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혜영 "잘 사는 것은 잘 죽는 것으로 완성되죠" [월간중앙]

그때 그 사람|'웰다잉 전도사' 원혜영의 이유 있는 변신


“자기 재산에 대한 결정권 존중받아야”, ‘유언장 쓰기’ 확산에 힘써
“노인 고독사 늘어날텐데…일본 직장(直葬) 좋은 해법일 수 있어”


‘잘살다, 잘 죽자.’

짧지만, 본질이 담긴 이 말은 원혜영(73) 전 민주당 원내대표가 공동대표를 맡은 ‘웰다잉문화운동’의 슬로건이다. 지난 7일 서울 중구 서소문동에서 만난 원혜영 대표는 “‘잘 죽는 것’이 ‘잘 사는 것’의 완성”이라고 했다. 그가 정계 은퇴 이후 웰다잉(Well-dying) 운동을 시작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풀무원식품 창업자, 재선 부천시장, 5선 국회의원이라는 화려한 이력을 뒤로하고 스스로 아름다운 퇴장을 결정한 원 대표는 자신의 삶을 완성하는 방법으로 웰다잉 운동을 선택했다.

원혜영 웰다잉문화운동 대표는 지난 7일 “여생이 의미 없는 삶이 아닌, 적절한 경제·문화 활동으로 채워진다면 그 사회의 품격도 높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최영재 기자

원혜영 웰다잉문화운동 대표는 지난 7일 “여생이 의미 없는 삶이 아닌, 적절한 경제·문화 활동으로 채워진다면 그 사회의 품격도 높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최영재 기자

 

‘연명의료결정법’ 제정에 앞장서

웰다잉 운동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19대 국회 초반에 우연히 참석한 세미나 때문에 시작하게 됐다. 그날 세미나 주제가 ‘연명의료’에 관한 것이었는데, 김씨 할머니 사례가 소개됐다. 김 할머니는 내시경을 이용한 조직 검사 도중 과다 출혈로 식물인간이 돼 연명의료를 받게 됐는데, 가족들은 김 할머니가 평소에 인공호흡기를 끼고 연명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밝혀 병원에 연명의료 중단을 요청했다. 하지만 병원은 연명의료를 중단할 법적 근거가 없다며 가족들의 요구를 거부했다. 결국 2009년 대법원까지 가서 연명의료 중단이 받아들여졌는데, 판결의 핵심이 자기 결정권의 존중이었다.”
 


이후 연명의료결정법을 발의했다.
 

“대법원 판결이 나왔지만, 그것이 모든 시민에게 적용되기 위해서는 법 개정이 필요했다. 이에 여야 동료 의원 40여 명과 웰다잉 문화 조성을 위한 국회의원 모임을 만들어 2016년에 연명의료결정법을 제정하는 데 성공했다. 지금까지 전국에 270만 명 정도가 사전연명의료의향서에 서명했다고 한다. 국회의원 시절 가장 잘한 일 중에 하나라고 생각한다.”
 
1951년 경기도 부천에서 태어나 경복고, 서울대학교 사범대 역사교육과를 나온 원 대표는 1992년 14대 총선을 통해 국회에 입성한 뒤 민선 2·3대 부천시장, 17·18·19·20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이 중 19대 국회 당시 ‘연명의료결정법’을 제정하는 데 앞장서 인간의 자기 결정권 존중과 존엄성 회복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원혜영(오른쪽) 웰다잉문화운동 대표가 선친 원경선 ‘풀무원 농장’ 원장(2013년 100세로 작고)과 충북 괴산 자택에서 함께한 사진. 임현동 기자

원혜영(오른쪽) 웰다잉문화운동 대표가 선친 원경선 ‘풀무원 농장’ 원장(2013년 100세로 작고)과 충북 괴산 자택에서 함께한 사진. 임현동 기자

최근 강조하는 웰다잉 운동이 있다면.
 

“유언장 쓰기다. 웰다잉은 자기 삶을 자기 뜻대로 잘 마무리하기 위한 준비와 결정이 중요하다. 대표적으로 사전연명의료의향서와 유언장 쓰기가 있을 것이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는 연명의료를 거부할 권리라면, 유언장 쓰기는 자기 재산에 대한 결정이라고 보면 된다. 이 두 가지가 웰다잉의 중요한 축인데, 유언장 쓰기가 확산이 잘 안 되고 있어서 유언장 쓰기 운동에 힘쓰고 있다.”
 

