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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3월 18일자 부산일보 신문에 실린 경남 양산경찰서 당시 모습. 자료 양산시
‘소작료 인하’ 외쳤는데…농민 구금한 일제에 반발
이 사건은 1932년 3월 16~17일 일어난 농민 투쟁이다. 16일 양산농민조합 소속 조합원 수백명은 양산사회단체회관에서 제3회 정기대회를 열고, 읍내 주변을 행진하며 시위했다. 소작료 인하 등을 요구했다. 하지만 일본 경찰은 시위 군중을 해산하고, 주동자였던 조합 간부 등 16명을 붙잡아 양산경찰서 유치장에 구금했다.
같은 날 윤 선생 등은 ‘구금 인사 석방 투쟁’을 전개했다. 조합원과 구금된 조합원 가족 등 300여명이 ‘일제 경찰이 이유 없이 농민을 구속한 뒤 석방하지 않는다’며 석방 촉구 집회를 열었다. 다음 날(17일) 새벽에는 양산경찰서 유치장을 습격, 구금 인사를 빼내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실패하고 경찰에 붙잡혔다. 이 과정에서 농민 2명이 경찰이 쏜 총탄에 숨을 거두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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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농민조합원 등이 당시 경남 양산경찰서를 습격한 사건을 보도한 1932년 3월 18일자 부산일보 신문. 자료 양산시
농지 잃고 소작농 전락…‘8할 소작료’ 고통받아
이에 조합은 ‘소작료 4할 감액’ ‘지세는 지주 부담’ 등 소작제도 정상화를 요구했다. 하지만 일본 대지주들 신고로 조합 간부들이 경찰에서 조사를 받는 일이 이어졌다고 한다. 그러다 양산농민조합 시위 사건 이후 농민 100여명이 부산형무소에 구금되고, 조합 간부 16명 가운데 약 절반이 옥고를 치르면서 조합 활동이 중단됐다.
이 시위를 이끌었던 사회운동가 전병건 선생과 김외득 선생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당시 사망했던 윤복이 선생은 이듬해(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다. 이와 함께 김장호·김태근·정진영·최달수·한동선 선생 등이 그동안 독립유공자로 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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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도청. 사진 경남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