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채꽃밭? 서귀포 사람은 그런 요망진 데서 안논다

지난 21일 서귀포시 서귀진지에서 열린 남극노인성제 장면. 남극노인성제는 남반구에 뜨는 별 남극노인성에 드리는 제례다. 우리나라에서는 한라산 남쪽, 서귀포 일대에서만 남극노인성이 보인다.

지난 21일 서귀포시 서귀진지에서 열린 남극노인성제 장면. 남극노인성제는 남반구에 뜨는 별 남극노인성에 드리는 제례다. 우리나라에서는 한라산 남쪽, 서귀포 일대에서만 남극노인성이 보인다.

대한민국 최남단 도시 제주도 서귀포시. 서귀포의 봄은 어디서 올까. 들판을 노랗게 덮은 유채꽃밭? 저런, 관광객이 줄 서서 사진 찍는 그 유명한 노란 꽃밭은 유채밭이 아니다. 배추의 종류인 산동채밭이다. 입장료 받으려고 부러 조성한 관광지다. 서귀포 사람은 그런 ‘요망진’ 데서 봄을 맞지 않는다. 

서귀포 사람이 봄은 맞이하는 방법은 육지에서 건너온 관광객과 사뭇 다르다. 몸국 끓이고 빙떡 부쳐 나눠 먹고, 남쪽 하늘의 별을 향해 제를 올린다. 꽃놀이도 나간다. 백서향꽃을 ‘보러’가 아니라 ‘맡으러’ 간다. 백서향은 꽃이 피면 향이 만 리가 간다는 꽃나무다. 지난 21∼23일 서귀포 일대에서 ‘서귀포 봄맞이 축제’가 열렸다. 작고 소박한 마을 잔치를 굳이 찾아간 건 올해로 14년째인 행사를 오롯이 서귀포 주민이 꾸려왔다는 얘기를 들어서다.  

역시 축제는 여느 지역축제와 달랐다. 관광객 불러 장사 좀 해보겠다는 상술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모양 꾸며 얼굴 내미는 행사가 아니어서, 동네 사람이 서로 어울려 웃고 떠드는 잔치여서 좋았다. 축제는 본디 만드는 자가 즐기는 행사다.  

서귀포 봄맞이 축제 장면. 서귀포 주민이 화전을 부쳐 나눠 먹고 있다.

서귀포 봄맞이 축제 장면. 서귀포 주민이 화전을 부쳐 나눠 먹고 있다.

 

남극노인성군 신위  

22일 오후 6시 서귀진지 공원. 왜구가 활개 치던 조선 시대, 서귀포를 방어하던 군사시설에 들어선 작은 공원이다. 여기에서 마을 합동 제례가 열렸다. 이름하여 ‘남극노인성제’. 지방(紙榜)에 ‘남극노인성군신위(南極老人星君神位)’라 쓰여 있다. 제주도에서는 별도 귀신이 되는가? 별에 올리는 제사라니. 난생처음 구경한다.


남극노인성은 남반구의 별이다. 하늘의 별은 북반구와 남반구에서 보이는 게 다르다. 저마다 다른 하늘을 이고 사는 셈인데, 북반구에서 유일하게 볼 수 있는 남반구 별이 남극노인성, 즉 ‘카노푸스(Canopus)’다. 우리나라에서는 한라산 남쪽, 다시 말해 서귀포 일대에서만 볼 수 있다. 카노푸스는 시리우스 다음으로 밝은 별이라고 한다.

남극노인성이 제주도 하늘에서 하고한 날 보이는 건 아니다. 추분에서 춘분 사이에만 관찰이 가능하다. 하여 서귀포에서 남극노인성이 보인다는 건 날이 추워진다는 뜻이고, 남극노인성이 안 보인다는 건 따뜻한 계절이 시작한다는 의미다. 오래전부터 서귀포에서는 추분과 춘분 즈음에 남극노인성에 제를 올렸다.  

서귀포 봄맞이 축제에서 부친 화전과 전기떡에 들어가는 월동무.

서귀포 봄맞이 축제에서 부친 화전과 전기떡에 들어가는 월동무.

서귀포 봄맞이 축제에서 부친 빙떡. 제주에서는 '전기떡'이라고 한다. 전기떡을 받친 접시가 뻥튀기다. 플라스틱 접시를 쓰지 않으려고 생각해낸 아이디어다.

서귀포 봄맞이 축제에서 부친 빙떡. 제주에서는 '전기떡'이라고 한다. 전기떡을 받친 접시가 뻥튀기다. 플라스틱 접시를 쓰지 않으려고 생각해낸 아이디어다.

굳이 별에 제를 드리는 건 이 별이 인간의 수명을 관장하는 별이어서다. 그래서 별 이름에도 ‘노인’을 붙였고, 무병장수를 바라는 마음을 모아 별을 섬겼다. 조선 시대에도 이 별을 보려고 한라산을 올랐다는 기록이 전해온다. 서귀포 시내의 오름 삼매봉(153m) 정상에 남극노인성을 관찰했던 ‘남성대(南星臺)’가 남아 있다.  

