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5일 개다.
차가 양평까지 가서 기관차 고장으로 거진 세 시간이나 떠나지 못하고 지체했다. 모두들 불안초조해서 자꾸 투덜거리었으나 나는 이러한 때 평심서기(平心舒氣)로 지내 보겠다고 마음속에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이러한 심경이 저절로 우러나야지, 무리(無理)로 작심(作心)해서야 부끄러운 노릇이다.
청량리 역전에서 요기를 하려니 국밥 한 그릇에 5원, 고기 한 접시에도 5원, 술 한 컵에도 5원, 빵 한 개 조그만 것에 1원, 능금 한 개에 2원 50전. 우리 같은 박봉으로 도저히 서울생활 할 수 없을 것 같다.
전차를 타려니 학도대가 행렬을 일일이 점검해서 일본인을 적발해가지고 신체를 수색하고 차도 못 타게 하는 양이, 또 일본인들이 짐을 둘러메고 힘없이 걸어가는 양이 한편 측은하기도 하고 한편 너무 과하지 않을까 생각되었으나 그 까닭은 그들의 과거의 죄악을 추궁하느라고 그러는 게 아니고 바로 며칠 전에 연전(延專) 학생 두 명을 사살한 때문이라고 하니 그들의 자작지얼(自作之孼)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연합회에 가니 미군이 점거, 그 전 교무과로 가서 하상용(河祥鏞) 씨 박원식(朴元植) 씨를 만나고 오랜만에 구니히로(國廣) 참사와도 대면.
대학에 갔더니 대학도 미군이 점거 “308 Bomb Wing” 이란 간판이 붙었었다.
의학부의 곁방살이로 나간 법문학부 자치위원회에 갔더니 이명선(李明善) 씨 기타가 역시 조직에 골몰하고 있었다.
권순구(權純九) 선생이 작년에 돌아가시었다는 소문.
의학부는 미국 측 육군병원이 된다고.
박 선생 댁(혜화정 22의 35)에 갔더니 우창이, 규창이, 수창이, 영자(윤창이) 모두 하도 반겨서 방에 들어가서 박 선생님 오시기를 기다렸다.
[해설 : 필자의 1928년 비밀결사 사건 투옥 때 대구고보 교사로 투옥 학생들을 보살펴준 박종홍과 각별한 사제관계를 맺었다. 그 후 박종홍이 이화여전 교수를 지낼 때 이남덕의 경성제대 진학을 지도해 주었으므로 필자 내외 양쪽 모두의 스승이었다.]
Lackard 대위가 임시 학무국장이 되었다고.
교육에 대한 군정부의 방침을 들려주시었다.
9월 16일(일) 개다.
신남철(申南徹) 씨와 해후.
백남운(白南雲) 선생과 초면 인사. 그 인자스럽고 온후한 성격 속에 학적(學的) 깊음이 잠겨 있는 듯하였다. 여기서도 학자님들이 모여서 조직에 시간을 낭비하시는 것이 안타까웠다.
교육의 강령 같은 것, 그나마 임시적인 것, 군정당국에서 또는 당래할 정부에서 그 방면에 경험 있는 관료들이 어련히 만들랴고. 이 학자님들이 공부하여야 할 귀중한 시간들을 허비하면서 법문 조성의 일구일절에 머리들을 썩히고 있는 것 애석한 노릇이다. 학생, 생도들은 거리에 진출하여 학도대로 활약하고 선생들은 정치운동에 분주하고 학자님들은 대학에서나 학술원에서나 조직에 여념이 없고 10년 후의 조선을 누가 맡을까.
철(哲)을 만나려 혜화정 163의 16에 두 번이나 갔으나 없고 전차가 임의롭지 않아서 서대문 밖 대화숙병원까지 걸어갔으나 허행, 몹시 피곤하다. 그러나 그가 정치운동에 간여한다니 어떻게든 만나서 그 심경을 물어보고 될 수 있으면 물러나도록 권해 보아야겠다.
[해설 : 이철(李哲)은 법전 시절(1934-37) 이래 필자의 가장 가까운 친구의 하나로 1950년의 일기에 많이 등장한다.]
