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딜런에 자극 받아 신보 작업”…정태춘·박은옥, 45주년 ‘문학 프로젝트’ 가동

가수 정태춘, 박은옥이 데뷔 45주년을 문학으로 기념한다. 프로젝트의 중심이 되는 정규 12집 '집중호우 사이'는 지난 2012년 발표한 ‘바다로 가는 시내버스’ 이후 13년 만의 새 앨범이다. 사진 뉴스1

가수 정태춘, 박은옥이 데뷔 45주년을 문학으로 기념한다. 프로젝트의 중심이 되는 정규 12집 '집중호우 사이'는 지난 2012년 발표한 ‘바다로 가는 시내버스’ 이후 13년 만의 새 앨범이다. 사진 뉴스1

“더 이상의 새 노래는 없을 것”이라 말했던(2019년 다큐멘터리 영화 ‘아치의 노래, 정태춘’ 중에서) 정태춘(71)이 마음을 바꿔 새 노래를 낸다. 아내 박은옥(68)과 함께 13년 만의 정규 앨범 ‘집중호우 사이’를 4월 중 발매하고, 연계한 공연을 펼친다. 데뷔 45주년을 문학으로 기념하는 프로젝트 형태로, 노래를 만들지 않았던 시기에 썼던 정태춘의 시와 붓글도 시집과 전시로 공개한다.

정태춘은 25일 서울 종로구 노무현시민센터에서 열린 2025 문학프로젝트 ‘노래여, 벽을 깨라’ 기자간담회에 참석해 “40주년에도 전시, 책, 앨범, 영화를 만들었다. 그때 말한대로 끝냈어야 했다. 그런데 내 안에서 노래가 나왔고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었다. 잘 하는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어떤 평가가 나오더라도 많은 사람이 이 노래를 들어줬으면 한다”고 밝혔다.

마이크를 이어 잡은 박은옥은 정태춘이 노래를 다시 만들기 시작한 때를 정확히 떠올렸다. “산문처럼 쓴 글을 펼쳐놓더니 ‘내 속에서 노래가 자꾸 나온다’고 이야기를 하더라. 창작자는 아니지만 그 느낌은 알았다. 어쩌면 우리에게 마지막 음반일 수도 있으니 좋은 노래를 만들어보자고 했다”고 덧붙였다.

돌연 정태춘이 마음을 바꿔 신곡 작업을 하게 된 계기는 점점 커진 문학적 욕심 때문이란다. 간담회에서 그는 “음유시인 밥 딜런 가사집을 보고 자극이 됐다. 나도 정말 좋은 노래를 만들고 싶었다. 내 이야기로 누군가에게 자극을 주는 그런 좋은 노래”라면서 “밥 딜런처럼 신나고 파워풀한 밴드 음악을 하고 싶어서 일렉 기타로도 노래를 썼다. 이번 앨범엔 조금 얌전한 노래를 꺼냈다”고 부연했다. 

가수 정태춘(오른쪽)과 박은옥이 25일 오후 서울 종로구 노무현시민센터에서 열린 2025 정태춘 박은옥 문학프로젝트 '노래여, 벽을 깨라' 기자간담회에서 '92년 장마, 종로에서'를 열창하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가수 정태춘(오른쪽)과 박은옥이 25일 오후 서울 종로구 노무현시민센터에서 열린 2025 정태춘 박은옥 문학프로젝트 '노래여, 벽을 깨라' 기자간담회에서 '92년 장마, 종로에서'를 열창하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정규 12집 ‘집중 호우 사이’에는 2022년부터 1년간 정태춘이 만든 30곡 가운데 10곡이 수록됐다. 앨범과 동명의 타이틀곡을 비롯해 ‘기러기’, ‘도리 강변에서’, ‘나의 범선들은 도시를 떠났다’, ‘민들레 시집’, ‘솔미의 시절’, ‘엘도라도는 어디’, ‘폭설, 동백의 노래’, ‘정산리 연가’, ‘하동 언덕 매화 놀이’가 수록됐다. 이중 박은옥은 ‘민들레 시집’과 ‘폭설, 동백의 노래’을 노래했다.


 
정태춘이 그간 거처하거나 움직였던 여러 풍광과 감회에서 영감을 얻은 노래들이다. 6년 정도 작업실로 오갔던 강원도 원주의 솔미마을, 지인들과 수시로 다닌 지리산 악양, 그의 거처인 송파와 마포에서의 이야기다.

