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롱맨(strong man)’의 시대가 돌아왔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이달 20일 취임하면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함께 ‘G0’의 세계를 이끄는 강권 리더십 3각축이 다시 형성된다. 8년 전과 판박이다.
새해 글로벌 리더십이 크게 바뀌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인이 취임하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함께 '뉴 스트롱맨 시대'를 열게 된다. 사진은 러시아 전통 마트료시카 나무 인형에 그려진 세 장상의 모습. EPA=연합뉴스
이들뿐 아니다.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규모 파병을 감행하며 국제 질서를 뒤흔드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무게감도 달라졌다.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 오르반 빅토르 헝가리 총리,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 등 ‘리틀 스트롱맨’으로 불리는 철권 통치자들도 지구촌 곳곳에서 영향력을 키우고 있다. 대부분 장기 집권을 거치며 더 노련해지고 견고해졌단 평가가 뒤따른다.
폭풍 전야, 선장을 잃은 대한민국호는 어떻게 이 파고를 넘을 것인가. 악재는 겹쳤다. 권위주의가 득세하는 사이, 민주주의를 이끌던 서방의 리더십이 전반적으로 불안정해졌기 때문이다.
당장 주요 7개국(G7)에서 경고음이 울린다. 유럽연합(EU)을 이끄는 ‘쌍두마차’ 프랑스와 독일은 나란히 정부 불신임 사태에 직면해 있고, 영국과 캐나다 정권 역시 언제 교체되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인기가 없다. 일본에서도 이시바 시게루(石破茂) 총리의 단명설이 꾸준히 나온다. 조 바이든 미 행정부 시절 단일대오로 뭉쳤던 ‘가치’에 기반한 민주 진영이 이젠 기댈 곳이 마땅치 않다는 뜻이다.
‘뉴 스트롱맨 시대’는 누가 주도할까. 우선 트럼프 1기 때와는 국제 정세가 많이 다르다. 유럽과 중동에서 ‘두 개의 전쟁’이 계속 진행 중이고, 핵을 쥔 북한이 사상 처음 국제전에 뛰어들었다. 얽히고설킨 스트롱맨 사이의 역학 관계가 더 복잡해진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트럼프는 1기 때처럼 ‘관세 폭탄’과 ‘방위비 분담금 인상’이란 칼을 양손에 쥐고 민주·권위 양 진영을 동시에 공략하고 있다. 특히 전략 경쟁 중인 ‘중국 때리기’에 진심이다.
그런데 시진핑이 내심 이같은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를 기회로 여기고 있단 진단도 나온다. 강준영 한국외대 국제지역연구센터장은 “중국은 최근 들어 트럼프의 재등장에 불안한 미국의 동맹·우방에 비자 면제나 금수 조치 해제 등 유화적인 제스처를 취하고 있다”며 “트럼프의 대중국 압박을 벗어나기 위해 미국과 이들 국가 사이의 틈을 노리는 전략”이라고 말했다.
트럼프와 푸틴의 ‘브로맨스’도 우크라이나 전쟁 종전이란 공동의 목표가 사라지면 금세 식을 수 있다. 트럼프가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기 위한 동력으로 내세우는 셰일오일·가스 수출을 늘리는 과정에서 러시아와 에너지 패권 다툼이 치열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안세현 서울시립대 에너지안보전략센터장은 “트럼프는 1기 때 미국산 LNG(액화천연가스)를 유럽에 수출하기 위해 러시아의 유럽 수출 가스관(노르트스트림2) 가동을 강력히 견제했었다”며 “우크라이나 전쟁이 끝나면 다시 러시아가 가스 가격을 낮춰 세계 시장을 공략할 텐데, 트럼프는 이를 좌시하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2017년 7월 7일 당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독일 함부르크에서 열린 G20 정상회의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만나 대화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중국 역시 이런 구도를 활용할 가능성이 있다. 세계 최대 에너지 소비국인 중국은 이미 러시아산 파이프라인가스(PNG)를 상당량 도입하고 있는데, 수입량을 대폭 늘려 미국을 견제할 수 있단 것이다. 실제로 지난해 1~9월 러시아가 중국에 수출한 PNG는 전년 동기 대비 약 40% 증가한 237억㎥로, 같은 기간 유럽 수출량(225억㎥)을 넘어섰다. 현재 중·러는 추가 가스관 신설을 놓고 협상 중이기도 하다.
북한 변수를 바라보는 미·중·러의 셈법도 복잡다단하다. 일각에선 한국의 국정 공백 장기화가 북한의 도발 빌미가 될 수 있다고 우려한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북한이 당장 한반도에서 군사 도발할 가능성은 작게 보는 편이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오른쪽)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2023년 9월 13일 러시아 극동 아무르주 보스토치니 우주기지에서 정상회담 전 악수를 나누고 있다. AP=연합뉴스
특히 러시아가 이를 가장 경계한다는 풀이도 있다. 북한과 조약을 통해 사실상 ‘자동 군사 개입’ 근거를 두고 있어, 우크라이나 전쟁이 끝나지도 않은 상황에서 북한이 벌인 도박판에 말려들 수 있단 판단에서다.
중국 역시 북한의 도발이 달갑지 않다. 트럼프 행정부의 대중국 압력과 역내 군사적 관여도를 키울 수 있는 사안이기 때문이다. 또 시진핑 입장에선 독립 성향이 어느 때보다 강해진 대만 문제가 더 시급한 형편이다.
스트롱맨의 ‘톱다운(top-down·하향식)’ 리더십이 강조되면서, ‘톱’이 부재한 한국의 불안감은 더 커지고 있다. ‘대행의 대행’ 시기가 길어질수록 강대국들의 ‘한국 패싱’이 더 심해질 것이란 이유에서다. 김현욱 세종연구소장은 “정권 공백기여도 정부는 정치적 리스크나 변동성에 휘둘리지 말고 각 부문이 하던 모멘텀을 잃지 않고 가는 데 집중해야 한다”며 “정권이 바뀔 때까지 그간 추진하던 외교 정책을 꾸준히 밀고 나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더 큰 문제는 다음이다. 정상외교 무대에서의 공백을 빠른 시일 내 메우기 위해선 어떤 차기 리더십이 들어설지도 중요하다. 이재승 고려대 일민국제관계연구원장은 “새 리더십도 도덕적·실효적 측면에서 진전된 모습을 보이지 않으면 글로벌 리더십 그룹에서 점점 멀어질 것”이라며 “한국의 민주주의가 시험대에 오른 상황에서 스트롱맨 같은 리더십으론 곤란하다. 민주주의의 성숙도를 보여줘야 한국에 대한 신뢰를 회복할 수 있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김상진ㆍ박현준ㆍ이승호 기자 kine3@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