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성호 종교전문기자

영명 고등학교 뒷동산에 있는 사애리시 선교사 부부와 유관순 열사(왼쪽)의 동상. 여양현(왼족) 영명중고 교장과 서만철 한국침례신학대 특임교수가 그들의 생애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공주=백성호 기자
여기가 슬픔의 끝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3년 전에 결혼한 젊디젊은 아내가 있었다. 그가 바로 사애리시 선교사다. 남편의 성인 ‘샤프’를 따 사(史)씨가 됐고, ‘사랑의 이치를 베푼다’는 뜻에서 ‘애리시(愛理施)’란 이름을 썼다. 영어 이름은 ‘앨리스 하몬드 샤프(Alice H. Sharp)’였다.
그녀의 생애를 아는 이라면 이런 물음을 던진다. “만약 사애리시 선교사가 없었다면, 유관순 열사가 있었을까?” 그만큼 유관순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친 이가 사애리시 선교사다.
사애리시 선교사는 캐나다에서 태어났다. 1900년 말에 미국 감리교 선교사로 한국에 왔다. 동료였던 샤프 선교사와 1903년 이화학당 본관에서 결혼했다. 이듬해 두 사람은 공주 선교부 책임자로 임명됐다.

영명 고등학교 뒷동산에 있는 선교사 묘역. 왼쪽에 사애리시 선교사의 묘비가 보인다. 오른쪽 뒷편이 남편 샤프 선교사의 묘다. 이들은 결혼 3년 만에 사별했다. 공주=백성호 기자
샤프 선교사 부부는 공주를 중심으로 강경, 논산 등 충남 일대 농촌 마을을 오가며 선교 활동을 했다. 1906년 겨울이었다. 한파가 몰아치는 날이었다. 강경과 논산에서 전도를 하고 돌아오던 샤프 선교사는 세찬 진눈깨비를 만났다. 길을 가기가 쉽지 않았다. 마침 산모퉁이에 초가가 있었다. 빈집이었다. 샤프 선교사는 그곳에 들어가 눈보라와 추위를 피하며 몸을 녹였다.
그 집은 장티푸스로 죽은 사람의 장례를 치른 상여를 보관하는 상엿집이었다. 그걸 모른 채 샤프 선교사는 그만 그 상여를 만졌다. 결국 전염병인 장티푸스에 걸리고 말았다. 한 달 뒤에 샤프 선교사는 세상을 떠났다. 결혼 3년 만에 남편을 잃은 사애리시 선교사는 큰 충격을 받았다. 슬픔을 견디지 못한 사애리시 선교사는 미국으로 돌아갔다.
쉽지 않은 일이다. 남편을 잃은 이국땅으로 다시 돌아와, 자신의 생을 바치는 일 말이다. 2년간 몸과 마음을 추스른 사애리시는 ”우리는 잃은 것이 많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실 것이다”라며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청상과부가 된 그녀를 한국 사람들은 “사 부인”이라고 불렀다.
사애리시 선교사는 교육에도 정성을 쏟았다. 공주에 명선학당을 세워 여자아이를 모아 교육을 했고, 나중에 영명여학교가 됐다. 충청 전역을 통틀어 근대식 여성 교육의 시초였다. 사애리시는 선교차 들렀던 목천군 이동면의 지령리 교회에서 한 소녀를 만났다. 수차례 오가며 소녀가 똑똑하고 신앙심이 있음을 확인했다. 그녀는 소녀에게 영명여학교에 와서 공부할 수 있도록 길을 놓았다. 그 소녀의 이름이 유관순이다.

1902년 세워진 공주 제일교회의 최초 예배당 사진이 교회 벽면에 걸려 있다. 오른쪽은 사애리시 선교사와 유관순 열사의 모습니다. 사애리시 선교사는 유관순을 자신을 딸처럼 대했다. 백성호 기자

영명 여학교에 다니던 여학생들의 모습이다. 흰 동그라미가 사애리시 선교사, 노란 동그라미가 당시 재학 중이던 유관순의 모습이다. 공주=백성호 기자
유관순은 1914년 영명 여학교에 입학해 2년간 공부했다. 기독교적 의미가 담긴 ‘영명(永明)’은 ‘영원한 빛’이란 뜻이다. 총신대 역사교육과 허은철 교수는 “유관순은 어렸을 때부터 한글을 빨리 익혀서 성경 말씀을 많이 암송했다”며 “당시 사애리시 선교사는 어린 유관순을 잘 챙겨주었으며, 자신의 딸 같이 대했다. 심지어 학비를 모두 대주며 서울 이화학당 보통과에 입학해 공부할 수 있도록 전폭적 지원을 했다”고 설명했다.
1919년 4월 충남 병천 아우내 장터에서 만세운동이 벌어졌다. 일제의 강제 휴교령으로 고향에 내려와 있던 유관순은 두 살짜리 조카를 등에 업고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유관순의 부모는 만세운동 중 일본 헌병에게 모두 살해당했다. 유관순은 체포돼 모진 고문을 당하다 17세 나이에 옥사했다. 유관순 집안은 독립운동과 관련해 부모와 형제, 조카까지 모두 9명이 애국훈장을 받았다.

유관순 열사는 아우내 장터에서 만세운동을 하다가 체포돼 수감됐고, 모진 고문을 당하다 옥사했다. 공주제일교회 기념관에 전시된 유관순 열사의 옥중 사진. 백성호 기자
서만철 한국침례신학대 특임교수는 ”일제의 침탈과 수탈 과정을 지켜보던 서양 선교사들은 학생들에게 직간접적으로 민족정신을 일깨우는 교육을 했다”며 “유관순에게 신학문을 가르치고 민족정신을 가르친 사람이 사애리시 선교사였다. 한마디로 유관순의 스승이었다”고 말했다.
사애리시 선교사가 키워낸 여성 인재는 유관순뿐만 아니다. 해방 후 자유당 정부에서 장관을 역임하고 중앙여자대학교(중앙대 전신)를 설립한 임영신, 한국 최초의 여성 경찰서장 노마리아, 한국 감리교 최초의 여성 목사인 전밀라 등 다수였다.
1940년 일제는 선교사 강제 추방령을 내렸다. 사애리시 선교사는 69세 때 한국을 떠났다. 남편을 잃은 이국땅에서 무려 38년간 교육 선교를 하며 자신의 생애를 바쳤다. 미국으로 돌아간 사애리시 선교사는 1972년 캘리포니아주 패서디나의 은퇴선교사요양원에서 101세를 일기로 소천했다. 방에 남겨진 유품은 옷가지 몇 벌과 오래된 트랜지스터라디오 하나뿐이었다고 한다.

서동표 군산중동교회 담임목사(왼쪽)와 소강석 새에덴교회 담임목사가 초기 선교사들의 생애와 그들이 학교를 세워 학생들에게 일깨운 민족정신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뒤에 보이는 건물은 군산 3.1운동 기념관이다. 군산=백성호 기자
기독교 근대문화유산 탐방에 동행한 소강석 목사(한교총 전 대표회장)는 “당시 미국 선교본부는 정교분리 원칙을 세웠다. 그런데 미션 학교 입장에서 볼 때 일제의 만행이 너무 지나쳤다”며 “선교사들은 학생들에게 성경에 나타난 자유와 사랑, 박애의 정신을 가르쳤다. 이는 결국 민족정신을 일깨우는 역할을 했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