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AFP=연합뉴스
미국과 러시아가 에너지·인프라 분야에 대한 30일간의 휴전에 합의했다. 전쟁 당사국인 우크라이나는 수용 의사를 밝히면서도 “전쟁을 질질 끌려는 러시아의 꼼수”라고 비난했다. 사실상 러시아의 입장을 대폭 수용한 형태의 합의에 대해 유럽 역시도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
이번 휴전안은 표면적으로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모두 한 발 후퇴한 형식을 취했다. 30일간의 전면 휴전을 내건 미국과 휴전에 미온적인 러시아가 각자 절충한 모양새다. 러시아 크렘린궁은 “대화 도중 트럼프가 에너지 인프라에 대한 상호 공격 중지를 제안했다”며 미국이 먼저 양보안을 내놨다고 밝혔다.
우크라이나전의 전선 전체를 보면 러시아가 공세를 보이고 우크라이나가 후퇴하는 국면에 있다. 우크라이나가 지난해 8월 감행한 러시아 쿠르스크 방면 진격의 경우도 우크라이나가 점령했던 요충지를 도로 러시아에 내주며 무위로 돌아가고 있다.
그러나 에너지와 인프라 분야만 보면 다르다. 겨울 추위를 이용하기 위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에너지 시설에 집중 타격을 가했지만, 우크라이나 역시도 러시아의 석유 및 가스 시설을 집요하게 공격하는 중이었다. 뉴욕타임스는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의 주요 자금원(석유와 가스)을 위험에 빠뜨리고 있었다”며 “(이번 휴전안에) 러시아도 안도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두 정상의 통화 후 발표된 내용에도 “에너지와 인프라”(미 백악관), “에너지 인프라”(러 크렘린궁)로 차이가 있다. 에너지 시설 외에 도로‧철도 등 인프라 시설도 휴전 대상인지가 모호하다. 러시아 측의 발표를 따르면 30일간 휴전의 범위가 더 축소된다.
크렘린궁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무기와 정보 지원을 중단하라고 미국에 요구했다”고 밝혔지만, 트럼프는 푸틴과 통화 직후 언론 인터뷰에서 “우리는 지원 중단 여부에 대해 논의하지 않았다”며 부인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18일 군부대를 방문한 모습. AFP=연합뉴스.
휴전인 듯 휴전이 아닌 타협안에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18일 “푸틴은 사실상 전면 휴전 제안을 거부했다”며 “전쟁을 질질 끌려는 푸틴의 시도에 맞서야한다”고 불만을 터뜨렸다. 다만 이튿날인 19일에는 “오늘 트럼프와 연락하겠다. 협상팀을 파견할 준비가 돼 있다”고 했다.
러시아는 트럼프와 푸틴의 통화가 끝난 직후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에 드론 공격을 단행했다.
지상전이 제외된 일시 휴전안을 두고 유럽은 비판적 입장을 보였다. 독일의 주간지 슈피겔은 “푸틴이 시간을 벌었다”고 평가했다. 종전 협상시 현재 전선을 기준으로 영토를 정리할 가능성이 큰 상황에서 이번 협상으로 러시아는 명분은 쌓으면서도 공세 우위를 손에서 놓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푸틴이 전면 휴전의 조건을 사실상 공식화했다는 분석도 나온다. 이번 통화에서 푸틴은 우크라이나 군대의 재무장 및 군사 동원 금지를 요구했다. 또 “위기의 근본원인 제거와 안보분야에서 러시아의 이익 재고”도 내걸었는데, 우크라이나의 나토(NATO) 가입 불허와 동유럽에서 나토군 철수를 뜻하는 것으로 유럽 언론은 분석했다. 프랑크푸르터알게마이네차이퉁(FAZ)은 “푸틴은 전쟁을 끝낼 생각이 없다는 것을 보여준 합의”라고 짚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 올라스 숄츠 독일 총리가 18일 만나 악수를 나누고 있다. AFP연합뉴스.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와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18일 공동 기자회견에서 “완전한 휴전이 목표지만, (이번 휴전안은) 중요한 첫 단계이지만”라고 어정쩡한 환영 입장을 밝혔다.
유럽은 독자적인 부국강병의 길을 향해 가고 있다. 독일 의회는 이날 국가부채를 제한한 헌법 규정에서 국방비를 예외로 하는 개헌안을 통과시켰다. 상원에 해당하는 참사원 동의와 대통령 승인을 거치면 독일은 앞으로 국방비를 무제한으로 늘릴 수 있게 된다.
프랑스 역시 핵우산을 유럽에 제공하겠다고 최근 밝힌데 이어 18일에는 핵무기 강화 계획을 발표했다. 독일의 차기 총리로 유력한 프리드리히 메르츠 기독민주당 대표는 “(프랑스의 핵우산 제공이) 독일의 이익에 부합한다”고 말했다.

독일의 차기 총리로 유력한 프리드리히 메르츠 기민당 대표가 의회에서 손을 들고 있다. 18일 독일 의회는 무제한 국방비 운영이 가능한 헌법개정안을 통과시켰다. AFP연합뉴스
이번 합의안이 완전히 성과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두 정상이 핵무기 비확산에 협력키로 하면서 핵군축 협상이 재개될 가능성이 열렸다. 핵군축 협상이 재개되면 경우에 따라 북한의 핵협상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미국과 러시아는 23일 사우디아라비아 제다에서 우크라이나전 휴전 논의를 이어갈 예정이다. 트럼프와 푸틴이 정상 통화에서 ‘흑해 해상에서의 휴전 이행, 전면적 휴전 및 영구 평화에 관한 기술적인 협상’을 하기로 합의한데 따른 후속절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