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일 오전 서울 종로구 안국역 인근에서 탄핵 촉구 집회 참가자들이 윤석열 전 대통령에게 파면이 선고되자 기쁨의 눈물을 흘리고 있다. 뉴스1
지난 4일 오전 11시 22분 서울 종로구 열린송현 녹지광장은 환희의 함성으로 가득찼다. 문형배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이 “피청구인 대통령 윤석열을 파면한다”고 주문을 읽은 순간, 탄핵 촉구 집회에 참석한 이들은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50대 후반인 직장인 이모씨는 후련한 표정으로 “진작 이뤄졌어야 할 결정이 나와서 다행”이라고 했다. 하지만 분열된 국론을 어떻게 모으면 좋을지를 묻자 표정이 굳어졌다. 그리곤 “윤 전 대통령을 비롯한 고위 공직자, 검찰·경찰 등 사회 암적 존재가 드러났다. 앞으로 과제는 화합이 아니라 암적 존재를 어떻게 제거하고 뿌리뽑을지 고민하는 것”이란 답이 돌아왔다.
이날 인터뷰에 응한 찬탄 집회 참가자 10명 중 7명이 “국론 합치, 국민 화합” 등을 묻는 질문에 비슷한 답을 내놨다. 서울 성북구에 사는 40대 김모씨는 “내란 세력을 지구 끝까지 쫓아 청산해야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는다”고 했다. 60대 강모씨는 “그동안 상대 당(국민의힘)에 당했던 만큼 복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윤석열 전 대통령 파면 사흘째인 6일 서울 광화문 광장이 차분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뉴스1
사상 초유의 계엄 사태를 만든 대통령이 파면된 뒤 일부 국민은 보복과 처벌이 우선이라고 외친다. 여론조사기관 ‘리서치뷰’가 4일 하루 동안 전국 만 18세 이상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 21대 대통령 선거의 시대정신으로 ‘윤석열 정부 적폐 청산(23.8%)’이 가장 많은 선택을 받았다. ‘협치와 국민통합(20.8%)’, ‘경제위기 극복(18.6%)’, ‘법치주의 확립(10.8%)’ 등 다른 선택지는 후순위였다.
야당도 재빠르게 반응했다. 민형배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4일 ‘12·3 비상계엄 관련 반헌법행위자 처벌 특별법’을 대표 발의했다. 계엄을 주도하거나 가담·방조·선동한 사람을 처벌하는 내용을 핵심으로 하는 법이다. 국회의장 직속 반헌법·내란행위조사 특별위원회를 설치하고, 계엄 관련 허위사실을 유포하거나 옹호하는 행위를 처벌하는 내용이 담겼다.
하지만 전방위적 청산과 보복이 민주주의 회복에 급선무 과제인지 의문을 제기하는 전문가도 적지 않다. 전 세계 내전을 연구한 바버라 F. 월터 UC샌디에이고대 교수는 『내전은 어떻게 일어나는가』에서 “학자들이 발견한 폭력의 가장 유력한 결정 요인은 한 집단의 정치적 지위의 궤적”이라고 했다. 현대 사회의 많은 내전은 급격한 정치·문화적 지위 격하(downgrading)가 불씨 역할을 했다고 한다. 권력 이양이 특정 진영에 재앙으로 이어지지 않을 것이란 믿음이 있어야 민주주의는 지속 가능하다는 지적이다.

문형배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이 4일 오전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에서 윤석열 대통령 탄핵심판 인용 결정문을 낭독하고 있다. 이날 전원일치 의견으로 대통령 윤석열을 파면한 헌재는 국회와 대통령이 서로를 존중하지 않은 것도 질책했다. 뉴스1
한국에선 1987년 민주화 이후 네 번의 보수·진보 정권교체 때마다 극단적인 지위 상실이 반복됐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직후 문재인 전 대통령은 ‘적폐 청산’의 깃발을 내걸었다. 검찰 특수부를 앞세워 전 정권에 대한 전방위적 수사에 나섰다. 이후 ‘검수완박’을 내걸고 검찰 권력 해체에 나섰지만 검찰 출신인 윤 전 대통령에 오히려 정권을 내줬다. 20대 대통령 선거에서 0.73%포인트라는 가장 근소한 차이로 당선된 윤 전 대통령도 다르지 않았다. 수사·재판 중이란 이유로 야당 대표와 대화를 거부했다.
헌재가 결정문 결론에서 “소수의견의 존중, 관용과 자제, 대화와 타협”을 언급한 것도 이런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헌재 결정문을 학습한 챗GPT는 “8대 0이라는 숫자 자체는 승패를 가른 결과가 아니라 헌법의 기준이 일치했다는 선언이다. 누군가를 조롱하거나 환호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 판결로부터 어떤 민주주의를 다시 세워야 하는지 고민할 때”라는 조언을 내놨다.

오스트리아 화가 카를 라흘(Carl Rahl)이 1852년 그린 '오레스테스를 벌하는 복수의 여신들'(Orestes Pursued by the Furies). 위키피디아
기원전 5세기 민주주의 황금기를 구가했던 고대 그리스인들의 이야기에서 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극작가 아이스킬로스의 『오레스테이아』에서 친족을 살해한 오레스테스는 복수의 여신인 에리니에스(퓨리)들의 추격을 피해 아테나 여신에게 몸을 의탁한다. 재판에서 퓨리들은 한 표 차이로 오레스테스에 패하자 승복하는 대신 “신들이 속임수를 꾸며 오래된 특권을 앗아가니 아무 존재도 아니게 됐다. 불행을 낳는 독을 내 심장에서 뿜어내 되갚아 주겠다”고 저주했다.
하지만 아테나는 퓨리들을 내쫓는 대신 공존을 제안했다. 아테나의 8번에 걸친 설득 끝에 퓨리들은 자신들을 관용한 도시를 축복하면서 에우메니데스, 즉 자비의 여신이 됐다. 고대 그리스인은 극장을 떠나면서 ‘민주주의의 통치 원리는 힘의 지배가 아니라 설득의 로고스(이성)’라는 교훈을 곱씹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