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버린 AI 경쟁시대 '살아남을 기술' 만들어야 산다 [트랜D]

챗GPT와 구글의 제미나이, 미드저니 등 미국 기업을 중심으로 생성형 AI 시장이 형성되는 가운데, 국가 혹은 자국 기업이 인공지능 기술 주도권을 갖는 ‘소버린 AI(Sovereign AI)’ 전략이 주목받고 있습니다. 소버린 AI는 자국의 기술력과 기준으로 AI 모델을 개발하고, 국내 중심으로 연산 자원과 클라우드 인프라를 확보해 자국민의 데이터를 자국 내에서 보호하겠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이 개념은 최근 AI 패권 경쟁과 맞물리며 더욱 강조되고 있으며, AI가 행정·의료·교육·금융 등 사회 전반에 걸쳐 영향을 미치자, 데이터 주권과 기술 주권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며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습니다.

소버린AI. 챗GPT

소버린AI. 챗GPT

전 세계가 나선 ‘소버린 AI’ 경쟁…한국에도 가능성이 있나

한국을 포함한 여러 국가도 소버린 AI 전략을 앞다투어 내세우고 있습니다. 프랑스는 초거대 AI 모델인 ‘미스트랄(Mistral)’을 자체 개발해 디지털 주권 확보에 나서고 있습니다. 중국은 바이두, 알리바바, 텐센트 등 자국 기업을 중심으로 ‘딥시크’와 같은 AI 모델을 통해 폐쇄적이지만 강력한 AI 생태계를 만들고 있습니다. 아랍에미리트(UAE) 역시 ‘팔콘(Falcon)’이라는 자체 모델로 중동 지역 내 AI 독립성을 확보하고 있으며, 이 모델을 오픈소스로 공개해 글로벌 협력까지 유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한국은 비교적 뒤늦게 본격적인 소버린 AI 전략을 수립했지만, 잠재력은 충분합니다. 현재 네이버는 ‘하이퍼클로바X’라는 대형 언어모델을 지속해서 고도화하며, LG는 ‘엑사원(EXAONE)’을 통해 기업용 초거대 AI 생태계를 조성하고 있습니다. 이 외에도 카카오, KT 등 대기업 주도 AI 모델이 각각 금융, 통신, 엔터테인먼트 분야에서 응용되고 있습니다. 정부 역시 2024년 이후 AI 반도체 개발, 초거대 컴퓨팅 인프라 확충, AI팩토리 클러스터 조성 등 다양한 정책으로 기반을 마련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이 실질적인 성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단순 기술 개발을 넘어서, AI 생태계 전반의 협업 구조와 자원 배분이 필요합니다.

초거대 AI 하이퍼클로바X. 네이버

초거대 AI 하이퍼클로바X. 네이버

대기업이 인프라 갖추고, 스타트업이 해결형 대안 만들어야
정부는 소버린 AI를 실현하기 위한 여러 이행 방안을 단계적으로 추진 중입니다. 우선 데이터 주권 확보를 위한 ‘AI 데이터 댐’ 사업을 기반으로, 민간 기업과 연구 기관이 공동으로 활용할 수 있는 공공 데이터셋을 정제해 제공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고성능 GPU 연산 인프라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초거대 AI 전용 슈퍼컴퓨터 및 AI 클러스터 조성 사업도 진행 중입니다. 특히 정부는 공공 분야에서의 AI 윤리 가이드라인을 강화하면서 공공 AI가 투명하고 책임감 있게 사용되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고 있습니다. 이는 기술의 효율성뿐 아니라 사회적 신뢰를 함께 확보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보면 이미 해외와 큰 격차가 벌어진 상태입니다. 초거대 모델을 학습하려면 고가의 고성능 GPU를 수천, 수만 개 단위로 확보하고, 이를 수용할 수 있는 인프라가 뒷받침돼야 합니다. 과거보다는 비용 절감이 이루어지고 있다고는 하나, 여전히 본격적인 경쟁을 위해서는 천문학적인 수준의 초기 투자가 요구됩니다. 생성형 AI의 등장 이후 AI의 경쟁력은 자본과 설비투자 중심으로 발전하고 있으며, 이는 AI가 단순한 소프트웨어가 아닌 물리적 인프라 기반의 산업이라는 점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인프라 기반 AI 시대. 엔비디아

