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해 봉황동 유적 출토 추정 의례용 유물 일괄. 사진 국립가야문화유산연구소
이 그릇은 ‘목이 긴 옻칠 굽다리 접시’라 불린다. 한자로 콩 두(豆)자를 닮아 옻칠 두형 그릇라고도 한다. 지난해 말 ‘김해 봉황동 유적’ 제10차 발굴조사에서 무더기로 나온 목기 300여점 가운데 하나다. 옻칠 두형 그릇만 15점에 이른다. 그간 기원전 1세기부터 기원후 1세기까지 일부 수장층 무덤에서 한두점 나왔는데, 특히 위·아래 목재를 이어 붙여 만든 게 아니라 통으로 깎은 건 처음 출토됐다.

김해 봉황동 유적 출토 옻칠 두형 그릇(목이 긴 옻칠 굽다리 접시). 사진 국립가야문화유산연구소

김해 봉황동 유적에서 발굴된 옻칠 두형 그릇( 목이 긴 옻칠 굽다리 접시)의 원형을 추정해 제작한 재현품이 24일 국립가야문화유산연구소에서 공개되고 있다. 강혜란 기자

김해 봉황동 유적 출토 항아리 모양 목제품. 사진 국립가야문화유산연구소
이날 공개된 출토품들은 맨눈으로 봐도 상태가 뛰어나고 형태 역시 다채로웠다. 항아리 모양 목제품은 다리 받침까지 거의 완벽하고 새 모양 목제품은 반달 같은 몸통에 고개 숙인 모습이 생생하다. 이들 제기 용품 외에도 주걱·그릇·잔 같은 생활용기와 물레나 베틀의 부품으로 추정되는 목기 등도 쏟아졌다. 진사(붉은 안료) 장식의 칼집형 칠기 등은 비슷한 시기 일본 열도의 유물과 유사점을 보여 당대 해상교역이 활발했음을 뒷받침해준다.

김해 봉황동 유적 출토 옻칠 두형 그릇(?豆) 출토 사진. 사진 국립가야문화유산연구소

김해 봉황동 유적 출토 새모양 목기 출토 사진. 사진 국립가야문화유산연구소

김해 봉황동 유적 출토 항아리 모양 목제품 출토 모습. 사진 국립가야문화유산연구소
김해 봉황동 유적은 인근의 대성동 고분과 함께 금관가야(3세기 말~6세기 중엽 추정)의 핵심 유적지다. 국가유산청은 지난 2020년 5세기경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성벽 발굴을 계기로 봉황동 일대를 금관가야의 왕성 유적지로 지목하고 유적 탐사를 해왔다. 이 과정에서 금관가야보다 앞선 1~4세기의 고급 생활유물이 쏟아진 것. 임종덕 국립문화유산연구원장은 “변한의 중심 소국이었던 김해 일대에서 세력을 키운 집단이 금관가야를 이룩했다는 그간의 추론이 고고학적 연구로 증명된 셈”이라고 말했다.
이에 따라 김해 봉황동 유적에서 금관가야의 왕궁터를 찾으려는 노력에 탄력이 붙게 됐다. 이곳에선 2015년 본격 착수 이래 3차례에 걸쳐 총 13만3201㎡ 규모의 문화유산구역이 지정됐고 이를 대상으로 발굴·복원사업이 진행 중이다. 국립가야문화유산연구소 측은 “이번 출토품으로 인해 이 일대가 가야 왕궁터일 가능성이 50%로 올랐다”고 말했다. 오춘영 소장은 “추가적인 과학 분석을 통해 당대 생활상과 가야문화권의 발전 양상을 구체적으로 규명해보겠다”고 말했다.

김해 봉황동 유적 _가_구역 10피트 남벽-동벽 토층 사진 국립가야문화유산연구소

김해 봉황동 유적 출토 옻칠 두형 그릇(漆豆) 일괄. 사진 국립가야문화유산연구소
이와 별개로 김해 함안 가야리 유적에선 아라가야의 왕성 흔적이 집수지(集水地)를 통해 처음으로 실체를 드러냈다. 집수지란 물을 모아서 가두는 역할을 하는 시설로 이 같은 유구는 이 일대에 대규모 거주지가 존재했음을 뒷받침한다. 국립가야문화유산연구소 측은 “지난해 배수로가 확인된 데 이어 약 2주 전에 집수지까지 확인됐다”며 “가야 문화권 왕성 유적 최초의 성과로 이곳에서 집중 탐사를 통해 목간(木簡·글을 적은 나뭇조각) 등 유물 발굴을 기대한다"고 설명했다.
한편 이날 함안군에선 국가에 귀속되지 않은 유물을 보관·관리하고 활용할 수 있는 영남권역 예담고(庫)가 개관했다. 함안 모곡터널을 활용한 예담고는 대구, 부산, 울산, 경상권역에서 출토된 유물을 관리하며 개방형 수장고도 운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