유언장 쓰기 확산이 더딘 이유는 무엇인가?
 

“과거에는 특권층 일부만 물려줄 재산을 가졌고, 일반 시민들은 자식에게 물려줄 재산이 없었기 때문에 유언장을 쓸 일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강남에 수십억짜리 아파트든, 지방에 작은 집이든 자식에게 물려줄 재산을 대부분 갖고 있다. 이제는 유언장을 쓸 이유가 생긴 것이다. 하지만 의식은 아직 못 쫓아오는 것 같다.”
 
조사기관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통상 미국은 유언장 작성 비율이 50% 중반, 일본은 40% 중반으로 집계된다. 반면 하나금융연구소가 2015년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우리나라 유언장 작성 비율은 5% 미만에 불과했다. 복수의 복지·법률전문가는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현재도 이와 비슷한 비율일 것이라고 내다본다.

상속 소송은 증가하는 추세다.
 

“10여 년 사이에 부쩍 늘었다. 최근에는 매해 30만 여 명이 돌아가시고, 5만여 건의 상속 소송이 발생한다. 소송까지 가지 않더라도, 상속 문제로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된 가정도 그에 못지않게 많다. 유산을 남기고 세상을 떠나는 사람은 이러한 가정의 불화를 티끌만큼이라도 원치 않았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유언장 쓰기를 이상하게 보고 기피하는 사회 분위기가 하루빨리 개선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원혜영 웰다잉문화운동 대표는 정계 은퇴 뒤 웰다잉을 위한 구체적인 생활양식을 담은 '마지막 이기적 결정'을 발간했다. [사진 영림카디널]

원혜영 웰다잉문화운동 대표는 정계 은퇴 뒤 웰다잉을 위한 구체적인 생활양식을 담은 '마지막 이기적 결정'을 발간했다. [사진 영림카디널]

노인 4명 중 1명 독거(獨居)

최근 통계청이 발표한 ‘국민 삶의 질 2024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 노인 4명 중 1명이 독거노인으로 조사됐다. 보고서는 “독거노인은 경제 상황이나 신체 건강의 어려움도 있지만 정신 건강도 매우 취약하다. 한국은 OECD 국가 중 노인 자살률이 매우 높은 국가로, 특히 독거노인의 경우 함께 사는 가족이 없기 때문에 외로움이나 우울감을 더 많이 느끼게 된다. 이들에게 경제적 지원뿐 아니라 다양한 측면에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했다.

노인 고독사가 늘어날 것이 우려된다.
 

“우리는 이미 초고령 사회에 들어섰기 때문에 독거노인의 수는 늘어날 수밖에 없다. 수명이 늘면서 노인이 혼자 사는 기간이 더욱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독거노인의 장례 문제가 사회적 이슈로 대두되고 있는데.
 

“과거에는 장례가 집안과 마을에서 행해지는 관습대로 이뤄져 별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독거노인의 경우에는 이러한 것 없이 자신이 모든 것을 결정하고 스스로 처리해야 한다. ‘내가 세상을 떠나면 누가 장례를 치러줄까’, 이에 대한 해법이 있어야 한다.”
 

참고할 만한 해외 우수 사례는 없나?
 

“일본이 좋은 모델을 갖고 있다. 장례에 대한 요구사항 등을 구청이나 군청에 접수하고 소정의 금액을 기탁하면, 내가 죽었을 때 그 돈으로 장례를 치러준다. 해체된 가족 공동체와 마을 공동체의 공백을 지방 정부가 메워주는 것이다. 우리나라도 어서 이런서비스가 행정 서비스의 영역으로 포함돼야 한다.”
 

장례식장을 가보면 조문객 없는 텅빈 빈소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그런데도 빈소를 차리는 것이 적절한지를 놓고 우리 사회가 진지하게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 오히려 빈소 없이 장례식, 영결식, 추모식만 하는 것이 남겨진 가족에게 좋을 수도 있다. 일본에서는 이를 직장(直葬)이라고 하는데, 비중이 30%를 넘는다고 한다.”
 

