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육첩방은 남의 나라,/시인이란 슬픈 천명인 줄 알면서도/한 줄 시를 적어 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보내 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대학 노트를 끼고/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러 간다.’
1942년 6월 3일, 윤동주(1917~1945)가 남긴 ‘쉽게 씌어진 시’의 배경인 릿쿄(立教)대다. 절제와 겸손, 금욕을 앞세운 창립자 채닝 무어 윌리엄스 선교사의 유지를 150년간 지켜온 이 대학이 올가을, 윤동주 기념비를 세운다. 자그맣게 세운 창립자 동상 이외에 릿쿄대가 교정에 특정인을 위한 기념비를 세우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릿쿄대는 왜 윤동주 기념비를 세우기로 했을까. 지난 26일 일본 도쿄 니시이케부쿠로(西池袋) 릿쿄대에서 니시하라 렌타(西原廉太·62·일본성공회 중부교구 주교) 총장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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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도쿄 릿쿄대에서 지난 23일 열린 일제강점기 저항시인 윤동주 80주기 추도 행사에서 니시하라 렌타 릿쿄대 총장이 '내가 윤동주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이유'를 주제로 강연하고 있다. 윤동주는 1942년 4월부터 반년간 릿쿄대에서 공부했고, 이후 교토 도시샤대에 편입했다.연합뉴스
니시하라 총장이 한국어로 인사한다. 유창했다. 한눈에도 수십 장은 족히 넘어 보이는 자료를 들고 있었다. 모두 윤동주에 관한 것이다. 자리에 앉자마자 기념비 설립 얘기를 꺼냈다. 그의 말이다. “한강씨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했지 않나. 한국 최초다. 만약 윤동주가 살아있었다면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타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설립 배경을 묻자 그는 ‘특권’이라고 했다. “윤동주가 릿쿄대에 존재했다는 것의 의미, 졸업은 하지 않았지만 재학생으로 있었다는 것 자체가 우리 릿쿄대의 특권”이라는 것이다. 그는 “윤동주를 기념할 수 있는 대학으로서 신중히 고민해왔다”며 “대학이 책임감을 갖고 올가을 기념비 설립을 위한 준비를 하고 있다. 장소와 형태 등 여러 아이디어가 있는데 ‘쉽게 씌어진 시’처럼 릿쿄대 원고용지에 쓴 시를 재현할 수 있다면 좋겠다”고 말했다.

일제강점기 저항시인인 윤동주 시인이 다닌 일본 릿쿄대. 릿쿄대는 윤동주 시인의 80주기를 맞아 올 가을 기념비를 건립한다. 김현예 특파원.
릿쿄대와 인연을 맺은 것은 일본의 진주만 공습 이후인 1942년 4월의 일이다. 학교 인근의 ‘육첩방’에 살며 문학부 영문학과 학생으로 같은 해 가을 교토에 있는 도시샤(同志社)로 편입할 때까지 이곳에서 반년을 공부했다. 짧다면 짧은 기간이었지만 윤동주는 릿쿄대 상징인 백합 로고가 새겨진 원고지에 ‘흰 그림자’(1942년 4월 14일), ‘흐르는 거리’(5월 12일), ‘사랑스런 추억’(5월 13일) 등 5편의 시를 남겼다. 당시 사용이 금지된 조선어로 쓴 5편은 운 좋게도 친구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지금껏 전해지고 있다. 1943년 항일 운동을 했다는 혐의로 교토에서 체포된 윤동주는 해방 6개월을 앞둔 1945년 2월 16일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했다. 27살의 일이었다.
릿쿄대에선 여전히 윤동주의 흔적을 느낄 수 있다. 동양철학 수업을 들은 것으로 알려진 강의실, 지금은 전시관으로 변신했지만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도서관이 그렇다. 니시하라 총장은 “릿쿄대 맞은편에 성공회 신학교가 있었는데 윤동주 시인이 그곳에서 신학 수업도 들었다”고 소개했다. 망국의 아픔 속 윤동주 시인이 의지했던 교목(校牧) 다카마쓰 다카하루(高松孝治·1887~1946) 신부와 만났던 채플(학교 예배당)도 그대로다. 다시 기념비 얘기로 돌아갔다.