일제 강점기 중단됐던 남극노인성제는 서귀포 봄맞이 축제를 시작하고 5년 뒤 재개됐다. 올해로 9번째 제를 올렸다. 제사상에는 옥돔과 돼지고기를 올리고, 술과 함께 갖은 나물도 올린다. 여성 차별이 심했던 제주도이지만, 올해로 3년째 여성도 제관으로 참여한다. 

백서향 향에 취하다  

백서향꽃은 향기가 만 리 간다는 말이 있다. 실제로 활짝 핀 백서향꽃에서 향기가 진동했다.

백서향꽃은 향기가 만 리 간다는 말이 있다. 실제로 활짝 핀 백서향꽃에서 향기가 진동했다.

23일 서귀포 봄맞이 축제 본행사가 열렸다. 장소는 서귀포시 서복공원. 정방폭포가 지척인 곳이다. 길놀이가 축제의 시작을 알린다. 가만히 보니 여느 길놀이와 다르다. ‘걸궁’이라는 다른 이름이 있다. 걸궁은 이른바 거리굿이다. 마을 곳곳을 돌며 잡귀를 몰아내는 무속의례다. 하여 걸궁은 상쇠가 아니라 심방, 다시 말해 무당이 길놀이패를 이끈다. 제주도는 1만8000위가 넘는 신이 있다는 신화의 섬이고 마을마다 심방이 산다는 무속의 섬이다. 

천막 아래에서는 빙떡과 화전을 부쳐 나눠 먹는다. 빙떡에도 ‘전기떡’이란 다른 이름이 있다. 그래도 메밀을 반죽한 피에 채 썬 무를 넣은 건 똑같다. 서귀포에서는 이맘때 전기떡을 부쳐 먹었다고 한다. 전기떡에 넣는 무를 겨울에 심은 월동무를 써서다. 월동무 맛이 제일 올랐을 때가 요즘이다. 제주도에서도 진달래꽃으로 전을 부친다. 음력 3월 3일 서귀포시 성읍 마을에서 화전놀이를 했다는 기록이 내려온다.  

서귀포 봄맞이 축제에서 3000원에 판 몰방국 밥상. 몰망은 모자반의 제주 방언이다.

서귀포 봄맞이 축제에서 3000원에 판 몰방국 밥상. 몰망은 모자반의 제주 방언이다.

또 다른 천막에서는 몰망국 밥상을 3000원에 팔고 있었다. 곤밥(흰 쌀밥), 몰망국(모자반국), 돗궤기반(흑돼지 수육), 김치가 한 상을 이뤘다. 제주에서는 잔치가 열리면 손님에 몰망국과 돗궤기반을 대접했다. 몰망은 ‘모자반’이란 해초의 제주 방언이다. ‘몸’이라는 방언은 여러 번 들었는데, 몰망은 처음 들었다. 몸과 몰망 모두 모자반이다. 몰망국은 돼지고기 육수에 몰망을 넣어 부족한 건더기(고기)를 보충한 음식이다. 몰망국도 이른 봄날 제주의 음식이다. 몰망이 1년 중에 제일 맛있는 계절이 이맘때여서다. 

이제 서귀포 봄맞이 축제의 하이라이트 행사를 소개할 차례다. 이 정겨운 마을 잔치는 꽃나무 묘목을 나눠주는 이벤트로 마무리된다. 23일에는 서복공원에서, 24일에는 가시리 농장에서 모두 2500여 주의 꽃나무 묘목을 공짜로 준다. 1주에 100만원이 넘는 비싼 묘목도 많단다. 팔도의 숱한 축제 현장을 가봤지만, 이렇게 막무가내로 퍼주는 축제는 처음 봤다. 

서귀포문화사업회 이석창 회장이 가시리 농장에서 활짝 핀 수선화를 설명하고 있다.

서귀포문화사업회 이석창 회장이 가시리 농장에서 활짝 핀 수선화를 설명하고 있다.

가시리 농장은 마침 백서향꽃이 만개했다. 백서향꽃은 향이 만 리도 간다는 말이 허튼소리가 아니었다. 은은한 향을 좇아 한참을 걷고 나니 백서향 군락지가 나타났다. 

서귀포 봄맞이 축제는 서귀포문화사업회 주최로 2011년 처음 열렸다. 서귀포문화사업회는 서귀포에 거주하는 각계 인사 15명이 모인 단체로, 가시리 농장을 운영하는 이석창(69) 회장이 이끌고 있다. 이 대표의 강고한 고집 또는 후한 인심으로 십수 년째 묘목 나눔 행사가 이어져 왔다. 이 대표는 왜 애지중지 키운 꽃나무를 나눠줄까.

꽃나무를 나누는 건 봄을 나누는 것과 같아서입니다. 서귀포 사람들과 서귀포의 봄을 함께 맞고 싶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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