대학 앞엘 지날 때 마침 그 누이가 지나면서 철이 집에 와서 기다린다기 다시 기운을 얻어서 세 번째 그 집엘 들러서 오랜만에 만날 수 있었다.
첫째, 너는 몸이 약하니 그토록 밤낮으로 정치에 분주함이 위태롭다. 열중할 땐 모르지만 일시에 그 반동이 오면 어떻게 하느냐.
둘째, 너는 네 소질을 알겠지만 정치보다도 학문일 것이다. 가만히 들앉아서 공부하라.
셋째, 그러니까 네가 진실로 조선을 사랑한다면 지금 한 자라도 더 익혀서 훗날 조선의 학계에 기여하도록 하라. 모두들 마음이 들떠서 날칠 때에 너도 거기 한 몫 끼일 것이 아니다.
그도 8월 15일 이전이라면 소질을 불구하고 몸의 허약은 말할 것 없이 목숨을 내놓고라도 해야 할 것이다. 지금이야 네가 나서질 않더라도 민족주의자 공산주의자가 득시글득시글하지 않느냐. 네가 나서지 않으면 이 혼란을 바로잡을 수 없다고? 주제넘은 소리다. 그야말로 네 자신의 과대평가다. 불가능할 것이다. 도리어 그 조류에 휩싸여 흘러내려가게 될 것이다.
양심을 지니고는 차마 이 혼란을 안연히 좌시할 수 없다고? 그럴 것이다. 그러나 이왕 그 광란의 노도를 바로잡을 수 없는 바에야 물러나서 장래를 위하여 자기 완성에 노력하는 것이 더 양심적이 아닐까.
너는 무어라고 마음속에 변명할지라도 종래의 타성으로 질질 끌려나가는 것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이 커다란 전환기에 마주쳐 아직도 머릿속의 혁명을 이루지 못한 것이다.
현하의 이 도도한 정치조류는 결코 너희들의 노력으로 바로잡을 수 없을 것이다. 내가 보는 바로는 그네들이 모두 속은 텅 비었으면서도 때를 타서 덤비는 것이니 시일이 지나면 저희들도 지칠 것이고 또 저절로 정화될 것이다.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모르고 또 알려고도 하질 않고 공연히 날치는 축들이니 얼마 가질 않아서 자기공허를 느끼고 멈춰 설 것이 아니냐. 그러한 때에야말로 우리들의 힘이 필요할는지 모른다.
여하튼 여기 있어선 얼핏 몸을 빼어내기 어려울 것이니 내일이라도 시골로 내려가자. 내려가서 훈장질이라도 해보자. 너는 지금 무엇보다도 건강이 제일이다. 튼튼해서 많이 공부해서 앞날의 새 조선을 위해서 일해야 될 것이 아니냐.
9월 17일 개다.
가이타(海田) 선생을 찾아뵙지 못한 것이 마음에 몹시 걸린다. 거리에 일인과 어울리지 말라는 삐라가 있어서 그런 것도 아니고 전차도 탈 수 없고 몹시 지쳐서 그럴 겨를이 없었다고 스스로 변명해 보나 역시 망은(忘恩)한 것이 아닐까 하는 자책이 앞선다. 그러나 또 한편 마음속으론 우리가 지난날 일인에게 진 은혜를 어찌 해석하고 또 어찌 평가했으면 좋을까 하는 딜레마에 빠진다.
[해설 : 카이타 카나메(海田要)는 경성법전에 배속장교로 근무하던 군인으로 필자가 경성제대에 다니다가 학병 지원 거부로 곤경에 처했을 때 금융조합에 복직해 징용을 면하도록 도와주었다.]
차중에선 철에게서 빌려온 다쓰노 유타카(辰野隆)의 〈忘れ得ぬ人人(잊을 수 없는 사람들)〉을 읽었다.
[해설 : 그 내용의 몇 대목을 일기에 옮겨 적었는데, 그 내용은 여기 싣지 않고 메모란에 적힌 세 개 소제목만 옮겨 놓는다. “전통이 없는 일본의 사상”, “정치가의 심한 사상의 빈곤”, “극단적인 사상의 탄압이 비극의 素因이 아닐까”.]
