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염장이’ 유재철 대표가 본 삶과 죽음

유재철 대한민국장례문화원 대표가 중앙SUNDAY와 인터뷰에서 30년 장례지도사를 하며 느낀 삶과 죽음의 의미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최영재 기자
30년 넘게 장례지도사의 길을 걸어온 유재철(66) 대한민국장례문화원 대표는 자신을 ‘염장이’로 소개했다. 그는 “과거엔 장례지도사를 염사 혹은 염쟁이로 불렀다”며 “염쟁이는 업을 비하하는 것 같아 장인이란 뜻을 담아 명함에 염장이로 새겼다”고 설명했다. 그는 ‘대통령 염장이’로도 불린다. 최규하·전두환·노태우·김영삼·김대중·노무현 등 전직 대통령 6명의 장례가 그의 손을 거쳐 치러졌다. 이건희 전 삼성 회장과 이맹희 전 CJ그룹 명예회장도 그가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명망가뿐만이 아니다. 일을 시작한 1994년부터 지금까지 4000명 넘는 필부필부를 떠나보냈다.
지난해 1000만 관객을 모은 영화 ‘파묘’에서 장의사 역을 맡은 유해진의 실제 모델로 알려진 그는 지난 12일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 ‘숨’에선 직접 출연도 했다. 그는 영화의 마지막 내레이션에서 “유명했던 사람도, 유명하지 않았던 사람도, 떵떵거리며 위세를 떨치던 사람도, 우리 같이 평범한 사람도 마지막은 결국 좁은 관속이 내 자리”라고 읊었다. 30년 넘게 생사의 경계에 서 있는 유 대표를 만나 삶과 죽음에 대해 물었다.
영화 ‘파묘’ 유해진 배역 실제 모델
![유재철 대한민국장례문화원 대표가 2010년 3월 법정 스님 다비식. [사진 유재철]](https://pds.joongang.co.kr/news/component/joongang_sunday/202503/22/8e8dddde-fffb-4e4a-9351-5bf0781ff3f2.jpg)
유재철 대한민국장례문화원 대표가 2010년 3월 법정 스님 다비식. [사진 유재철]
염장이 역할은 무엇인가.
“염습(殮襲)하는 일이다. 사망하면 우선 수시(收屍)를 한다. 임종 후 보통 3시간이 지나면 사후경직이 오는데 그 전에 고인의 옷과 몸을 바로잡는 절차다. 병원에서 돌아가시면 안치실, 집에선 윗목에 병풍을 쳐놓고 모신 뒤 이튿날 염을 한다. 얼굴과 머리를 만지고 가볍게 화장도 한다. 30분가량 모든 과정이 끝나면 유족들이 고인 얼굴을 보며 마지막 인사를 나눈다. 이후 입관과 결관 절차를 거쳐 고인을 안치실까지 모시는 게 내 일이다.”
일하며 무섭다는 생각은 안 드나.
“죽음의 현장이 내겐 곧 삶의 터전이다. 사업이 망해 방황하고 있을 때 장의사를 하면 돈을 벌 수 있다는 친구 말에 나도 따라갔다. 처음엔 일이 별로 없어 유족들과 장례 내내 함께 먹고 자고 했다. 본인들이 손도 못 대는 걸 정성스레 해드리니 고맙다는 인사도 많이 받았다. 유족들 말이 살아계실 때 부모 대소변은 받아도 돌아가신 뒤 만지기는 참 어렵다고 하더라. 시체를 만지는 일이 천하다는 선입견을 받을 때도 있었지만 유족들이 진심 어린 감사를 전할 때면 큰 보람도 느낀다.”
사찰 장례를 많이 주관했는데.
“1994년 조계사 건너편에서 장의사를 시작해 불교도들 장례를 많이 치렀다. 1996년 서경보 스님이 돌아가셨을 때 7일장을 치렀는데 큰스님 장례 봉행은 처음이라 스님들께 야단맞아가며 불교 장례에 대해 많이 배웠다. 스님이 돌아가시면 다비를 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고 비용도 많이 들었다. 그래서 전통식 다비를 현대적으로 계승한 방식을 개발해 특허를 받기도 했다. 이후 법정 스님 등의 다비식을 치르며 소문이 났는지 스님들이 돌아가실 때마다 연락이 왔다. 지금은 전국 사찰 장례의 90%는 내가 맡고 있다.”
역대 대통령들의 장례를 맡은 계기는.
“대통령 장례를 많이 치르니 ‘정치권에 아는 사람이 있는 것 아니냐’는 오해도 많이 받았는데 전혀 아니다(웃음). 뒤늦게 일을 하게 되니 모르는 게 많더라. 잘한다고 입소문이 난 전국의 장의사들을 쫓아다니며 일을 배웠다. 계속 공부해야겠다 싶어 마흔 넘어 장례문화학 석사를 하고 쉰이 넘어 박사 과정을 밟았다. 현장도 최대한 많이 보려고 했다. 그러던 중 최규하 전 대통령이 서거했다는 소식이 들리길래 서울대병원으로 달려갔는데, 대통령 장례가 흔치 않은 일이다 보니 공무원들도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도와드릴 수 있다’며 나섰다.”
그래도 계속 맡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 타계 소식이 전해졌을 때 나는 전날 돌아가신 여운계 선생님 염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염이 끝나자마자 서울역으로 가서 부산행 기차를 탔다. 대통령이라서가 아니라 누구든 부고가 들리면 먼저 달려가는 게 몸에 배어 있어서였다. 가는 길에 담당 부처에서 전화가 오더라. 이미 내려가고 있다고 하니 놀라는 눈치였다. 나보다 더 훌륭한 장례지도사도 많지만 더 빠르게 행동하는 사람이 없었던 것 같다.”
