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人, 육혈포로 조선사람 쏴…"스스로 묘혈 파는 민족성 의심" [김성칠의 해방일기(6)]

김성칠 교수의 일기는 1993년 〈역사앞에서〉란 제목으로 창비에서 출간되었다. 이 일기는 1945년 11월 29일자 뒤쪽부터 남아있었는데, 그 앞의 일기가 사라진 것으로 보였다. 유물을 보관하고 있던 필자의 아들 김기목 교수(통계학, 전 고려대)가 사라진 줄 알았던 일기를 최근 찾아냈다. 1945년 8월 16일에서 11월 29일(앞쪽)까지 들어 있다. 중앙일보는 이 일기를 매주 토요일 원본 이미지를 곁들여 연재한다. 필자의 다른 아들 김기협 박사(역사학)가 필요한 곳에 간략한 설명을 붙인다.  

 

9월 15일 개다.

새벽 세 시 차를 타려고 두 시에 일어나서 침침 칠야를 정거장으로 가노라니 길에서 어떤 사람이 자기도 서울 가려고 정거장엘 나갔더니 아침 차는 원덕까지밖에 가지 않는다고 써 붙였으므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라고 하나 이왕 밤중에 나온 김이라 그냥 정거장까지 가보니 원덕 이북은 차표 발매를 제한한다고 써 붙인 걸 그 사람이 잘못 본 모양이었다. 얼핏 본 것을 함부로 남에게 말하지 않을 것이며 또 남의 말을 짐짓 믿을 것이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차가 양평까지 가서 기관차 고장으로 거진 세 시간이나 떠나지 못하고 지체했다. 모두들 불안초조해서 자꾸 투덜거리었으나 나는 이러한 때 평심서기(平心舒氣)로 지내 보겠다고 마음속에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이러한 심경이 저절로 우러나야지, 무리(無理)로 작심(作心)해서야 부끄러운 노릇이다.

청량리 역전에서 요기를 하려니 국밥 한 그릇에 5원, 고기 한 접시에도 5원, 술 한 컵에도 5원, 빵 한 개 조그만 것에 1원, 능금 한 개에 2원 50전. 우리 같은 박봉으로 도저히 서울생활 할 수 없을 것 같다.


전차를 타려니 학도대가 행렬을 일일이 점검해서 일본인을 적발해가지고 신체를 수색하고 차도 못 타게 하는 양이, 또 일본인들이 짐을 둘러메고 힘없이 걸어가는 양이 한편 측은하기도 하고 한편 너무 과하지 않을까 생각되었으나 그 까닭은 그들의 과거의 죄악을 추궁하느라고 그러는 게 아니고 바로 며칠 전에 연전(延專) 학생 두 명을 사살한 때문이라고 하니 그들의 자작지얼(自作之孼)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연합회에 가니 미군이 점거, 그 전 교무과로 가서 하상용(河祥鏞) 씨 박원식(朴元植) 씨를 만나고 오랜만에 구니히로(國廣) 참사와도 대면.

대학에 갔더니 대학도 미군이 점거 “308 Bomb Wing” 이란 간판이 붙었었다.

의학부의 곁방살이로 나간 법문학부 자치위원회에 갔더니 이명선(李明善) 씨 기타가 역시 조직에 골몰하고 있었다.

권순구(權純九) 선생이 작년에 돌아가시었다는 소문.

의학부는 미국 측 육군병원이 된다고.

박 선생 댁(혜화정 22의 35)에 갔더니 우창이, 규창이, 수창이, 영자(윤창이) 모두 하도 반겨서 방에 들어가서 박 선생님 오시기를 기다렸다.


[해설 : 필자의 1928년 비밀결사 사건 투옥 때 대구고보 교사로 투옥 학생들을 보살펴준 박종홍과 각별한 사제관계를 맺었다. 그 후 박종홍이 이화여전 교수를 지낼 때 이남덕의 경성제대 진학을 지도해 주었으므로 필자 내외 양쪽 모두의 스승이었다.]

Lackard 대위가 임시 학무국장이 되었다고.

교육에 대한 군정부의 방침을 들려주시었다.

9월 16일(일) 개다.

여자의전 학술원 본부에 가서 교육대책위원회에 박 선생 대신으로 출석.

신남철(申南徹) 씨와 해후.

백남운(白南雲) 선생과 초면 인사. 그 인자스럽고 온후한 성격 속에 학적(學的) 깊음이 잠겨 있는 듯하였다. 여기서도 학자님들이 모여서 조직에 시간을 낭비하시는 것이 안타까웠다.

