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릴수록 강해지는 ‘제재의 역설’…차이나 테크의 역습
「 한때 ‘대륙의 실수’로 불렸지만, 이젠 ‘대륙의 기본기’가 됐다. 인공지능(AI)·로봇·전기차·전자상거래 등 요즘 핫하다는 테크 산업에서 중국 기업들이 화제다. 가격 경쟁력은 기본, 더 놀라운 건 예상을 뛰어넘는 성능이다. 최근 춘제(중국 설) 특집 갈라쇼 무대를 꾸민 중국 스타트업 유니트리(Unitree)의 휴머노이드(인간형) 로봇 ‘H1’은 테슬라 ‘옵티머스’의 절반 가격이지만 사양은 비슷하다고. 가만, 미국이 지난 10년 사이 열심히 중국을 견제하지 않았나? 언제 이렇게 컸지? 싼 게 비지떡=빛 좋은 개살구=메이드 인 차이나. 아직도 이 공식에 익숙하다면, 이번 기사를 주목하자. 14억 인구 가운데 키워낸 ‘천재 소년’들부터, 중국 테크 기업의 인해전술 전략까지 싹 담았다.
」 ◆21세기 중국의 테크판 ‘인해전술’=14억2000만 명. 예나 지금이나 중국의 힘은 전 세계 17%를 차지하는 인구에서 나온다. 내수 시장 자체가 글로벌 경쟁인 만큼 치열한 생존게임을 거쳐야 살아남을 수 있다. 지난해 기준 중국 공업정보화부가 언급한 AI 기업 개수만 4700개 이상이고, 월 5000대 이상 전기차를 생산하는 회사는 50군데가 넘는다. 중국에 등록된 로봇 관련 기업은 71만 곳이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몇백, 몇천, 몇만 개 기업 중에 살아남기 위해 결국 다른 기업과 차별화해야 한다. 바로 가성비다. 중국 출신 경제전문가 안유화 중국증권행정연구원장은 “중국 기업이 가성비를 높이는 것은 전략이라기보단 시장 장악을 위한 생존의 문제”라고 짚었다.
가성비를 높이기 위해선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가격을 내리거나, 성능을 올리거나. 중국 기업은 초창기 전자에 집중해 왔다. 지난해 한국을 강타한 차이나(C) 커머스 3대장 알테쉬(알리·테무·쉬인)는 대량 생산으로 단위당 생산 비용을 낮추거나 유통 및 공급망 관리 등을 통해 초저가 상품을 선보여 업계를 흔들었다.
과도한 최저가 전략은 ‘싼 게 비지떡’이라는 인식을 낳기도 했다. 하지만 비지떡도 대량으로 계속 만들다 보니 노하우가 쌓였다. 웨어러블(입는) 로봇 기업을 창업한 공경철 KAIST 교수는 “해외 로봇 전시회 등을 나가면, 휴머노이드(인간형)와 다족형 로봇은 지금은 중국이 압도적으로 앞서나가고 있다”며 “처음에는 싼 게 비지떡이었더라도, 그 비지떡을 계속 만들어서 팔다 보니 맛있는 피자가 됐다”고 말했다.
최근에는 가성비 전략에도 변화가 생겼다. 성능에 해당하는 기술 혁신을 공격적으로 노리기 시작한 것. 전병서 중국경제금융연구소장은 “10년 전 샤오미는 잊어야 한다. 싸구려 전자제품을 만드는 회사가 아니라 AI 기반 사물인터넷(AIoT)과 전기차를 만드는 회사”라면서 “최근 샤오미가 출시 첫날 전기차를 9만 대 이상 팔았는데, 가격 경쟁력은 기본이고 퀄리티(성능)도 갖춘 덕분”이라고 분석했다.
◆미국, 중국몽(夢)에 불을 지피다?=중국이 혁신의 중요성을 깨달은 건 기술력이 중요해지는 산업의 흐름을 읽어서만은 아니다. 안유화 원장은 “그동안 혁신은 미국이 하고, 이후 ‘모방과 응용’, 즉 열심히 따라가기만 해도 된다는 사회 분위기가 중국을 지배했다. 그것만으로도 돈을 벌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라면서 “하지만 그 믿음은 깨졌다”고 말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등장은 그 기폭제가 됐다. 2017년 트럼프 1기가 시작되면서 대중국 제재가 본격적으로 시작됐기 때문이다. 바이든 정부와 트럼프 2기로 오면서 제재는 더 강해졌다. 전병서 소장은 “전기차·태양광·배터리 등 중국이 잘하고 있는 것들에 미국이 관세 부과 등 제재를 강하게 걸면서, 중국이 기술 자립과 혁신 중요성을 깨닫는 계기가 됐다”며 “이 때문에 중국이 OEM(위탁생산)에서 창의와 혁신으로 넘어가는 ‘제재의 역설’이 발생한 것”이라고 짚었다.
