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옥숙, 노태우 취임날 속삭였다…'6공 황태자'의 비밀

제1부. 잘못 끼워진 6공 첫 단추

 

4회. 노태우 처가사랑과 황태자 박철언의 탄생

노태우 대통령이 취임 첫날인 1988년 2월 25일 청와대로 노모 김태향(오른쪽 둘째)와 장모 홍무경(오른쪽 끝) 여사를 초대해 함께 저녁식사를 하고 있다. 노태우는 편모 슬하에서 자란 효자며, 처가 사랑도 극진했다. 중앙포토

노태우 대통령이 취임 첫날인 1988년 2월 25일 청와대로 노모 김태향(오른쪽 둘째)와 장모 홍무경(오른쪽 끝) 여사를 초대해 함께 저녁식사를 하고 있다. 노태우는 편모 슬하에서 자란 효자며, 처가 사랑도 극진했다. 중앙포토

 
“우리는 노 대표를 후계자로 밀기 위해 최선을 다하기로 다짐했다. 대신 노 대표는 한 가지만 다짐해 줘야 한다.”
1987년 초 시내 모처에 모인 5공 실세들이 노태우 민정당 대표를 불러 다짐을 받고자 했다. 노태우가 “뭐든지 말해 보라”고 하자 모임의 좌장이자 노태우의 절친 정호용이 입을 열었다.

“대통령이 된 후 친인척 문제를 확실히 관리하겠다는 약속을 해 달라.”

당시 참석자는 정호용(육사 11기) 외에 이춘구 민정당 사무총장(육사 14기), 안무혁 국세청장(육사 14기), 김용갑 청와대 민정수석(육사17기) 등 군 출신 5공 핵심들이었다. 이들은 실제로 이후 노태우 대통령 만들기의 1등 공신 역할을 해냈다.  
정호용은 내무장관과 국방장관을 거치면서 내각과 군부를 관리했다. 이춘구는 선거대책본부장과 취임준비위원장으로 당을 맡았다. 안무혁은 안기부장이 돼 정국을 총괄했다. 김용갑은 청와대 수석으로 전두환 대통령 주변의 노태우 비토를 저지하는데 한몫했다.

 
이들이 연초부터 밀실에 모인 것은 나름의 책임의식이었다. 이들은 스스로 ‘신군부 권력의 공동창업자’라 자부했다. ‘정권 재창출도 함께 책임져야 할 공동운명체’라는 생각에 싸여 있었다. 이들은 노태우 도착 직전까지 전두환 대통령의 친동생 전경환(새마을운동중앙본부 회장)의 비리를 성토하던 참이었다.  


두 가지 면에서 노태우는 전두환보다 친인척 문제에 취약했다. 
첫째, 노태우의 성격이다. 전두환처럼 확고한 리더십도 친인척 문제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다. 노태우는 성격이 미적지근한데 친인척들은 성격이 강했다.  
둘째, 전두환의 경우 친인척 비리가 대개 이권개입 수준이라면, 
노태우의 경우 국정개입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처남 김복동은 육사 11기 출신으로 정치참여는 물론 대권 꿈을 품고 있던 인물. 동서 금진호는 상공부 장관까지 지낸 엘리트 관료 출신. 처조카 박철언은 안기부장 특보이자 노태우의 핵심 참모로 이미 매사에 깊이 개입하고 있었다.  

이런 주변의 우려를 잘 알기에 노태우는 확실하게 대답했다. “약속한다. 내가 그 약속을 안 지키면 내 목에 칼을 들이대도 좋다.” 참석자들이 구체적으로 주문했다. “친인척 중 김복동(처남)과 금진호(동서), 박철언(처사촌)을 철저히 관리해 달라. 나머지는 우리가 나서서라도 막겠다.”

전두환 못지않은 노태우의 처가 사랑

 

대통령 선거운동이 한창이던 1987년11월 21일 대전역 광장에서 열린 민정당 노태우 후보 유세에 참석한 김옥숙 여사가 태극기를 흔들고 있다. '튀지 않는 후보 부인' '보이지 않는 내조'를 강조해 온 노태우 선거캠프는 김옥숙을 군중 속에 묻혀 있는 모습으로 언론에 노출시켰다. 중앙포토

대통령 선거운동이 한창이던 1987년11월 21일 대전역 광장에서 열린 민정당 노태우 후보 유세에 참석한 김옥숙 여사가 태극기를 흔들고 있다. '튀지 않는 후보 부인' '보이지 않는 내조'를 강조해 온 노태우 선거캠프는 김옥숙을 군중 속에 묻혀 있는 모습으로 언론에 노출시켰다. 중앙포토