교육의 강령 같은 것, 그나마 임시적인 것, 군정당국에서 또는 당래할 정부에서 그 방면에 경험 있는 관료들이 어련히 만들랴고. 이 학자님들이 공부하여야 할 귀중한 시간들을 허비하면서 법문 조성의 일구일절에 머리들을 썩히고 있는 것 애석한 노릇이다. 학생, 생도들은 거리에 진출하여 학도대로 활약하고 선생들은 정치운동에 분주하고 학자님들은 대학에서나 학술원에서나 조직에 여념이 없고 10년 후의 조선을 누가 맡을까.

철(哲)을 만나려 혜화정 163의 16에 두 번이나 갔으나 없고 전차가 임의롭지 않아서 서대문 밖 대화숙병원까지 걸어갔으나 허행, 몹시 피곤하다. 그러나 그가 정치운동에 간여한다니 어떻게든 만나서 그 심경을 물어보고 될 수 있으면 물러나도록 권해 보아야겠다.

[해설 : 이철(李哲)은 법전 시절(1934-37) 이래 필자의 가장 가까운 친구의 하나로 1950년의 일기에 많이 등장한다.]

대학 앞엘 지날 때 마침 그 누이가 지나면서 철이 집에 와서 기다린다기 다시 기운을 얻어서 세 번째 그 집엘 들러서 오랜만에 만날 수 있었다.

첫째, 너는 몸이 약하니 그토록 밤낮으로 정치에 분주함이 위태롭다. 열중할 땐 모르지만 일시에 그 반동이 오면 어떻게 하느냐.
둘째, 너는 네 소질을 알겠지만 정치보다도 학문일 것이다. 가만히 들앉아서 공부하라.
셋째, 그러니까 네가 진실로 조선을 사랑한다면 지금 한 자라도 더 익혀서 훗날 조선의 학계에 기여하도록 하라. 모두들 마음이 들떠서 날칠 때에 너도 거기 한 몫 끼일 것이 아니다.

그도 8월 15일 이전이라면 소질을 불구하고 몸의 허약은 말할 것 없이 목숨을 내놓고라도 해야 할 것이다. 지금이야 네가 나서질 않더라도 민족주의자 공산주의자가 득시글득시글하지 않느냐. 네가 나서지 않으면 이 혼란을 바로잡을 수 없다고? 주제넘은 소리다. 그야말로 네 자신의 과대평가다. 불가능할 것이다. 도리어 그 조류에 휩싸여 흘러내려가게 될 것이다.

양심을 지니고는 차마 이 혼란을 안연히 좌시할 수 없다고? 그럴 것이다. 그러나 이왕 그 광란의 노도를 바로잡을 수 없는 바에야 물러나서 장래를 위하여 자기 완성에 노력하는 것이 더 양심적이 아닐까.

너는 무어라고 마음속에 변명할지라도 종래의 타성으로 질질 끌려나가는 것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이 커다란 전환기에 마주쳐 아직도 머릿속의 혁명을 이루지 못한 것이다.

현하의 이 도도한 정치조류는 결코 너희들의 노력으로 바로잡을 수 없을 것이다. 내가 보는 바로는 그네들이 모두 속은 텅 비었으면서도 때를 타서 덤비는 것이니 시일이 지나면 저희들도 지칠 것이고 또 저절로 정화될 것이다.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모르고 또 알려고도 하질 않고 공연히 날치는 축들이니 얼마 가질 않아서 자기공허를 느끼고 멈춰 설 것이 아니냐. 그러한 때에야말로 우리들의 힘이 필요할는지 모른다.

여하튼 여기 있어선 얼핏 몸을 빼어내기 어려울 것이니 내일이라도 시골로 내려가자. 내려가서 훈장질이라도 해보자. 너는 지금 무엇보다도 건강이 제일이다. 튼튼해서 많이 공부해서 앞날의 새 조선을 위해서 일해야 될 것이 아니냐.

9월 17일 개다.

아침에 청량리 나와서 9시 20분 승차.

가이타(海田) 선생을 찾아뵙지 못한 것이 마음에 몹시 걸린다. 거리에 일인과 어울리지 말라는 삐라가 있어서 그런 것도 아니고 전차도 탈 수 없고 몹시 지쳐서 그럴 겨를이 없었다고 스스로 변명해 보나 역시 망은(忘恩)한 것이 아닐까 하는 자책이 앞선다. 그러나 또 한편 마음속으론 우리가 지난날 일인에게 진 은혜를 어찌 해석하고 또 어찌 평가했으면 좋을까 하는 딜레마에 빠진다. 

[해설 : 카이타 카나메(海田要)는 경성법전에 배속장교로 근무하던 군인으로 필자가 경성제대에 다니다가 학병 지원 거부로 곤경에 처했을 때 금융조합에 복직해 징용을 면하도록 도와주었다.]