지난해 3월 출시한 샤오미의 첫 전기차 ‘SU7’. [뉴스1]
과거 제조업을 통해 자본을 축적했던 중국에 혁신은 이제 돈보다 중요한 요소가 됐다. 시진핑 3기(2022~2027년)의 핵심 과제는 ‘기술 자립’이다. 눈앞의 내수 살리기보다 내실 있는 기술력 증강에 무게중심을 두는 것. 지난해 7월 ‘3중 전회’(중앙위원회 제3차 전체회의)에서 시진핑 주석이 강조한 ‘고품질 성장’에 대해 블룸버그는 “경제 성장에 있어 절대적인 속도 대신 질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과학기술정책연구원 김종선 선임연구원은 “그간 중국은 해외 기술을 들여와 국내에서 맷집을 키워 나갔다면, 이제는 자체 기술을 상용화까지 이어지도록 만들려 한다”며 “리커창 전 총리가 14차 5개년(2021∼2025년) 계획에서 기초연구를 강조한 것도 국가 혁신 측면에서 같은 취지”라고 짚었다.
지난달 ‘CES 2025’에 선보인 중국 스타트업 유니트리의 휴머노이드 로봇. [연합뉴스]
혁신을 위해 미국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려는 시도도 이어졌다. 지난해 3월 WSJ 보도에 따르면, 중국은 ‘문건 79호’라는 이름의 극비 문건을 통해 ‘미국 삭제’(Delete America)의 약자인 일명 ‘딜리트 A’ 프로젝트를 진행해 왔다. 2027년까지 IBM·시스코 등 해외 하드웨어·소프트웨어를 중국 업체 제품으로 교체하는 내용 등이 담겼다. 이에 따라 테슬라·마이크로소프트·인텔 등 미국 빅테크는 지난해 잇따라 중국에서 사업을 철수하거나 직원 재배치를 진행했다. 반도체 등 첨단 기술을 둘러싼 미·중 간 갈등이 고조되면서 자국 기업을 키우려는 목적과 동시에 미국 기술에 더는 의존하지 않으려는 혁신 의지 측면이 담겼다는 분석이다.
◆ 99 끌고 가는 1을 찾아라=기술 자립의 길에서 중국이 택한 주요 전략 중 하나는 14억 인구 가운데 세상을 바꿀 한 명을 찾아내는 일이었다. 화웨이가 2019년부터 진행한 채용 프로그램 ‘천재 소년’ 프로젝트가 대표적이다. 수학·물리학·AI 등 분야에서 필기, 임원 면접 등 7단계 과정을 거쳐 천재 소년을 선발, 최소 89만 위안(약 1억3000만원)부터 최대 201만 위안(약 4억원)까지 연봉을 주며 키웠다. 로봇 스타트업 ‘즈위안 로봇’을 설립한 1993년생 펑즈후이(彭志輝)는 이 프로젝트에서 발굴한 대표적 인물이다. 백서인 한양대 중국지역통상학과 교수는 “중국 인재 정책은 평준화가 아닌 진짜 잘하는 사람을 강하게 밀어주는 정책”이라고 설명했다.
중국은 또 2017년 발표한 ‘차세대 AI 발전 계획’에 따라 각 대학에 2000개 이상 AI 관련 학과를 만들었다. 이 중 300개 이상이 베이징대·칭화대 등 명문대와 이공계 전문 국립대에 집중됐다. 김종선 선임연구원은 “중국에선 의대보다 공대를 가면 돈 벌 기회가 많다는 인식이 있다. 정부에서도 IT·과학 분야 성공 모델을 강조한다”고 전했다. 샤오미로부터 연봉 1000만 위안(약 20억원)을 제안받은 것으로 알려진 딥시크 개발자 뤄푸리(罗浮日) 역시 베이징사범대학 전자학과에 입학했지만, “컴퓨터학과가 전망도 밝고 진학의 길도 넓다”는 교수 조언으로 전과한 바 있다.
◆ 돌아온 트럼프와 단련된 중국=지난달부터 시작된 트럼프 2기 정부. 대중국 제재 강도는 더 세질 것으로 예상된다. 중국은 어떤 준비를 했을까.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에서 중국을 담당해온 오종혁 전문연구원은 “중국이 트럼프 1기 때와 달리 2기엔 준비를 많이 했다”며 “미국에서 관세 등 제재를 했을 때 대응할 수 있는 제도와 법을 정비했고, 제14차 5개년 계획에서 이미 기술 산업에 대한 기조를 잡아 ‘AI 플러스(+) 행동계획’ 등 본격 실행할 수 있는 틀을 짰다”고 설명했다. 그는 “다른 주요국들처럼 중국도 저성장에 시장 활력이 떨어진 상태”라며 “AI·로봇 등 신사업 기술을 통해 생산력을 끌어올리는 수밖에 없고, 핵심 기술을 확보 못 하면 패권 경쟁에서 무너질 수밖에 없는 만큼 전력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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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환희·김민정 기자 eo.hwanhee@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