지난 2월26일 일본 도쿄 이케부쿠로 릿쿄대 캠퍼스에서 니시하라 렌타 릿쿄대 총장이 중앙일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현예 특파원.
“시인의 모교인 연세대엔 기념관이 있고, 도시샤대엔 시비가 있다. 릿쿄대도 윤동주 시인을 소중히 여기며 다양한 형태로 윤동주 시인을 기려왔다. 전시관엔 릿쿄대 원고지에 쓴 윤동주의 시를 전시하고 있다. 원본은 연세대에 있지만 릿쿄대에서 집필한 작품을 열람할 수 있도록 해놨다. 2010년부터는 윤동주 국제교류장학금을 한국인 유학생에게 매월 5만 엔(약 47만원)을 지원하고 있다. 올해로 15년째다. 기념비 설립을 바라는 학생들 목소리도 있어 매년 윤동주 추모회가 열릴 정도로 열기는 뜨거웠다. 하지만 역시 쉽지는 않았다.”
-특별한 이유라도.
“(학교를 세운) 윌리엄스는 ‘뜻(道)은 가르치지만 자기 자신에 대해선 전하지 말라’고 할 정도로 겸손하며 절제된 금욕적인 철학을 갖고 있었다. 창립자이면서도 자신의 원고도 하나 남기지 않고 모두 태워버릴 정도였다. 그 때문에 건물에 특정인 이름을 붙이는 것조차 릿쿄대는 꺼려왔다. 1호관, 2호관, 3호관으로 불러올 정도로 절제를 강조하다 보니 기념비 설립에 신중했다. 지금은 학교 예배당 앞에 윌리엄스 동상이 있는데 (윌리엄스 선교사가) 만약 보게 된다면 비명을 지르면서 ‘빨리 없애라’고 할 거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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릿쿄대는 전시관으로 변한 옛 도서관에 윤동주 시인의 육필 원고 사본과 그가 릿쿄대에서 한국어로 남긴 5편의 시를 소개하고 있다. 김현예 특파원.
“올해는 윤동주 시인의 순국 80주년이 되는 해다. 다양한 각도에서 기념비를 설립하자는 판단을 내렸다. 최근 윤동주 시인에게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한 도시샤대와 함께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고 한·일 양국 간 우호의 상징으로 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교육적인 의미도 있다. 윤동주 작품을 통해 윤동주의 세계관과 문학관을 학생들이 알기를 바란다. 많은 릿쿄대 학생들이 교환학생으로 한국 유학을 간다. 그런데 ‘선배’인 윤동주를 모른다고 하면 부끄럽지 않겠나.(웃음) 한국어로 윤동주를 말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나. 역으로 한국에서도 210명에 달하는 유학생들이 릿쿄대로 공부하러 온다. 릿쿄대를 선택한 이유 중 하나가 윤동주가 배운 곳이어서라고 한다. 윤동주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장소가 있다면, 릿쿄에서 배우는 의미가 더해지지 않겠나.”
그는 최근 윤동주 시인의 80주기를 맞아 추모 예배를 겸한 시낭송회와 함께 별도 강연을 하기도 했다. 주제는 ‘내가 윤동주를 소중히 생각하는 이유’. 그는 이 강연에서 그는 일본의 침략과 지배에 대한 사죄, 진정한 화해를 요청한 일본 성공회의 ‘전쟁 책임에 관한 선언’을 언급했다. 그가 강연 자료를 건넸다. 1996년의 선언문 요지가 굵은 글씨로 표시돼 있다. ‘일본 성공회는 전후 50년이 지난 지금, 전쟁 전 전쟁 중 일본에 의한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을 지지·묵인한 책임을 인정하고 그 죄를 고백합니다.’ 그는 강연에서 “국제적 교류를 갖고 있는 교회임에도 불구하고 침략전쟁 가해자인 국가의 모습에 대해 눈을 뜨지 못했다”며 “타민족 지배와 전쟁 협력을 그리스도교 이름으로 긍정했다”고도 했다.
-윤동주를 어떻게 알게 됐나.
“자이니치(在日) 코리안 친구인 야와타 아키히코(八幡明彦) 덕에 교토대 재학 시절 처음 윤동주를 알게 됐다. 한국어는 학창시절부터 우정을 쌓은 동갑내기 장윤재 이화여대 신학대학원장 덕에 공부하게 됐다. 야와타와는 교토에서도 자이니치 코리안이 많이 사는 지역에서 여러 활동을 함께 했다. 윤동주를 처음으로 가르쳐준 친구인데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이 발생한 뒤 자원봉사 활동을 하다 교통사고로 세상을 떴다.”
그의 애송시는 서시(序詩)와 십자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일본어로 번역한 서시를 읽어 내려갔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잎새에 이는 바람에도/나는 괴로워했다’ 그는 “서시는 특히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한다”며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어야 한다는 말의 함의, 양심에 부끄러움이 없어야 한다는 그의 신앙에 큰 울림을 받았다”고 했다.

일본 도쿄 릿쿄대에서 지난 23일 일제강점기 저항시인 윤동주 80주기를 맞아 추도 예배가 열리고 있다. 연합뉴스,
“일·한 관계, 한·일관계도 중요하지만 정치적인 문제를 넘어서야 한다. 예컨대 니시하라 렌타와 장윤재가 그렇다. (양국 국민이) 서로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고 이름을 불러주는 사이가 되어야 한다. 내가 한국어를 조금이라도 배워야겠다고 생각한 것도 윤재와 한국어로 말하고 싶다고 생각한 데서 비롯됐다. 서로 한국과 일본의 문화·역사·언어를 알게 되면서 렌타와 윤재라는 관계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미래를 말할 수 있는 사이가 됐다.”
이야기는 다시 윤동주로 흘렀다. “예를 들면 윤동주가 왜 27살에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죽어야만 했는지, 일본인으로서는 그 역사적인 배경을 확실히 배울 필요가 있다”며 “우리가 지금 어디에 서 있으며, 어떤 인연이 있고, 어떤 역사 속에 있는지를 제대로 공부한 뒤에 서로의 문화를 알아야만 한다. 그래야 마지막에 서로 이름을 불러줄 수 있는 인연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했다. 그러곤 니시하라 총장은 “릿쿄대 학생들이 중요한 역사적인 존재로서 ‘윤동주 선배’, ‘윤동주 형’을 알게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