![2015년 11월 김영삼 전 대통령 국가장 때 운구 행렬 바로 옆에서 장례 지도를 하고 있다. [사진 유재철]](https://pds.joongang.co.kr/news/component/joongang_sunday/202503/22/1c4fbf36-f8ad-4566-b5d4-ca8482d36303.jpg)
2015년 11월 김영삼 전 대통령 국가장 때 운구 행렬 바로 옆에서 장례 지도를 하고 있다. [사진 유재철]
기억에 남는 장례가 있다면.
“20년 전쯤 연락을 받고 가보니 환갑이 채 안 된 분이 몸을 잔뜩 웅크리고 주먹을 꽉 쥔 채 숨져 있었다. 인상을 잔뜩 쓴 얼굴을 보자마자 임종 직전까지 고통에 시달리다 가셨구나 싶었다. 죽는 순간의 표정은 얼굴에 그대로 남는다. 알고 보니 서울에 빌딩과 집 몇 채를 갖고 있던 기업 회장님이었다. 말기암 환자였는데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해 화풀이만 하다 가셨다고 했다. 어떤 이는 죽음을 받아들이는 걸 넘어 ‘맞이하는’ 단계에 이르기도 하는데 이 분은 삶의 마지막 결실을 얻을 기회를 놓친 것 같았다.”
맞이하는 죽음은 어떤 것인가.
“2010년 돌아가신 법정 스님을 수습하기 위해 길상사를 찾았을 때 나도 모르게 스님을 흔들어 깨울 뻔했다. 단잠에 빠진 듯 평온하고 맑은 표정이었다. 죽음 앞에서 의연한 사람이야말로 도인이란 생각이 절로 들었다. 법정 스님은 ‘번잡한 데서 장례 치르지 말고, 입던 거 입고, 조용한 데 가서 화장하고 다비하라’는 유지를 남겼다. 돌아가시는 날까지 ‘무소유’를 행하신 법정 스님을 보며 잘 사는 것만큼 잘 죽는 것도 중요하다는 걸 다시금 절감했다.”
대통령이든 누구든 부고 들리면 달려가
날마다 타인의 죽음을 보는 그이지만 그게 자기 일이 될 거라고 여긴 적은 없었단다. 그러다 10년 전 장례를 치르고 오는 길에 차가 전복되는 큰 사고를 겪은 뒤 그도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게 됐다고 했다. 한국의 장례 문화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이때부터였다. 그는 “시신을 처리하는 과정만 있고 제대로 된 식(式)이 없는 게 현실”이라며 아쉬워했다.
장례식장 절차에 따르는 건 식이 아닌가.
“유족들이 장례식에 참석해도 정작 고인의 삶에 대해 얘기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미국에선 관 뚜껑을 열어두고 고인을 회고하는 시간을 갖는다. 일본에서도 유족들이 방에 모여 앉아 고인을 추모하며 슬픔을 삭인다. 이처럼 외국에선 장례식이 고인을 중심으로 치러진다면 우리 장례식엔 고인은 없고 산 사람만 있을 뿐이다.”
아무래도 우리 정서상 고인과 함께하는 장례는 여전히 낯설기 때문이 아닐까.
“대통령과 대기업 총수만 위대한 삶을 산 게 아니다. 평범한 사람들도 저마다 위대한 삶을 살았다. 한평생 열심히 살아온 고인을 위해 단 30분이라도 제대로 된 장례식을 치르면 어떨까. 장례 문화를 바꾸고 싶다는 생각에 2014년 장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직접 애도식을 기획했다. 발인 전날 저녁 8시에 애도식이 열리니 조문을 원하면 시간에 맞춰 와달라고 공지했다. 가족과 지인이 모인 자리에서 아내가 어머니의 생애를 읊었다. 한 여인의 길고 사연 많은 일생이 스쳐 지나가는 시간이었다.”
유 대표는 “애도식에 참석한 사람 중에 자기 부모님 보내드릴 때도 이렇게 해달라고 부탁하는 이가 적잖았다”며 “나 역시 딸에게 ‘내가 죽거든 빈소에 가수 이장희의 ‘한 잔의 추억’을 은은하게 틀어달라고 부탁해 뒀다”고 소개했다.
죽음을 잘 맞이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대개 열심히 산 사람이 잘 죽는 것 같다.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최선을 다해 사는 게 중요하다 싶다. 언젠가는 죽는다는 걸 늘 기억하라는 ‘메멘토 모리’라는 말도 있지 않나. 스티브 잡스도 17세 이후 ‘오늘이 일생의 마지막’이라고 여기며 살았다고 한다. 많은 이들은 죽음이 두려워 외면하지만 직시하면 오히려 배우는 게 더 많다. 가장 좋은 장소는 상갓집이다. 봉투 놓고 잡담만 하다 오지 말고 내 사후에 대해 한번쯤 고민해 보면 좋겠다.”
인터뷰를 마칠 즈음 그는 “엔딩 노트를 쓰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추천했다. “가족과 친한 지인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을 차곡차곡 쓰는 거다. 그러면서 의지가 되지 않는 사람과 덜 중요한 일부터 하나씩 지워가다 보면 내게 정말 소중한 사람과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죽음을 담담하고 의연하게 받아들이면 삶 또한 더욱 풍성하고 충실해지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