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조원→0원…180도 뒤집힌 포항지진 손배소 판결, 왜

13일 대구고법 정문에서 포항지진범시민대책위가 포항지진 관련 항소심 패소 후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연합뉴스

13일 대구고법 정문에서 포항지진범시민대책위가 포항지진 관련 항소심 패소 후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연합뉴스

역대 집단 소송 중 소송 참가자가 가장 많고 배상금 규모도 가장 커 관심을 모았던 포항 지진 손해배상 청구소송 항소심에서 법원이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1인당 200만~300만원씩 배상하라는 1심 판결이 항소심에서 ‘0원’으로 완전히 뒤집혔다.

대구고법 민사1부(정용달 부장판사)는 12일 지진 피해 포항시민 49만9881명이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포항 지진 손해배상 청구소송 항소심에서 이같이 판결했다.

2심 재판부 “과실 입증하기엔 부족”

재판부는 “포항에서 발생한 지진이 물을 주입한 데 따른 촉발지진인지 여부, 지진이 물 주입 때문에 발생했더라도 이것이 관련 기관의 고의 또는 과실에서 비롯한 것인지 여부가 이번 소송의 쟁점”이라며 “재판부 검토 결과 촉발지진이라는 점은 인정되나 과실을 입증할 만한 내용이 부족하다”고 설명했다.

  
앞서 1심 재판부인 대구지법 포항지원은 2023년 11월 1인당 200만~300만원 정부 배상 판결을 내렸다. 2017년 11월 15일 규모 5.4 지진과 2018년 2월 11일 규모 4.6 지진 등 총 2번의 큰 지진 발생 당시 포항에 거주했으면 300만원, 한 차례만 포항에 있었으면 200만원의 배상을 인정했다. 1심 소송에 참여한 인원은 최초 111명에서 5만여 명으로 늘면서 정부가 지급해야 할 위자료는 약 1500억원에 달했다. 

약 50만명 달하는 소송인단 ‘반발’

이 같은 1심 재판부의 판결이 나오자 포항에서는 대규모 시민운동이 일어나 시민 대부분이 소송전에 동참했다. 범대본이 파악한 소송인단 수는 49만9881명으로 집계됐다. 이는 지진 당시 포항시 전체 인구의 96%에 달한다. 항소심 판결이 1심과 같은 수준인 200만~300만원으로 내려졌다면 배상금은 최대 1조5000억원에 달할 것으로 전망됐다. 소송인단 수가 급증하면서 배상금 또한 1심 약 1500억원의 10배로 늘어난 셈이다.


2023년 11월 22일 오후 경북 포항시 북구 포항지진범시민대책본부 사무실 앞에 포항 지진 정신적 피해 배상 소송 현장 접수를 하기 위해 나온 포항시민들이 길게 줄을 서 있다. 김정석 기자

2023년 11월 22일 오후 경북 포항시 북구 포항지진범시민대책본부 사무실 앞에 포항 지진 정신적 피해 배상 소송 현장 접수를 하기 위해 나온 포항시민들이 길게 줄을 서 있다. 김정석 기자

 
판결 직후 소송을 주도한 시민단체는 강하게 반발했다. 일부 시민단체 회원은 “50만 포항 시민이 고통받고 있다. 재판부 규탄한다”고 고함을 치기도 했다.

포항지진 범시민대책본부(범대본)와 포항11·15촉발지진 범시민대책위원회(범대위)는 대구고법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있을 수 없는 법원 판결에 참담하기 이를 데 없다. 이는 명백한 사법 농단”이라며 “정부는 지금까지 시종일관 책임을 회피하고 있는데 오늘 급기야 법원이 원심을 파기하고 무죄를 선언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판결 불복 시민단체 “대법원 상고”  

이어 “2017년 11월 15일 포항에서 발생한 지진은 명백한 인재(人災)였다”며 “이번 고법 판결은 포항 시민들의 고통과 책임을 철저히 외면한 결과”라고 비판했다. 이들 시민단체는 항소심 판결에 불복하고 대법원에 상고할 계획이다.

이강덕 포항시장도 판결 직후 포항시청에서 입장문을 통해 “이번 판결은 지진으로 극심한 정신적 고통을 겪은 시민들의 현실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 결정으로, 시민 모두가 바랐던 정의로운 판단이 이뤄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깊은 유감을 표한다”고 밝혔다.

