움직임에는 예민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VOC와 EIC는 초기에 ‘정복’보다는 ‘적응’을 통해 입지를 확보해 나갔다. VOC가 EIC에 비해 공격적 태도를 많이 보인 것은 동남아 지역에 저항하는 강대한 세력이 없기 때문이었고, EIC는 오랫동안 무굴제국의 신하 노릇을 했다. 두 회사가 방대한 제국의 규모로 성장한 것은 거대한 계획의 결과가 아니라 현지 상황의 변화에 떠밀린 결과로 볼 수 있다.
VOC는 1799년, EIC는 1874년에 해체되고 그 자산과 조직은 국가에 귀속되었다. 두 회사의 소멸 이유는 여러 가지로 논의되지만, 크게 보면 ‘회사국가’의 효용이 사라진 시대 변화 때문이었다. 근대국가의 발전으로 대리인이 필요없게 된 것이다. 동남아와 인도의 역사에서 두 회사가 맡은 역할을 이해하는 데 ‘회사국가’의 성격에 중요한 열쇠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