전두환의 처가사랑은 유별난 것으로 잘 알려졌다. 장인 이규동은 전두환이 육사 생도 시절 육사 교수부장으로 일찌감치 전두환을 후원해 주었다. 찢어지게 가난했고, 공부도 제대로 하지 못했던 전두환은 장군집 사위가 됐다.  
노태우 역시 과분한 집으로 장가 갔다. 노태우는 대구 변두리 가난한 집 편모 슬하에서 자랐다. 처가는 대구의 유복한 집안이었다. 장인이 일제시대부터 공직생활을 해 대구 시내에 집이 있었다. 이 집안의 3남 김복동이 육사 11기 하나회 창립멤버였다. 노태우는 김복동의 집을 제 집처럼 들락거렸다. 
김복동의 여동생 김옥숙이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본격적으로 사귀기 시작했다. 김복동이 “노태우는 내가 보증한다”며 밀어준 덕분에 결혼까지 할 수 있었다. 대신 노태우는 김복동이 당시 집안에서 꺼리던 지역(전남 광주) 출신인 임금주와의 결혼을 (아버지로부터) 허락받을 수 있게 지원해 주었다(노태우 회고록 참조).
김옥숙의 큰오빠는 교장 선생님이었고, 둘째 오빠는 경북대 총장을 지낸 의학박사다. 김옥숙 역시 지역 명문 경북여고와 경북대학을 나온 재원이었다. 여동생 김정숙은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상공부에서 잘나가던 금진호와 결혼했다. 노태우 입장에선 처가에 공을 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김옥숙이 총애한 친척이 고모의 아들 박철언이었다. 노태우 중위가 대학생이 된 김옥숙과 사귀고 싶어 ‘영어를 가르쳐 주겠다’며 접근했다. 쑥스러웠던 김옥숙이 고등학생 박철언에게 ‘같이 배우자’고 하는 바람에 박철언이 ‘난데없는 영어과외’를 받았다. 노태우 영관장교 시절 빠듯한 살림에도 불구하고 대학생 박철언을 데리고 있었다.  
박철언이 사법고시에 합격해 법무관으로 군대에 가게 되자 노태우는 서울 한가운데(영등포 6관구)에 배치되도록 손을 썼다. 당시 육군 인사를 담당했던 육본 인사운영감실에 근무하던 노태우의 친구가 권익현 대령이었다. 대령급 인사를 좌우하는 ‘대령 과장’이었다. 법무관들의 배치를 결정하는 ‘특수병과 과장’ 역시 권익현의 관할 대상인 ‘대령’이었다. 권익현은 “한마디 해주었다”고 말했다. 

‘친인척 단속’ 다짐한 노태우 “박철언은 예외”

 

노태우 대통령 내외가 1988년 2월 취임 직후 청와대에서 박철언 보좌관 부부와 함께 포즈를 취했다. 왼쪽부터 박철언 부인 현경자, 노태우 대통령, 김옥숙 여사, 박철언 보좌관. 중앙포토

노태우 대통령 내외가 1988년 2월 취임 직후 청와대에서 박철언 보좌관 부부와 함께 포즈를 취했다. 왼쪽부터 박철언 부인 현경자, 노태우 대통령, 김옥숙 여사, 박철언 보좌관. 중앙포토

노태우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박철언을 청와대 정무수석으로 임명하려고 했다. 주변에서 노태우에게 ‘친인척은 공직에서 배제한다’며 만류했다. 그러자 노태우가 단호하게 거절했다.  
“박철언은 예외로 생각해 달라. (처남) 김복동이나 (동서) 금진호는 친인척이라 국회의원도 못 하게 했다. 그러나 박철언이는 유능한 참모다. 친인척이라 생각하지 말아 달라. 내가 쓰고 싶은 참모다. 대통령이 데리고 쓰고 싶으면 쓰는 거지, 다른 말이 뭐 필요하냐.”
1987년 초 노태우가 민정당 대표 시절 ‘노태우 대통령 만들기’를 결의했던 실세들이 요구했던 단 하나의 조건이 ‘친인척 배제’ 약속이었다. 노태우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지키겠다’던 약속을 대통령이 되자마자 어긴 셈이다.

 

(계속)

“베갯머리 송사를 이길 사람은 없습니다.”
김 여사가 대통령 취임식장으로 가는 차 안에서 노태우 대통령에게 속삭인 말이 있다고 합니다.
대통령이 된 이후에도 박철언을 밀어준 이유, 이어지는 내용은 아래 링크를 통해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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