우리 사회가 빈소 차리기를 고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모두가 하니까 울며 겨자 먹기로 빈소를 차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경제적 이유에서도, 조문 올 사람이 없다는 실질적 이유에서도 빈소 차리기는 큰 부담일 수밖에 없다. 이제는 우리도 무조건 빈소를 차리는 문화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문화가 바뀌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관습이 깨진 선례가 있기 때문에 충분히 가능하다고 본다. 웰다잉 운동 중 유일하게 완성된 것은 화장(火葬) 문화다. 불과 20~30년 전만 해도 우리가 상주에게 ‘화장하느냐’고 물어볼 수가 없었다. 당시 화장은 경제적으로 굉장히 어려운 사람들이나 하는  것이라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사람들이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20~30년 사이에 관습이 깨진 것이다.”
 

관습이 깨지는 어떤 계기가 있었나?
 

“많은 분들의 노력이 있었지만, 특히 SK 전신인 선경 최종현 회장의 공이 컸다고 본다. 500억원을 들여서 화장시설을 사회에 기부하고 스스로도 화장을 실천하도록 유언했다. 최 회장의 선구적 정신이 ‘화장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이 하는 것’이라는 관습을 깨뜨려버린 것이다.”
 

원혜영 웰다잉문화운동 대표는 지난 7일 “노인들이 부담 없이 할 수 있는 것 중의 하나가 버킷리스트 쓰기”라고 했다. 최영재 기자

원혜영 웰다잉문화운동 대표는 지난 7일 “노인들이 부담 없이 할 수 있는 것 중의 하나가 버킷리스트 쓰기”라고 했다. 최영재 기자

국회 미래연구원 이사장 위촉돼

최 회장은 우리나라 장묘문화가 산림을 황폐화한다는 사실에 가슴 아파했다고 한다. 이에 본인 임종을 앞두고 “내 시신은 화장하고 훌륭한 화장시설을 만들어 사회에 기증해 장묘문화 개선에 앞장서 달라”고 유언했다. 이에 유가족들은 최 회장의 시신을 화장했고, 500억원을 들여 세종시 은하수공원에 화장 시설을 조성해 2010년 1월 무상 기증했다.

최근 국회 미래연구원 이사장이 됐다. 국회 미래연구원에서 웰다잉 운동 관련 연구를 기대해 봐도 될까?
 

“저출생과 함께 깊이 있게 다뤄야 할 영역 중 하나일 것이다.”
 

저출생으로 인한 노동력 감소에 대응하기 위해 정년 연장 등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다.
 

“절대 인구가 감소하고 있는 상황에서 건강한 60대들이 일할 수 있는 시간과 기회를 더 확대한다는 건 꼭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과거에는 환갑(還甲)이 지나면 노인 취급했지만, 요즘에는 그렇지 않다. 수명이 연장되면서 비례해서 건강 수명도 늘어났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이 60세 초반에 은퇴한 뒤 최소한 5~10년은 건강하게 경제 활동할 수 있다. 올해는 우리 사회가 국제 기준 초고령사회에 진입하는 원년이다. 노인 인구가 1000만 명이 넘어섰다. 전 인구 중 20% 이상이 노인이다. 은퇴 이후의 삶을 우리는 흔히 자투리 삶이라고 뜻에서 여생(餘生)이라고 한다. 이 여생이 의미 없는 삶이 아닌, 적절한 경제·문화 활동으로 채워진다면 그 사회의 품격도 높아질 것이다.”
 

주변에 쉽게 권할 수 있는 웰다잉 운동이 있다면.
 

“노인들이 부담 없이 할 수 있는 것 중의 하나가 버킷리스트 쓰기다. 노인들은 인생 1막에서 강요된 목표에 따라 살아온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니 인생 2막에서는 삶의 목표를 스스로 재미있게 설정하는 버킷리스트 쓰기를 많이 권하고 있다.”
 

버킷리스트 쓰기를 시작할 어르신들에게 줄 수 있는 팁은?
 

“실천율을 높이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간단한 것부터 하는 것이 좋다. 나도 처음에는 친구들과 부부 동반으로 전국 여행을 다니려고 했는데, 한 달에 한 번 갈까 말까 하게 되더라. 그래서 요즘에는 지하철을 타고 갈 수 있는 1일 코스를 정해서 매일 실천하고 있다. 효자동 길 걷기 등 테마를 정해서 가면 더욱 좋을 것이다. 인터뷰를 읽고 계시는 분들이 이를 계기로 작은 것이라도 많이 실천했으면 좋겠다.”
 

최현목 월간중앙 기자 choi.hyunmok@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