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일(현지시간) 미국 메릴랜드주 볼티모어항에 먹구름이 낀 가운데 수입 물품을 실은 대형 컨테이너들이 적재돼 있다. 볼티모어=김형구 특파원
지난 25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DC에서 차로 1시간여 달려 도착한 메릴랜드주 볼티모어항. 대서양과 미국 본토를 잇는 볼티모어항은 2023년 승용차ㆍ소형트럭 약 85만대를 하역하는 등 2011년부터 13년 연속 미국 최대 물동량을 기록한 미 동부 최대 수출입 관문이다.
유럽산 자동차나 아시아에서 쏟아져 오는 공산품 등 수입 물품이 볼티모어항에 하역된 뒤 10톤급 이상 대형 화물트럭에 옮겨져 미국 북부와 남부, 중부 곳곳으로 실려 나간다. 볼티모어항이 미 동부 물류의 심장으로 불리는 이유다.
그런 볼티모어항에 먹구름이 잔뜩 끼었다. 트럼프 행정부의 ‘롤러코스터 관세’ 때문이다. 수출입 경기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수입 물품 하역이 급감했고 지역 일대 경기도 눈에 띄게 위축됐다. 볼티모어 던독 해양 터미널 입구에서 중앙일보와 만난 화물 운전기사 네이선 브룩스는 “경기가 한창 좋을 때는 터미널 게이트 진입을 기다리는 화물트럭이 2마일(3.2㎞) 이상 기다랗게 줄을 섰는데 요즘은 반토막이 났다”고 말했다.
지난 3월 27일(현지시간) 미국 메릴랜드주 볼티모어항에 독일에서 수입된 메르세데스 벤츠 차량이 열을 맞춰 주차돼 있다. AP=연합뉴스
수입 물품의 행선지는 따로 있었다. 미국 세관 승인으로 관세를 적용받지 않으면서 외국산 수입품을 일시적으로 보관할 수 있는 ‘대외무역지대(Foreign Trade ZoneㆍFTZ)다. 일명 ‘보세 창고’로도 불리는데, 수입 물품에 고율 관세가 부과될 때 수입업자가 수입품을 한동안 국내에 풀지 않고 임시로 FTZ에 보관하는 방식을 쓴다.
축구장 277개 면적 ‘보세 창고’ 이용 급증
볼티모어 FTZ를 운영하는 볼티모어시 개발공사의 래리사 샐러맨차 전무이사는 “트럼프 대통령 취임 이후 볼티모어항에서 하역된 수입품 상당수가 FTZ로 직행한다”고 말했다. 절세 효과를 위해서다. 던독 터미널에 인접한 볼티모어 FTZ는 대형 창고와 야적장 형태로 운영되는데 면적이 489에이커로 축구장 277개에 맞먹는다. 취재팀이 찾은 이날 던독 터미널 주변 야적장에 수백 대의 경트럭이 열 맞춰 주차돼 있었다. 대형 창고 안에는 신발ㆍ장난감ㆍ의류 등 잡화류나 가전제품 등이 주로 보관돼 있다고 한다.
25일(현지시간) 미국 메릴랜드주 볼티모어항의 던독 해양 터미널에서 대형 크레인을 이용한 화물 하역 작업이 이뤄지고 있다. 볼티모어=김형구 특파원
트럼프 행정부가 ‘관세폭탄’을 예고했다가 발효 직전 또는 직후 거둬들이는 등 예측 불허 상황이 이어지자 수입 물품을 FTZ에 임시 보관하려는 기업들이 급증하고 있다. 샐러맨차 이사는 “관세율이 치솟고 또 수시로 바뀌면서 FTZ 이용을 원하는 기업들이 지난해 대비 2~4배 늘었다”며 “최소 한 달 정도는 트럼프 관세 정책을 지켜보며 수입품을 임시 보관하겠다고 생각하는 업체들”이라고 했다.
오는 29일로 출범 100일을 맞는 트럼프 행정부가 바꿔놓은 풍경은 비단 볼티모어항뿐만이 아니다. ‘아메리카 퍼스트’를 앞세운 트럼프 대통령 취임 이후 지금까지 약 100일을 읽는 핵심 코드는 ‘파괴’다. 그의 재집권 이후 미국 사회와 국제 질서가 완전히 재편됐다는 점에서다.