또 하나 하세가와 뇨제칸(長谷川如是閑)의 소설 〈??男〉에 나오는 법률학에 대한 회의(懷疑)를 인용한 구절도 퍽 자미있었다. 더욱이 그 132쪽에
[해설 : 이어서 나오는 인용 내용도 싣지 않는다. 하세가와 뇨제칸(1875-1969)은 다이쇼-쇼와 연간에 걸쳐 대표적 자유주의 언론인이었는데, 이 작품명은 확인하지 못했다.]
이런 구절들은 내가 법전 시대에 항상 생각하던 바로 그것이므로 인상 깊었다.
차가 원주역에 닿아 있을 때 이중연 씨가 사과를 사 가지고 왔었다.
9월 18일 개다.
〈리튼 보고서(Report of Lytton)〉를 내어보니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한국인 대부분이 강한 반일 감정을 가졌고 자기네 나라의 일본 병합을 인정하지 않으며, 정치적-경제적 고난이 아니었다면 고국을 떠나지 않았을 한국인 이주민들은 일반적으로 만주에서 일본인의 사찰을 벗어나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그들(중국인들)은 주장한다.”
[해설 : 리튼 보고서는 만주사변의 실상을 조사하기 위해 국제연맹이 구성한 위원회가 1932년 10월에 제출한 보고서로, 일본군의 조작으로 빚어진 사태임을 밝혀 일본의 연맹 탈퇴를 불러왔다.]
[조선사람은 모두 일본을 싫어한다.]
[그들은 일본사람에게 쫓겨났으나 언제든 고국을 그리워한다.]
면내 일부에서 천주교 측이 불만을 가지고 폭동을 획책한다는 풍설이 있기에 서악영 군을 일전에 만나서 제천읍에 가서 신부에게 그런 이야길 전하고 만일의 일이 있으면 봉양면과 천주교 측이 모두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했더니 오늘 서 군의 말을 들으면 신부도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라 하고 어제 오후 차로 학산리 현지로 나왔다고 한다. 이 문제는 아무래도 면내에서 완전 중립이라고 할 수 있는 내가 해결지어야겠다고 마음속으로 걱정했더니 이로써 적이 마음 놓을 수가 있다.
그런데 어제 이석윤(李錫閏)이란 예의 노인이 와서 또다시 야료를 하고 갔다고 박제훈 씨가 분개하고 그러므로 치안대에 말해서 이 노인을 잡아 가두어야 한다고 하는 것을 그리하는 것이 오히려 일을 버르잡게 될 것이라고 굳이 말렸다. 염수해, 이명구, 김상옥 제씨도 내 의견이 온편(穩便)하다고 해서 그냥 내버려두기로 하였다.
제천읍에선 어제 대낮에 혼잡한 시중에 전 경관이던 일인이 육혈포로 조선사람을 쏘아서 한 사람을 즉사케 하고 한 사람을 중상시켜서 사단을 일으켰으므로 범인은 포박 유치하고 일본인 전부를 제천여관 기타에 억류했다고 한다. 최후의 발악으로 보아버리면 그만일지라도 스스로 묘혈을 파는 그 민족성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 또 한 사람 권총을 갖고 단양 가도로 도주하는 일인 한 명을 잡아서 유치했다고 한다.
저녁엔 최 선생이 찾아와서 학교를 내일부터 5일간 추석 휴업을 한다기 심히 유감스러운 일이라고 말했다. 명절이라고 무턱대고 놀던 폐습은 최근 좀 나아졌는가 하는데 자유와 독립을 얻었다고 또다시 일보 퇴각하는 건 애석한 일이다. 더욱이 학교에서 그리한다면 일반에의 영향이 없지 않을 터인데 한심스런 노릇이다.
대규 군에게 쌀 한 말 지워서 집으로 보냈는데 들으니 영주 안동 간 철로가 저번 비에 무너져서 걸어가야 한다니 걱정스럽다.
오후에 면에서 청년대 결성식이 있어서 다음과 같은 강연을 하였다.
[강연 요지는 다음 주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