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핵 정국 속에 이를 지켜보는 한국의 불안도 점점 커지고 있다. 그사이 북·러가 군사동맹 수준의 협정을 맺은 데 이어, 1만명이 넘는 북한군이 우크라이나 전장에 투입되는 등 먼 나라 얘기인 줄 알았던 전쟁의 현실이 한반도 정세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이익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냉정하게 버림받는 우크라이나의 운명도 남의 일이 아니게 됐다.
트럼프 2기 행정부가 구상하는 새로운 세계질서는 대체 어떤 모습일까. 우크라이나전은 한반도 정세에 어떤 파장을 남겼을까. 초유의 외교 리더십 공백 상황에서 한국에 남은 선택지는 뭘까. 권기창 전 우크라이나 대사(한국수입협회 상근부회장)와 이재승 고려대 일민국제관계연구원장이 이 같은 고난도 과제를 놓고 지난 19일 대담을 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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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승 고려대 일민국제관계연구원장(왼쪽)과 권기창 전 우크라이나 대사가 19일 오후 서울 성북구 고려대학교에서 대담하고 있다. 김성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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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기창 전 우크라이나 대사가 19일 오후 서울 성북구 고려대학교에서 이재승 고려대 교수와 대담하고 있다. 김성룡 기자
트럼프는 세계 질서를 새롭게 재편하고 있다.
권기창=“트럼프는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자유주의적 국제질서를 동맹국이 미국을 악용해 이득을 취하는 질서라 본다. 강대국이 약소국을 통제하는 19세기 제국주의 질서를 선호하는 것 같다. 강대국 권력정치와 세력권으로 회귀하는 것으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원하는 질서다”
이재승=“사업가 출신인 트럼프는 극도의 현실주의와 실용주의를 통해 세계를 본다. 우크라이나전도 실익이 보이지 않는데 비용을 계속 지출해야 한다는 이유에서 정리하려는 것이다. 미국 내에서도 우크라이나 지원을 반대하는 의견이 급격히 늘었다.”
트럼프의 우크라이나전 종결 방식이 중국·북한에 어떤 신호를 보낼까.
권기창=“러시아에 처벌이 아니라 보상이 주어지는 걸 보고, ‘(대만을) 얼마든지 침공해도 되겠구나’라는 메시지를 중국에 줬다. 미국은 중국의 대만 침공 가능성을 실제로 우려한다. 대만 위기가 고조될 것이다. 더 무서운 건 북한이 러시아의 혈맹이 되면서 한반도 유사시 러시아 개입도 당연하게 돼 버린 점이다.”
이재승=“그동안 미국은 비핵화 협상 과정에서 북한에 핵 포기 대가로 ‘안전보장’을 제안했다. 그러나 이번 전쟁으로 우크라이나가 핵 반납을 조건으로 1994년 미국 등 서방으로부터 받은 안전보장인 ‘부다페스트 양해각서’가 무용지물이었다는 게 드러났다. 북한이 나쁜 선례를 배우게 된 셈이다. 설상가상 북한은 파병으로 실전 경험까지 갖추게 됐다. 중국의 팽창주의에 대한 봉인 역시 해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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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진 기자
한국은 현재 외교 리더십 부재 상황이다.
이재승=“한국이 예측 불가능한 나라가 돼 버렸다. 미국은 일단 관망 자세로 지켜볼 것이다. 리더십의 진공 상태가 실질적인 피해로 이어지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게 직면한 과제다.”
권기창=“불리한 조건이다. 그러나 어떻게 대응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트럼프에게는 한·미 동맹의 가치 보단 이익이 되느냐가 중요하다. 외교안보, 경제통상, 기술 등 다방면에서 트럼프가 매력적으로 느낄 공동의 이익을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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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승 고려대 교수가 19일 오후 서울 성북구 고려대학교에서 권기창 전 우크라이나 대사와 대담하고 있다. 김성룡 기자
한국이 내세울 수 있는 매력 요소는 뭔가.
이재승=“우리나라엔 첨단 제조업 분야인 반도체·자동차·조선 등이 있다. 특히 선박 건조와 수리 능력이 우리의 장점이 될 수 있다. 중국을 견제하겠다는 미국의 입장이 굉장히 견고한 상황인데, 한국과 일본은 인도·태평양에서 미군 함정을 주기적으로 수리하고 점검할 수 있는 나라다.”
권기창=“미국이 종전을 서두르는 건 미국의 이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 전쟁을 끝내고, 최우선 과제인 중국 견제에 집중하기 위해서다. 중국견제 측면에서 우리나라는 일본·호주·뉴질랜드와 함께 중요한 자산이 될 수 있다.”
이재승=“우크라이나의 경우 전쟁 전부터 정치적 부정부패, 경제적으로는 올리가르히(신흥 재벌)의 부의 독점 등 내부적 문제로 국가가 취약했다. 거버넌스가 불안정하면 미국이 쉽게 ‘패싱’할 수 있다. 미국에 패싱 당하느냐 아니냐는 그 나라의 역량과 결기가 좌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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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진 기자
우크라이나전이 한국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권기창=“우리의 방산 능력과 반도체 등 첨단 산업능력이 부각되면서 국제적 위상이 상승했다. 북한의 참전은 유럽의 안보와 동아시아의 안보가 직결돼 있다는 증거다. 유럽과 우리는 동병상련이다.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와 더욱 긴밀히 협력해야 할 이유다. 우리가 G7(주요 7개국)에 들어가기 위한 큰 외교자산이 될 것이다.”
이재승=“고립되는 순간 죽는다. 우크라이나의 경우 고립돼 있었다. 우리는 외교적으로 고립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간 우리 외교는 미국만 챙기면 되는 구조였지만, 그렇게 해선 놓치는 부분이 있다. 중‧러 등에 대해 깊은 분석력을 갖고 있어야 하고, 유럽 국가들도 눈 여겨 봐야 한다.”
권기창=“한미 동맹에만 의지할 순 없다. 힘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부국강병에 힘 써야한다. 러시아를 적대시할 필요가 없고, 중국과 관계도 강화해야 한다”
유럽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이재승=“러시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유럽 국가들이 있다. (나토 회원국들은) 미국을 통해 안전을 보장받았다. 하지만 이번 종전 협상 방식을 두고 이런 국가들의 실망감이 크다. 그러나 나토는 미국의 핵심 자산이다. 트럼프도 나토를 버릴 정도로 어리석진 않을 것이다. 이 핵심 자산을 비용 측면에서 재구성하려 할 것이다.”
권기창=“유럽과 미국의 균열이 가시화 됐다. 트럼프가 1기 때 나토 탈퇴를 언급했다. 트럼프의 관세 부과로 유럽과 미국의 마찰이 통상으로 확대되면 나토에서 탈퇴하겠단 말을 다시 꺼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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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진 기자
우크라이나 재건 사업에 한국 기업의 참여는 가능할까.
권기창=“재건에 들어가면 철도·도로와 같은 기본 인프라는 물론 스마트시티 건설을 위한 첨단 정보기술(IT) 등 필요한 부분이 많다. 기술력과 자본력이 있는 우리 기업들이 참여할 여지가 크다. 강력한 경쟁 상대는 중국인데, 전쟁에서 러시아 편을 들어서 참여가 제한적일 것이다.”
이재승=“한국이 참여하지 않을 이유가 전혀 없다. 시장이 열리기 전에 정부와 기업이 협조 체계를 미리 잘 구축해 놔야 한다. 재건사업 참여는 실리적인 이유도 있지만, 국제사회에서 우리 입지와 위상을 다지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