한국과 같은 동맹국도 예외가 없는 ‘트럼프발 관세전쟁’은 자유무역에 기반한 국제 통상 질서를 뒤흔들며 극단적 보호무역 체제로 돌려놨다. 민주주의와 자유를 수호하는 리더십을 스스로 내려놓고, 전통적 동맹 체제에 균열을 내면서 철저히 국익만 추구하겠다는 트럼프식 국수주의의 면모가 더해지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6일(현지시간) 바티칸에서 열린 프란치스코 교황 장례식을 마치고 뉴저지주 뉴왁 국제공항에 도착해 취재진을 향해 제스처를 취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우크라이나 전쟁 휴전 중재자 역할을 자임하며 친푸틴에 기운 행보는 자유민주 진영의 리더로서 미국이 구축한 글로벌 위상마저 흔들리게 했다. 지난 2월 말 백악관을 찾은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을 향해 “미국에 감사해 하지 않는다”며 전 세계가 보는 앞에서 공개적 면박을 주고 사실상 쫓아낸 것이나 우크라이나 전쟁 3주년을 맞아 러시아 침략 책임을 담은 유엔 총회 결의안에 미국이 러시아ㆍ북한 등과 함께 반대표를 던진 것은 미국의 ‘변화’를 상징적으로 드러낸 장면이다.
에반스 리비어 전 미 국무부 동아태담당 수석 부차관보는 중앙일보 인터뷰에서 “트럼프 행정부의 정책ㆍ결정ㆍ외교는 2차 세계대전 이후 80년 동안 형성된 미국 주도 국제 질서를 단 100일 만에 와해했다”고 짚었다. 그러면서 “딘 애치슨 전 국무장관이 2차 대전 이후 국제 질서를 만드는 데 기여한 자신의 역할을 정리하는 회고록을 쓰며 책 제목을 『창조의 순간(Present at the Creation)』이라고 지었는데 수년 내 어떤 진취적 작가가 트럼프의 첫 100일을 두고 『파괴의 순간(Present at the Destruction)』이라는 제목의 책을 펴낼 것”이라고 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 첫날 우크라이나 전쟁과 신중동 전쟁을 끝내겠다고 자신했던 것과는 달리 ‘두 개의 전쟁’ 휴전 협상은 지지부진하다. 오히려 미국 내 여러 개의 전선이 다층적으로 그어지며 트럼프 대통령의 스텝을 꼬이게 만드는 형국이다. 불법 이민자 강제 추방 과정에서 벌어진 인권 침해 논란, 연방정부 공무원 대규모 구조조정 논란, 반유대주의 방치 등을 명분으로 한 대학 보조금 중단 압박 논란, 전임 조 바이든 정부가 중시한 정치적 올바름(PC) 및 DEI(다양성ㆍ형평성ㆍ포용성) 정책 폐기 논란 등이 확산되면서 반(反)트럼프 목소리가 갈수록 커지고 있다. 이미 취임 직후 역대 미 대통령 가운데 최저 수준(47%)이었던 트럼프 대통령 지지율은 취임 100일을 앞두고 44%(갤럽 조사)로 떨어지는 등 하락세를 면치 못하는 상황이다.
트럼프 2기 행정부의 외교 노선을 두고는 ‘동맹 체제의 붕괴’가 아니라 ‘동맹 체제의 변화’ 측면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시각도 없지는 않다. 미 싱크탱크 랜드연구소의 브루스 베넷 선임연구원은 중앙일보 인터뷰에서 “사실 미국은 수십년간 두 개 이상의 동시다발적 분쟁은 피할 수 있는 것이라는 전제 아래 군사력을 과도하게 투입해 왔고 이는 위험한 접근 방식이었다”며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의 동맹국들에 더 많은 안보 책임을 독려하는 것은 다소 충격이긴 하겠지만 더 안정적인 세상을 만드는 데 도움될 수 있는 아이디어”라고 했다.
문제는 아직 남아 있는 트럼프 대통령 임기 3년 9개월간 펼쳐질 미래다. 특히 트럼프 대통령이 우크라이나 휴전 협상을 마무리하면 다음 관심사는 북한이 될 거란 전망이 나온다. 한반도가 ‘트럼프 스톰’의 한복판에 들어설 가능성이 크다는 의미다. 리비어 전 부차관보는 “트럼프는 북한 김정은과 다시 관계를 맺어 북핵 문제에 진전이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고 싶어하는 것 같다”며 “이를 위한 한 가지 접근 방식은 북한과의 군비 통제 회담이며 이는 사실상 북한의 핵 보유를 인정하는 것이므로 위험천만한 발상”이라고 우려했다.
에반스 리비어 전 미국 국무부 동아태담당 수석부차관보. 중앙포토
내치와 외치 면에서 트럼프 대통령에게 국정 운영의 대전환을 요구하는 여론이 높아질 거란 관측도 나온다. 스테판 슈미트 아이오와주립대 정치학 교수는 “국정 기조를 바꾸지 않을 경우 2026년 중간선거에서 여당인 공화당의 소수당 전락과 함께 트럼프 대통령의 국정 운영 능력 마비를 부를 것”이라며 “초당파적 정치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앞으로 분출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볼티모어=김형구 특파원 kim.hyounggu@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