차중에선 철에게서 빌려온 다쓰노 유타카(辰野隆)의 〈忘れ得ぬ人人(잊을 수 없는 사람들)〉을 읽었다.

[해설 : 그 내용의 몇 대목을 일기에 옮겨 적었는데, 그 내용은 여기 싣지 않고 메모란에 적힌 세 개 소제목만 옮겨 놓는다. “전통이 없는 일본의 사상”, “정치가의 심한 사상의 빈곤”, “극단적인 사상의 탄압이 비극의 素因이 아닐까”.]


또 하나 하세가와 뇨제칸(長谷川如是閑)의 소설 〈??男〉에 나오는 법률학에 대한 회의(懷疑)를 인용한 구절도 퍽 자미있었다. 더욱이 그 132쪽에

[해설 : 이어서 나오는 인용 내용도 싣지 않는다. 하세가와 뇨제칸(1875-1969)은 다이쇼-쇼와 연간에 걸쳐 대표적 자유주의 언론인이었는데, 이 작품명은 확인하지 못했다.]

이런 구절들은 내가 법전 시대에 항상 생각하던 바로 그것이므로 인상 깊었다.

차가 원주역에 닿아 있을 때 이중연 씨가 사과를 사 가지고 왔었다.

9월 18일 개다. 

일본의 소위 만주사변 기념일. 작년까지도 일본과 조선에서 기념하던 날이다. 일본이 망한 직접의 계기는 14년 전(1931)의 오늘에 있었던 것이다.

〈리튼 보고서(Report of Lytton)〉를 내어보니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한국인 대부분이 강한 반일 감정을 가졌고 자기네 나라의 일본 병합을 인정하지 않으며, 정치적-경제적 고난이 아니었다면 고국을 떠나지 않았을 한국인 이주민들은 일반적으로 만주에서 일본인의 사찰을 벗어나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그들(중국인들)은 주장한다.”

[해설 : 리튼 보고서는 만주사변의 실상을 조사하기 위해 국제연맹이 구성한 위원회가 1932년 10월에 제출한 보고서로, 일본군의 조작으로 빚어진 사태임을 밝혀 일본의 연맹 탈퇴를 불러왔다.]
 
[조선사람은 모두 일본을 싫어한다.]

[그들은 일본사람에게 쫓겨났으나 언제든 고국을 그리워한다.]

면내 일부에서 천주교 측이 불만을 가지고 폭동을 획책한다는 풍설이 있기에 서악영 군을 일전에 만나서 제천읍에 가서 신부에게 그런 이야길 전하고 만일의 일이 있으면 봉양면과 천주교 측이 모두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했더니 오늘 서 군의 말을 들으면 신부도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라 하고 어제 오후 차로 학산리 현지로 나왔다고 한다. 이 문제는 아무래도 면내에서 완전 중립이라고 할 수 있는 내가 해결지어야겠다고 마음속으로 걱정했더니 이로써 적이 마음 놓을 수가 있다.  

그런데 어제 이석윤(李錫閏)이란 예의 노인이 와서 또다시 야료를 하고 갔다고 박제훈 씨가 분개하고 그러므로 치안대에 말해서 이 노인을 잡아 가두어야 한다고 하는 것을 그리하는 것이 오히려 일을 버르잡게 될 것이라고 굳이 말렸다. 염수해, 이명구, 김상옥 제씨도 내 의견이 온편(穩便)하다고 해서 그냥 내버려두기로 하였다.

제천읍에선 어제 대낮에 혼잡한 시중에 전 경관이던 일인이 육혈포로 조선사람을 쏘아서 한 사람을 즉사케 하고 한 사람을 중상시켜서 사단을 일으켰으므로 범인은 포박 유치하고 일본인 전부를 제천여관 기타에 억류했다고 한다. 최후의 발악으로 보아버리면 그만일지라도 스스로 묘혈을 파는 그 민족성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 또 한 사람 권총을 갖고 단양 가도로 도주하는 일인 한 명을 잡아서 유치했다고 한다.

저녁엔 최 선생이 찾아와서 학교를 내일부터 5일간 추석 휴업을 한다기 심히 유감스러운 일이라고 말했다. 명절이라고 무턱대고 놀던 폐습은 최근 좀 나아졌는가 하는데 자유와 독립을 얻었다고 또다시 일보 퇴각하는 건 애석한 일이다. 더욱이 학교에서 그리한다면 일반에의 영향이 없지 않을 터인데 한심스런 노릇이다.

대규 군에게 쌀 한 말 지워서 집으로 보냈는데 들으니 영주 안동 간 철로가 저번 비에 무너져서 걸어가야 한다니 걱정스럽다.

오후에 면에서 청년대 결성식이 있어서 다음과 같은 강연을 하였다.


[강연 요지는 다음 주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