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2009년 김신조 목사가 청와대 뒷길 퇴각로 총탄 자국을 만져보며 1·21 사태 당시를 회상하고 있다. 중앙포토
1968년 북한 무장공비로 ‘청와대 습격’(1·21 사태)을 시도했다 귀순한 김신조 목사가 9일 별세했다. 83세. 서울성락교회 등에 따르면 김 목사는 이날 새벽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김 목사는 42년 함경북도 청진에서 태어나 18세부터 북한군 생활을 했다. 북한 민족보위성 정찰국 124군 소속이던 68년 1월 21일 공작원 30명과 함께 서울 세검정 고개(자하문 고개)까지 침투했다. 청와대를 습격해 박정희 전 대통령을 암살하고, 남한을 혼란에 빠뜨린다는 목표로 북한 개성에서 출발한 지 나흘 만이었다.
이들은 청와대를 300m 정도 남겨둔 상황에서 경찰 검문에 걸렸다. 청와대 진입 시도를 저지하기 위한 군경의 소탕 작전이 벌어지자 공작원들은 수류탄을 던지고 기관단총을 쏘며 저항했다. 이때 벌어진 교전으로 이날 밤 대간첩작전을 지휘하던 서울 종로경찰서장 최규식 총경을 비롯하여 군경과 민간인 7명이 사망했다. 남파 공작원은 31명 중 29명이 사살됐고, 1명은 월북, 유일한 생존자인 김 목사는 투항했다.

김신조씨가 1968년 1월 22일 기자회견 장으로 들어서고 있다. 중앙포토
"박정희 모가지 따러 왔수다"
김 목사는 침투 당시 총을 한 발도 쏘지 않았다는 점이 참작돼 2년 만에 풀려났다. 그는 언론 인터뷰에서 “숨겨둔 무기의 총신에서 탄약 냄새가 나지 않았고 총에 총알이 그대로 장전돼 있던 점 등이 수사과정에서 확인돼 사형을 면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1968년 1월 22일 새벽 장홍근 중앙일보 기자가 촬영한 김신조씨 모습. 중앙포토
그는 68년 3월 전향을 결심했다. “서울시민들이 평온한 표정으로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며 마음이 흔들렸다”고 했다. 70년 4월 주민등록증을 받았고, 자신을 편지로 위로해 주던 부인과 같은 해 10월 결혼했다. 아내의 전도로 신앙의 길에 들어선 그는 91년 2월 서울 침례신학대교를 졸업했다. 남한에 건너온 날을 기념해 97년 1월 21일 목사 안수를 받았다. 슬하에 1남 1녀를 두고 있다.
김 목사는 서울 성락교회에서 목사로 재직했다. 최근까지도 일요일마다 교회에 나가 신앙생활을 이어온 것으로 전해졌다. 안보와 관련된 강연과 방송 인터뷰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김 목사는 간첩 출신 첫 강연자로 ‘반공 강연의 1인자’ 소리까지 들었다. 2010년에는 한나라당(현 국민의힘) 북한 인권 및 탈북·납북자 위원회 고문으로 활동했다.
"자유에 대한 책임 갖고 매 순간 노력해야"

김신조씨가 2010년 4월 28일 서울광장 앞에 마련된 천안함 46용사들의 합동 분향소를 찾아 조의를 표하고 있다. 중앙포토
각종 강연에서 그는 북한에 남겨두고 온 부모님이 고향인 함경북도 청진에서 총살당한 소식을 듣고 죽음보다 더한 고통과 좌절을 겪었다고 털어놨다. 2023년 1월 파주시 의회가 주최한 1·21 사태 55주년 기념 좌담회에서는 “대한민국에 와서 가정을 꾸리고 아들·딸, 손주 등 대가족을 이뤘다”며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자유에 대한 책임을 갖고 매 순간 노력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했다.
그는 자전적 에세이 『나의 슬픈 역사를 말한다』와 신앙 간증집 『날지 않는 기러기』에 자신의 파란만장한 삶을 기록해 남겼다. 빈소는 영등포구 교원 예움 서서울장례식장에 차려질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