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작료 인하" "구금 농민 석방" 하며 투쟁한 소작농...독립유공자 서훈

제106주년 3·1절을 맞아 경남에서 일제 수탈과 폭압에 맞섰던 소작농들이 독립유공자로 훈장이나 표창을 받았다.

1932년 3월 18일자 부산일보 신문에 실린 경남 양산경찰서 당시 모습. 자료 양산시

1932년 3월 18일자 부산일보 신문에 실린 경남 양산경찰서 당시 모습. 자료 양산시

‘소작료 인하’ 외쳤는데…농민 구금한 일제에 반발

28일 경남도 등에 따르면 오는 1일 국가보훈부는 양산농민조합 시위 사건에 참여한 윤수만 선생에게 건국훈장 애족장, 강만수·안상수·양명호·이계득·이만춘·이희우·임수만·함성관·신영업 선생에게 대통령 표창을 준다. 당시 시위를 주도했던 인물 중 한 명인 윤 선생은 일본 경찰에 붙잡혀 징역 1년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강 선생 등 9명도 벌금형을 받거나 구류됐다.

이 사건은 1932년 3월 16~17일 일어난 농민 투쟁이다. 16일 양산농민조합 소속 조합원 수백명은 양산사회단체회관에서 제3회 정기대회를 열고, 읍내 주변을 행진하며 시위했다. 소작료 인하 등을 요구했다. 하지만 일본 경찰은 시위 군중을 해산하고, 주동자였던 조합 간부 등 16명을 붙잡아 양산경찰서 유치장에 구금했다.

같은 날 윤 선생 등은 ‘구금 인사 석방 투쟁’을 전개했다. 조합원과 구금된 조합원 가족 등 300여명이 ‘일제 경찰이 이유 없이 농민을 구속한 뒤 석방하지 않는다’며 석방 촉구 집회를 열었다. 다음 날(17일) 새벽에는 양산경찰서 유치장을 습격, 구금 인사를 빼내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실패하고 경찰에 붙잡혔다. 이 과정에서 농민 2명이 경찰이 쏜 총탄에 숨을 거두기도 했다.

양산농민조합원 등이 당시 경남 양산경찰서를 습격한 사건을 보도한 1932년 3월 18일자 부산일보 신문. 자료 양산시

양산농민조합원 등이 당시 경남 양산경찰서를 습격한 사건을 보도한 1932년 3월 18일자 부산일보 신문. 자료 양산시

농지 잃고 소작농 전락…‘8할 소작료’ 고통받아

윤 선생 등이 소속된 양산농민조합은 일제가 조선 토지와 자원을 수탈할 목적으로 만든 국책회사인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지주 횡포에 맞서 1931년 4월 결성된 단체다. 당시 많은 농민은 일제의 토지조사사업(1910~1918년)으로 경작지를 잃고 소작농으로 전락했다. 특히 8할에 달했던 높은 소작료로 고통을 받았다고 한다.


이에 조합은 ‘소작료 4할 감액’ ‘지세는 지주 부담’ 등 소작제도 정상화를 요구했다. 하지만 일본 대지주들 신고로 조합 간부들이 경찰에서 조사를 받는 일이 이어졌다고 한다. 그러다 양산농민조합 시위 사건 이후 농민 100여명이 부산형무소에 구금되고, 조합 간부 16명 가운데 약 절반이 옥고를 치르면서 조합 활동이 중단됐다.

이 시위를 이끌었던 사회운동가 전병건 선생과 김외득 선생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당시 사망했던 윤복이 선생은 이듬해(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다. 이와 함께 김장호·김태근·정진영·최달수·한동선 선생 등이 그동안 독립유공자로 상을 받았다.

경남도청. 사진 경남도

경남도청. 사진 경남도

경남도 “훈장 받을 수 있도록 최선”

이날 경남도는 “일제에 항거한 독립운동가 10명이 함께 상을 받는 영예를 얻었다”고 밝혔다. 이들 10명 중 윤 선생을 포함한 9명은 도가 직접 서훈 신청해 전원이 추서됐다. 이번에 전국에서 독립유공자로 서훈된 독립운동가 96명 중 경남 출신이 18명으로 가장 많았다. 김맹숙 도 복지정책과장은 “서훈을 받지 못하는 사례가 한 분도 발생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노력하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