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개골 2개 나온 핑크집 화덕…'살인 괴물'은 전교 5등이었다

1994년 9월 19일 새벽, 유도·레슬링 선수였거나 특전사 출신으로 꾸려진 서울 서초경찰서 강력반 형사들은 국내 최초 살인범죄 조직 ‘지존파’의 아지트 인근에서 부두목 강동은을 먼저 체포합니다. 민트색 담벼락에 꽃분홍색으로 외벽을 칠한 이들의 아지트는 어린이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외관이었습니다. 하지만 내부는 공포 그 자체. 비밀 계단을 통해 지하로 들어서는 순간 무도 특기를 자랑하던 형사들마저 주저할 정도로 기괴한 모습이 펼쳐졌습니다. 두목 김기환은 중학생 때 전교 5등이었는데, 살인 조직을 결성한 괴물이 됐습니다. 사형이 선고된 법정 최후 진술에서 그는 세상이 미워진 이유를 스스로 말합니다. 검거 작전이 펼쳐지던 그날로 돌아가봅니다. 


그랜저 탄 부부 팔다리 잘랐다…“부자 증오” 지존파 살인공장 〈1편〉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89348
검거된 지존파 일당과 범행에 쓰인 도구들. 중앙포토.

검거된 지존파 일당과 범행에 쓰인 도구들. 중앙포토.

그 집 차가 시방 사고 나분 것 같은디 언능 와보랑께.
전남 영광으로 간 뒤 가장 먼저 체포한 지존파 부두목 강동은을 데리고 경찰지서에 도착한 고병천 반장이 기지를 발휘했다. 현지 순경을 시켜 강동은이 몰던 차가 교통사고에 연루된 것처럼 지존파 아지트에 전화를 걸게 했다. 1994년 9월 19일 새벽, 혼자 장을 보러 나온 강동은을 검거했으니, 이제 다른 조직원들을 밖으로 유인할 차례였다.  

하지만 아지트 주변에서 잠복하던 한기수 형사는 당시 지서에서 벌어지는 작전 상황을 알 수 없었다. 강동은이 검거되는 것을 보고 곧장 아지트로 돌아왔는데, 무전기가 먹통이라 서로 연락할 길이 없었다. 쌍안경을 보고 있는데, 대문이 열렸다. 교통사고 연락을 받고 나오는지를 현장에선 몰랐다.

한 놈 나왔어!
어? 옆에 여자도 있는데.
인질인가?
한 형사는 조심스레 얼마 전 새로 뽑은 프라이드 승용차의 시동을 걸었다. 아지트에서 나온 남녀 2명은 르망 차량에 오르더니 흙먼지를 내뿜으며 튀어나갔다. 한 형사가 바짝 따라붙었다. 시골길에 낯선 차량이 따라온 걸 의심했는지 르망은 갑자기 속력을 높였다.

밟아! 빨리 밟아!
한 형사가 속도를 올렸다. 계기판 눈금은 순식간에 시속 130㎞. 그러나 긴 오르막길이 나타나자 르망이 시야에서 멀어져 갔다. 한 형사의 차가 따라붙지 못하는 사이 사라진 것이다. ‘놓쳤다’는 생각에 탄식이 나오려던 찰나, 내리막길에 고꾸라져 있는 르망을 발견했다. 한 형사는 곧장 수갑을 들고 운전석으로 뛰어갔다. 차 안에는 행동대장 김현양과 부두목 강동은의 여자친구 이경숙이 쓰러져 있었다.

훗날 김현양은 경찰을 눈치채고 내리막길에 있는 주유소를 들이받아 자폭할 생각이었다고 진술했다. 평소에도 이들은 경찰이 아지트를 급습할 것에 대비해 다이너마이트를 설치해 놓곤 했다.


이제 남은 일당은 4명. 그중에 두목 ‘지존’이 있었다. 한 형사와 동료들은 영광경찰서 병력을 지원받아 아지트로 향했다. 민트색 담벼락에 분홍빛으로 물든 외벽은 묘한 살기를 내뿜고 있었다. 이계훈 형사가 수신호를 보내곤 현관문을 열어젖혔다. 눈앞에 칼을 든 두 명이 나타났다. 깜짝 놀란 이 형사가 권총을 겨눴다.
행동대장 문상록과 조직원 강문섭이 단검을 든 채 얼굴을 드러냈다. 이 형사가 빈 곳으로 공포탄을 쐈다. 총소리에 깜짝 놀란 두 사람은 불안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더니 단검을 떨어뜨렸다. 이들에게 수갑을 채운 뒤 아지트를 수색했다. 혼란한 틈을 타 백병옥이 담을 넘어 도주한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몇십 분 뒤 주변 인가 담벼락 밑에 숨어 있던 그도 동네 이장의 신고로 붙잡혔다.

아지트 도착 7시간 만에 지존파 일당 6명을 검거했다. 하지만 이들이 두목으로 부르는 김기환이 보이지 않았다. 사건을 제보한 피해자 이영순도 그의 얼굴은 본 적 없다고 했다. 김기환이 있는 곳은 뜻밖의 장소였는데….