이강덕 경북 포항시장이 13일 시청 브리핑룸에서 2017년 11월 포항지진 정신적 피해보상 대구고등법원 항소심 기각에 따른 입장을 발표하고 있다. 이 시장은 "이번 판결은 촉발지진이라는 정부합동조사단의 조사결과를 뒤엎은 판결로 판결문을 면밀히 검토해 상고 여부를 판단하겠다"고 말했다. 뉴스1

이강덕 경북 포항시장이 13일 시청 브리핑룸에서 2017년 11월 포항지진 정신적 피해보상 대구고등법원 항소심 기각에 따른 입장을 발표하고 있다. 이 시장은 "이번 판결은 촉발지진이라는 정부합동조사단의 조사결과를 뒤엎은 판결로 판결문을 면밀히 검토해 상고 여부를 판단하겠다"고 말했다. 뉴스1

 
이 시장은 “정부 스스로 여러 기관을 통해 지열발전사업과 지진의 인과관계를 인정한 상황에서 오늘 항소심 재판부의 판단은 시민들의 상식과 법 감정에서 크게 벗어난 결정”이라며 “이제 우리는 대법원의 최종 판단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덧붙였다.

무려 1조5000억원 배상이 예상됐던 판결이 180도 뒤집히면서 들썩이던 포항 지역 사회에도 찬물을 끼얹은 분위기다. “300만원을 받으면 가전제품을 마련해야겠다”는 소소한 바람부터 “지역 전체에 거액이 풀리면 지역 경기 활성화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라는 기대까지 다양한 시민들의 생각도 김이 새버린 모양새다.

들썩이던 포항에 찬물 끼얹은 판결

포항시 남구 대도동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김성규(54)씨는 “300만원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배상이 이뤄졌다면 요즘처럼 힘든 경기에 도움이 됐을 것 같은데 안타깝다”며 “포항시민 대부분이 겪었던 지진의 경험은 정부 잘못에서 비롯된 인재인데 정부가 책임을 회피하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반면 1인당 배상액을 200만~300만원으로 책정한 1심 판결이 애초에 잘못됐던 것이라는 비판도 나왔다. 익명을 요구한 한 포항 시민은 “지열발전소 건설로 지진이 촉발됐다고 하지만 그 누구도 그걸 예상할 수 없었던 것도 사실”이라며 “지금까지 이뤄진 피해 보상에 더해 정부가 1인당 수백만원씩 배상까지 해야 한다는 주장은 과한 요구인 것 같다”고 했다.

한편 항소심 재판부가 지열발전소 건설 과정에서 지하 암반에 물을 주입해 포항 지진이 촉발됐다는 점은 인정하고 있는 만큼 대법원 상고심의 판단이 다르게 나올 가능성도 있다. 대법원이 포항 지진이 촉발될 것을 알면서도 관련 기관이 고의 또는 과실로 지열발전소 건설 사업을 강행했다고 인정하면 다시 정부 배상 명령이 이뤄질 수 있다.

13일 대구고법 정문에서 포항지진범시민대책본부가 포항지진 관련 항소심 패소 후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연합뉴스

13일 대구고법 정문에서 포항지진범시민대책본부가 포항지진 관련 항소심 패소 후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연합뉴스

 
소송을 제기한 원고 측은 항소심 재판부의 ‘업무 미흡사항과 촉발지진과의 인과관계’ 판단에 주목하고 있다. 항소심 재판부가 “원고들의 주장과 감사원의 감사 결과, 진상조사위원회의 조사 결과 등이 지적한 업무의 미흡사항은 민사상 이 사건 지진의 촉발과 관련한 과실에 해당하지 않고 이 같은 업무의 미흡으로 이 사건 지진이 촉발됐다고 보기도 어렵다”한 대목이다. 원고 측은 이 인과관계를 입증하기 위한 증거 마련에 집중할 것으로 보인다.

모성은 범대본 공동대표는 “포항 지진이 촉발지진이라는 사실은 정부가 조사해서 밝혀내고 시민에게 알린 것인데도 정부의 허위 주장과 거짓 궤변에 사법부가 굴복했다”며 “대법원 상고심에서 제대로 된 판결이 나올 수 있도록 끝까지 싸울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