인프라 기반 AI 시대. 엔비디아

더욱이 모델 규모만 키운다고 곧바로 성과로 이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우선 양질의 데이터셋이 충분히 구축돼 있어야 합니다. 자체 모델을 구축하더라도 해외에 확장 가능한 수요 기반이 부재하다면, 해외 AI와 경쟁할 수 있는 모델이 아닌 한국만의 갈라파고스형 모델이 될 수 있다는 회의적인 시선도 존재합니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생태계 전반에서 실질적인 분업과 협력이 필요합니다. 네이버, 카카오, LG 등 대기업이 파운데이션 모델을 개발하고 AI 인프라를 구축하는 역할을 한다면, 그 위에서 다양한 문제 해결형 AI 서비스를 만들어내는 것은 스타트업과 벤처기업들의 영역입니다. 교육, 의료, 법률, 금융 등 각 산업의 버티컬 영역에서 요구되는 특화된 모델을 빠르게 기획하고, 실증과 상용화로 연결하는 데에는 스타트업의 민첩성과 현장 경험이 가장 유효합니다. 정부는 스타트업들이 이 경쟁에 참여할 수 있도록 GPU 자원, 데이터셋, 정책적 지원 등을 아낌없이 제공해야 하며, 단순한 창업 지원을 넘어서 ‘AI로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시장’을 키우는 전략을 가져야 합니다.

범용 모델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산업별, 서비스별로 필요한 영역을 먼저 정의하고 그 안에서 확실한 성과를 만들어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미 해외에서도 법률 AI, 헬스케어 AI, 공공 행정 AI 등 다양한 버티컬 특화 AI가 실용성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AI 모델을 만들었으니 알아서 쓰라는 접근보다는, 해당 서비스가 해외 AI나 기존 솔루션을 대체할 수 있을 정도의 품질과 실증 사례를 만드는 방향성이 필요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오픈소스 기반으로 민간의 과감한 실험과 실패가 허용되고, 적재적소에 인프라와 투자를 집행하는 정부의 전략이 필요합니다.

내수용 AI는 안된다…글로벌 시장 고려한 개발 필요

국가 핵심 전략으로의 AI. Unsplash

국가 핵심 전략으로의 AI. Unsplash

소버린 AI는 국가 미래 IT 전략이지만 우려와 한계도 분명 존재합니다. 첫째, 기술 격차입니다. 이미 수백조 원을 투자해 기술을 축적한 미국과 중국보다 한국은 아직 인프라나 인재 면에서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둘째, 관 중심의 전략이 민간의 혁신을 저해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실제로 기술력은 민간에서 더 빠르게 진화하고 있으며, 정부가 이를 지나치게 통제할 경우 오히려 역효과를 낳을 수 있습니다. 셋째, 국가 주도로 만든 AI를 내수용으로만 사용하고 해외 사용자들도 쓸 수 있는 생태계가 갖춰지지 않으면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지금 이 시점에서 소버린 AI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적인 국가 전략입니다. 데이터가 국가 안보이자 경제 경쟁력의 핵심 자산이 된 시대에, AI 기술을 외부에 전적으로 의존해 기술 주도권을 갖지 못하면 장기적으로 디지털 식민지로 전락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회 전반에서 AI의 역할이 확대되는 만큼 특정 국가나 글로벌 빅테크의 기술에 종속되지 않고 자체 기술과 인프라를 확보하는 일은 디지털 주권을 지키기 위한 핵심 전략입니다.

소버린 AI는 단순히 ‘우리 기술’을 만들자는 것이 아니라, ‘사용할 이유가 있는 AI’를 만들자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어떤 AI 모델이든 실제로 경제적 가치를 창출하는 기술이어야 하며, 이를 통해 지속적인 민간 투자와 생태계 순환이 가능해져야 합니다. 국가 주도의 AI가 단순히 공공 목적에만 사용되는 수준에 머무른다면, 이는 기술의 실용성을 입증하지 못한 채 한계에 봉착할 수 있습니다. 결국 글로벌 시장에서도 활용될 수 있는 경쟁력 있는 품질과 확장성을 갖추는 것이 관건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개발에 거액을 투입하고도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기술만 남게 되며, ‘한국형 OO 기술’이라는 이름으로 반복되어 온 성과 없는 예산 낭비의 전철을 다시 밟을 위험이 있습니다. 거대한 비전을 앞세우기보다 일상에서 실질적으로 쓰이고, 국내·외 사용자 모두에게 ‘이걸 왜 써야 하는지’가 명확한 작은 성공 사례부터 축적해나가는 것이 소버린 AI의 첫걸음이 되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