두목 김기환의 옥중 지시

전남 영광군 불갑면의 지존파 아지트. 겉 보기엔 평범한 가정집과 같다. 중앙포토

전남 영광군 불갑면의 지존파 아지트. 겉 보기엔 평범한 가정집과 같다. 중앙포토

김기환은 이미 교도소에 수감 중이었다. 몇 달 전 지인의 여중생 딸을 성폭행해 구속됐다. 이후 감방에서 부두목 강동은을 통해 범죄를 지시했다. 두목의 명령으로 산속에서 칼 한 자루를 들고 일주일 버티는 지옥훈련도 했다. 이영순을 납치한 것도 김기환의 지시였다.

그러나 행동대장 김현양이 ‘여자는 절대 믿지 말라’던 두목의 명령을 어기고 이영순을 감쌌다. 대신 이영순이 살인 행위에 가담토록 했다. 달아나려던 조직원에게 비닐봉지를 씌워 질식시킬 때 억지로 손을 갖다 대게 했다. 다른 범죄 행각을 벌일 때도 동참하게 했다.

이영순 납치 며칠 뒤 지존파는 경기도 성남시에서 30~40대 부부를 납치했다.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소씨와 그의 아내가 성묘를 마치고 오는 길이었다. 이들은 당시 고급 차로 불리던 그랜저를 타고 있었다. 지존파는 몸값으로 1억원을 요구했고 돈을 받으면 풀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랜저 타는 중년 부부 납치

실제 피해자의 그랜저 차량을 놓고 현장 검증 중인 지존파 일당과 고병천 당시 강력반장(동그라미). 사진 고병천 제공

실제 피해자의 그랜저 차량을 놓고 현장 검증 중인 지존파 일당과 고병천 당시 강력반장(동그라미). 사진 고병천 제공

소씨는 직원에게 전화해 현금 다발을 가방에 넣어 오도록 지시했다. 지존파는 광주 광천시외버스터미널을 접선 장소로 정하도록 한 뒤 만일의 상황에 대비해 다이너마이트를 챙겼다. 여차하면 자폭할 생각이었다. 소씨는 충분히 탈출할 기회가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이유는 두 가지. 첫째는 아지트에 갇혀 있는 아내가 위험해질 것이 두려웠다. 둘째는 돈만 주면 풀어주겠다는 지존파의 회유를 믿었다.

그러나 지존파는 소씨 부부를 참혹히 살해했다. 이 과정에도 이영순을 억지로 가담시켰다. 소씨 부부 살해 뒤 조직에선 이영순을 죽여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다. 그러나 김현양이 문상록과 주먹다짐까지 벌이며 이영순을 지켰다.

목숨을 건 필사의 탈출

기자들과 일문일답 중인 지존파 조직원들. 중앙포토

기자들과 일문일답 중인 지존파 조직원들. 중앙포토

이영순에게 탈출 기회가 찾아온 것은 다음 날이었다. 손을 다친 김현양이 병원에 가게 되자 이영순이 따라나섰다. 진료실로 들어가던 김현양이 이영순에게 지갑과 휴대전화를 맡겼다. 순간 이영순은 갈등에 빠졌다. ‘혹시 다른 조직원들이 지키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러나 이영순은 지금이 기회라고 생각했다. 애써 태연한 척 차분히 걸어 병원을 빠져나왔다. 그 길로 택시를 잡아타고 병원을 떠났다. 그러곤 다음 날 서울까지 가까스로 올라왔다. 서초서 강력반 형사들을 만나 지존파의 범행을 제보하고 아지트까지 동행했다. 조직원들을 모두 검거할 수 있던 것은 이영순의 탈출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지하 감방과 시신 소각로

한기수 형사가 지존파 검거 당시 그린 아지트 지하실 구조도. 사진 한기수 제공

한기수 형사가 지존파 검거 당시 그린 아지트 지하실 구조도. 사진 한기수 제공

일당을 모두 검거한 뒤 한 형사는 수사 자료로 쓸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구겨진 이불 아래 잔뜩 깔린 만원짜리 지폐가 보였다. ‘돈방석’을 실감하고 싶어 한 짓이란 걸 나중에 알았다. 한 형사와 동료들이 가장 경악했던 것은 지하 감방이었다.

1층 차고 바닥에 지하로 통하는 비밀 계단이 보였다. 무도가 특기인 강력반 에이스들이었지만 지하실로 들어선 순간 저절로 발걸음이 느려졌다. 계단 양쪽엔 철창이 쳐진 공간 두 개가 있었다. 철창 너머로 혈흔이 여기저기 흩뿌리듯 있었다. 안쪽으로 들어가니 커다란 화덕이 보였다. 시신을 소각하는 곳이었다. 그 안에서 소씨 부부의 두개골이 나왔다.

한 형사와 강력반원은 현장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서울로 향했다. 엽기적인 범죄 행각과 달리 이들의 태도는 고분고분했다. 되레 ‘경찰서에서 때리지 말아 달라’고 읍소했다. ‘한날한시에 죽게 해 달라’는 말도 했다. 서초서에 도착해 잡탕밥을 시켜줬다. 범인들 중 누군가 “이렇게 비싼 밥은 처음 먹어 본다”고 했다.

(계속)
조사를 마치고 보니 두목 김기환의 어린 시절은 뜻밖이었습니다. 공부 잘하는 모범생이었습니다. 초등학교 땐 학급 반장을 맡았고, 중학교에선 전교 5등의 우등생이었습니다.
이랬던 그는 어쩌다 “부자들의 돈을 빼앗고 응징하겠다”는 적개심을 키웠을까요.
더 자세한 내용은 아래 링크를 통해 보실 수 있습니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9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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