개인적인 이야기로 앨범을 꾸리기 시작한 이유는 간담회에서 공개된 정태춘의 앨범 작업 노트에 적혔다. ‘여전히 나는 이 세계에 생존해 있는 가수이고, 저 많은 빚을 갚기 위해 내 안의 더 깊은 곳에서 웅얼거리는 노래들을 다 불러내고 싶었다. 더 늦기 전에.’ 정태춘은 영감이 되어 준 한국 문학, 연대하게 해 준 한국 현대사, 미적 토대가 되어준 고향과 그 유년, 양심을 지켰던 동료 예술가들에게 빚을 졌다고 했다.

1978년 1집 ‘시인의 마을’로 데뷔한 정태춘은 비합법 음반 ‘아, 대한민국’을 출시하고 가요검열제 폐지를 이끌어 냈다. 이날 간담회에서 부부의 듀엣으로 노래한 ‘92년 장마, 종로에서’ 역시 비합법 음반이자, 당시의 정치적 상황을 담은 곡이다. 1984년 4집 ‘떠나가는 배’부터는 박은옥과 함께 부부 공동의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다. 정태춘은 아내를 위한 일회성 작업인 2012년 ‘바다로 가는 시내버스’를 제외하고는 2004년부터 노래를 만들지 않았다. 사회 연대 활동을 줄이고 작업실에서 사진과 붓글씨 작업에 몰두해오다가 2022년 다시 기타를 잡았다.

‘벽을 깨라’는 프로젝트명은 정태춘의 붓글에서 따왔다. ‘상식과 고정관념의 벽, 독점과 차별의 벽 등 여러 억압의 벽들을 깨자’는 생각에서 비롯됐다. 정태춘은 “오늘날의 상황에서도 야만의 벽을 돌파하는 그런 지성의 힘, 양식의 힘을 생각했으면 좋겠다”면서도 “1980년대 낸 노래들처럼 사회고발적인, 저항적인 느낌만을 담은 것은 아니”라고 했다. 그는 “나이가 들고 관심사가 변화하면서 현실의 구체적인 사안부터 우주 속 나의 존재까지 다양한 주제가 들어왔다. 이런 과정 속에서 나는 충실하게 내 이야기를 해왔다. 내 생각대로 잘 변화해 온 것 같다”고 덧붙였다.

2025 정태춘 박은옥 문학프로젝트 '노래여, 벽을 깨라'의 기자간담회 현장. 왼쪽부터 김준기 미술평론가, 박은옥, 정태춘, 김창남 음악평론가, 오민석 문학평론가. 사진 연합뉴스

2025 정태춘 박은옥 문학프로젝트 '노래여, 벽을 깨라'의 기자간담회 현장. 왼쪽부터 김준기 미술평론가, 박은옥, 정태춘, 김창남 음악평론가, 오민석 문학평론가. 사진 연합뉴스

 
김창남 평론가는 “칠순을 넘긴 정태춘의 시선은 여전히 낮고 여린 곳, 무너지고 밟히고 사라진 곳을 향해 있으나 단지 현실의 황량함에 머물지 않는다. 매화, 동백, 민들레와 같은 소재로 희망을 담았다”고 신보를 분석했다.

 
정태춘은 “노래가 직업이 되면 하나의 비지니스가 되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가수라는 직업이 특별히 행복하다고 말할 순 없지만, 노래가 가진 힘과 노래로 할 수 있는 표현방식에 큰 매력을 느낀다. 문학은 그 어떤 장르보다도 특별한 소구력이 있다. 그 매력 때문에 평생을 붙잡고 있다고 생각한다. 노래를 부르는 것보다는 만들 때 고민하고 다듬고 작품을 완성하는 과정이 더 행복하다”고 전했다.

13년만에 신보로 돌아온 정태춘, 박은옥은 5월 17일 부산을 시작으로 24일 대구, 6월 7일 울산, 17~23일 서울 등에서 콘서트 ‘나의 시, 나의 노래’로 관객들을 만난다. 20여 편의 미발표 가사는 4월 초 발간 예정인 노래시집 『집중호우 사이』, 붓글집 『노래여, 노래여』에 담긴다. 붓글 작품 중 노래와 관련한 작품만 뽑아 6월 초 인사동 토포하우스에서 전시를 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