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지난 1월 초 과학기술 협력에 제한을 가하는 ‘민감국가 리스트(Sensitive Country ListㆍSCL)’에 동맹국인 한국을 포함한 사실을 공식 확인해 정치ㆍ외교ㆍ경제ㆍ과학기술 등 여러 영역별로 큰 파장이 일고 있다. 한ㆍ미 간 에너지ㆍ과학 협력은 물론 양국 동맹 관계에도 부정적 리스크가 커졌다. 그럼에도 한국 정부는 이 사실을 두 달 가까이 까맣게 몰랐다가 최근에야 경위 파악에 분주한 모습이다. 정보 수집 및 대응 체계에 큰 구멍을 드러냈다.
미국 에너지부는 14일(현지시간) 한국의 민감국가 포함 여부에 대한 중앙일보 질의에 “전임 (조 바이든) 정부는 1월 초 한국을 민감국가 리스트 최하위 범주인 ‘기타 지정 국가(Other Designated Country)’에 추가했다”고 밝혔다. 에너지부는 국가 안보, 핵 비확산, 테러 지원 등 우려가 있는 국가를 민감국가로 지정하는데 ▶테러 지원 국가(북한ㆍ이란ㆍ시리아 등) ▶위험 국가(중국ㆍ러시아 등) ▶기타 지정 국가 등으로 분류한다.
에너지부 산하 정보 기구인 정보방첩국(OICI)이 관리하는 민감국가 리스트에 오르면 에너지부와 산하 17개 국립연구소 정보나 연구 등 접근에 제약이 따른다. 원자력ㆍ인공지능(AI) 등 첨단 분야에서 한ㆍ미 간 과학기술 이전 및 협력이 어려워지는 셈이다. 에너지부는 “리스트에 올랐다고 해서 반드시 미국과 적대적 관계라는 것을 의미하진 않는다”며 “미국인이나 에너지부 직원의 해당 국가 방문ㆍ거래가 금지되는 것은 아니며 해당 국가 국민의 에너지부 방문도 금지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다만 “방문과 협력이 필요할 경우 사전에 내부 검토를 거친다”고 했다.
에너지부 산하 연구소들에는 ‘방문 6주 전 사전 승인’이 필요한 민감국가에 한국이 포함된 사실이 공지됐다고 한다. 사전 검토 및 사후 보고 등 장치를 두어 보안을 강화하겠다는 의미다. 교류와 협력 자체를 금지하는 것은 아니지만 위축은 불가피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미 과학기술계 인사들 사이에선 첨단 분야 주요 연구에서 한국이 엄격한 인증 절차를 거쳐야 하고 경우에 따라 한국이 배제될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가 나온다. 원자로 수출에 타격이 예상된다는 우려도 있다.
구체적 지정 사유는 에너지부가 공개하지 않아 몇 가지 추측이 나올 뿐이다. 일각에서는 12ㆍ3 비상계엄 이후 한 달이 지난 시점이란 측면에서 한국의 정정(政情) 불안이 이유일 것이란 분석이 제기된다. 하지만 에너지ㆍ환경ㆍ원자력 문제를 관장하는 에너지부가 외국의 내부 정치 상황을 평가하고 요주의 국가 대상에 올리는 것은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반론이 나온다.
그보다는 한국 내 점증하는 독자 핵무장 논의와 관련 있을 거란 분석이 더 설득력을 얻고 있다. 핵 비확산 주무 부처인 에너지부가 관장하는 민감국가 리스트에 미국의 핵심 동맹국인 이스라엘을 비롯해 인도ㆍ파키스탄 등 ‘사실상 핵보유국’으로 분류되는 나라들이 올라 있다는 점이 이런 관측을 뒷받침한다. 윤석열 대통령이 2023년 1월 자체 핵 보유 가능성을 언급하자 당시 바이든 행정부는 “한ㆍ미 동맹의 핵심은 비핵화”라며 강한 우려를 표명한 적이 있다.
크리스 라이트 미국 에너지부 장관이 지난 10일(현지시간) 텍사스주 휴스턴에서 열린 S&P 글로벌 에너지 컨퍼런스 ‘세라위크’에서 연설하고 있다. AP=연합뉴스
그럼에도 지난해 11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 이후 한국 정치권 등을 중심으로 독자적 핵무장론이 더 확산하는 흐름을 보이자 바이든 행정부가 물러나기 직전 민감국가 지정이라는 제동 장치를 둔 것 아니냐는 분석이다. 패트릭 크로닌 허드슨연구소 아시아태평양 안보석좌는 중앙일보 서면 인터뷰에서 “바이든 정부는 한국이 독자적 핵무기 프로그램을 가능하게 하는 조치들을 고려하고 있다고 생각한 것 같다”며 “한국의 핵무기 능력에 대한 트럼프 행정부의 지원 가능성을 미리 차단하고 싶었을 수 있다”고 분석했다.
미 군사전문 싱크탱크 랜드연구소의 브루스 베넷 선임연구원도 “한국의 자체 핵무기 개발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는 정보 공유를 막기 위해 시작한 조치일 수 있다”고 중앙일보에 말했다.
외교부는 한국이 다시 민감국가에 지정된 데 대해 “정부는 이번 사안을 엄중하게 보고 있으며 미 정부 관계 기관들과 긴밀하게 협의 중”이라며 “한ㆍ미 간 에너지, 과학기술 협력에 부정적 영향이 미치지 않도록 적극 교섭해 나가겠다”고 했다. 문제는 두 달 가까이 관련 정보를 파악하지 못해 손을 놓고 있었다는 점이다. 조태열 외교부 장관은 지난 11일 국회에서 “최근 비공식 경로를 통해 알게 됐다. 경위 등 여러 가지를 지금 파악 중”이라고 말했다. 중대 사안을 놓고 동맹 관계인 미국과 한국 정부 간에 사전 협의도, 공식 소통도 없었다는 얘기다. 주미대사관을 비롯한 외교 당국은 그간 뭘 하고 있었느냐는 비판이 나오는 대목이다.
조태열 외교부장관이 지난 11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외교통일위원회 전체회의에 출석해 의원 질의에 답하고 있다. 뉴스1
한국 정부 관계자는 “오는 4월 15일 민감국가 지정이 공식 발효되기 전에 물밑 협의를 통해 최대한 시정을 하려 한다”고 말했다. 그가 말하는 ‘시정’은 ‘지정 해제’를 뜻한다. 하지만 이미 상당 기간 검토 끝에 취한 조치여서 되돌리기에는 적잖은 시간과 외교적 비용이 들 가능성이 크다.
한ㆍ미 간 동맹 질서에도 상당한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데이비드 맥스웰 아시아태평양전략센터 부대표는 “이번 조치로 한ㆍ미 동맹에 대한 신뢰와 믿음을 약화시킬 것을 우려한다”며 “트럼프 행정부의 동맹 전문가들이 이번 조치를 바로잡기를 바란다”고 중앙일보에 말했다. 여러 모로 뼈아픈 얘기들이다. 지금부터라도 정부 당국은 비상한 각오로 외교 역량을 풀가동해 지정 해제를 이끌어내야 한다.
워싱턴=김형구 특파원 kim.hyounggu@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