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퇴직연금 디폴트옵션을 택한 가입자는 지난해 4분기 말 기준 631만 명 으로 2023년 말(479만명) 보다 32% 불어났다. 중앙포토.
630만 명이 퇴직연금 디폴트 옵션에 가입했지만 10명 중 8명 이상이 원리금 보장형인 ‘초저위험’ 상품에 몰려있었다. 18일 고용노동부와 금융감독원이 공시한 ‘디폴트 옵션 수익률 등 현황’이다. 퇴직연금 디폴트 옵션을 택한 가입자는 지난해 4분기 말 기준 631만 명으로 2023년 말(479만 명)보다 32% 증가했다. 가입자 수가 늘면서 잔액은 40조670억원으로 1년 사이 219% 급증했다.
디폴트 옵션은 개인이 운용 책임을 지는 확정기여(DC)형ㆍ개인형 퇴직연금(IRP)에 적용한다. 상품 만기 이후에도 가입자가 적립금 운용 방법을 추가로 지시하지 않으면 사전에 정한 방식대로 자금을 자동으로 굴리는 제도다. 정부는 퇴직연금 수익률을 개선할 수 있도록 2023년 7월 12일 디폴트 옵션을 시행했다.

신재민 기자
위험 등급이 높아질수록 가입자 수는 줄고, 수익률은 높았다. 42만 명이 택한 저위험 등급 상품의 수익률은 연 7.2%였다. 중위험(33만 명 가입)은 연 11.8%였고, 고위험(23만 명)은 16.8%로 가장 높았다.
정부는 원리금 보장형 편중 현상을 완화하는 방식으로 제도를 손질 중이다. 대표적으로 오는 4월부터 디폴트 옵션 상품 이름(명칭)에서 ‘위험’이란 단어를 빼고, 투자 성향을 강조하는 식으로 바꾼다. 가입자 투자 성향에 맞춰 상품을 선택할 수 있도록 초저위험은 안정형으로, 저위험은 안정투자형, 중위험은 중립투자형, 고위험은 적극 투자형으로 명칭을 변경한다.
하지만 금융투자업계에선 상품명을 바꾸는 ‘주먹구구식’ 대안으로는 디폴트 옵션 도입 취지를 살리긴 쉽지 않다고 봤다.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웠기 때문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디폴트 옵션에 원리금 보장형을 넣은 곳은 한국과 일본뿐이다. 정부가 벤치마킹했던 미국과 영국, 호주 등 선진국은 실적배당형 상품만 포함했다. 익명을 요구한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근로자퇴직급여 보장법) 법적으로 원리금 보장 상품을 포함해야 한 데다 업권 간 ‘밥그릇’ 경쟁 영향도 컸다”며 “자칫 5년 앞서 원리금 보장형을 편입했다가 실패한 일본을 따라가는 거 같아 우려스럽다”고 말했다.
가입자(근로자)에게 상품 선택을 맡기는 방식도 수익률이 저조한 요인으로 꼽는다. 자칫 투자형 상품을 택했다가 원금 손실이 날 수 있다는 불안에 원리금 보장형을 택할 확률이 높아서다. 미국 등 선진국에선 회사가 투자전문가의 자문을 받아 디폴트 옵션을 제시한다. 근로자가 이를 거부하지 않는 한 자동으로 가입된다.
상당수 전문가는 가장 먼저 수익성이 낮은 원리금 보장형 상품의 편입을 제한하는 방식으로 제도를 손질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남재우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수익률 개선을 위해선 원리금 보장형 상품을 한시적으로 가입하게 하거나 투자 비중을 제한하는 방식으로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김동엽 미래에셋투자와연금센터 상무도 “디폴트 옵션에 초저위험 상품까지 넣는 게 맞는지 의문”이라며 “적어도 100% 원리금 보장형 상품으로 퇴직금을 운용하는 방식에 제한을 둬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