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기업이라 별로 지적할 게 없을 줄 알았는데….”
지난 3월 26일 경남 창녕군 한 공사장. 안전 관리 실태를 살피러 나온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 전문가와 경남도 안전감찰팀은 혀를 내둘렀다. 안전기준을 지키지 않은 현장이 여럿 포착됐기 때문이다. 현장에 갔던 한 공무원은 “기본적인 것조차 지켜지지 않은 현장이 상당했다"고 말했다. 이 현장은 국내 대형 타이어 제조사의 공장 증축 현장이다.
지난 3월 26일 경남 창녕군의 타이어 공장 증축 공사장에 용접·용단 작업 도구 바로 옆에 불붙기 쉬운 천조각, 종이류 등 페자재와 단열재가 쌓여 있다. 이날 '공사장 안전관리 실태'를 감찰한 경남도와 산업안전보건공단 등은 ″화재 사고 위험이 있다″며 공사 현장에 시정 조치했다. 사진 경남도
현장에는 불꽃이 튀는 용접·용단 작업장 바로 옆에 불붙기 쉬운 천 조각과 종이류 등 폐자재와 단열재가 쌓여 있었다. 하지만
화재 감시자는 없었다. 안전보건규칙상 사업주는 작업 반경 11m 이내에 가연성 물질이 있는 장소 등에서 용접·용단 작업을 하면 화재 감시자를 지정·배치해야 한다. 화기 작업을 감시하고, 화재 시 초기 진화와 근로자 대피 유도를 하기 위해서다.
화재감시자도 없었다…“불꽃 튀면 대형사고 위험 有”
화재 위험만 있었던 게 아니다. 추락 위험 장소에 안전 난간 대신 100㎏ 이상 하중도 견딜 수 없는 로프(밧줄)만 친 곳이 있었다. 감찰을 진행한 행정당국은 “화재 예방 조치가 소홀해
용접·용단 작업 중 발생한 불티가 폐자재, 단열재에 옮겨붙어 대형 사고로 이어질 위험도 있었다”며 “화재 감시자를 지정하지 않았는데 공사 감리자가 제대로 관리·감독하지 않았다”고 시정 조치하도록 했다.
지난 3월 26일 경남 창녕군 타이어 공장 증축 공사장에 있는 철제 구조물에 추락 사고를 방지할 안전 난간 대신 로프만 설치돼 있다. 이날 '공사장 안전관리 실태'를 감찰한 경남도와 산업안전보건공단 등은 ″추락 사고 위험이 있다″며 공사 현장에 시정 조치했다. 사진 경남도
이번 감찰 시기는 부산의 반얀트리 호텔 신축 현장에서 화재 감시자 없이 용접하다 단열재에 불똥이 튀어 대형 화재가 발생한 지 한 달밖에 지나지 않은 때였다. 반얀트리 화재와 서울~세종고속도로 구조물 붕괴 등 사고가 잇따르자, 경남도 등이 사고 예방을 위해 선제적 감찰에 나서 적발한 것이다.
‘반얀트리 화재’ 석 달…부울경 공사장 여전히 ‘위험’
지난 2월 14일 6명이 숨진 ‘부산 반얀트리 화재’가 발생한 지 3개월이 지났다. 하지만 부·울·경 공사장 곳곳에선 ▶화재 감시자 미배치 ▶가연성 물질 주변 무분별한 용접·용단 작업 등 화재 때 드러난 문제점이 상당수 그대로 반복되고 있다. 최근 각 시·도가 진행한 현장 점검에서 안전 기준를 지키지 않은 않은 사례가 다수 적발됐다.
지난 2월 14일 6명이 숨진 화재가 발생한 부산 기장군 반얀트리 호텔 신축 공사장. 사진 부산경찰청
경남도는 지난 한 달 동안(3월 17일~4월 11일) 건설 현장이 많은 창원·진주·거제·함안·창녕에서 산업안전보건공단과 함께 ‘공사장 안전 관리 실태’를 안전 감찰했다. 그 결과, 안전보건규칙 미준수(10건) 등 총 20건의 지적 사항이 확인됐다. 화재 감시자가 없는 창녕 타이어 공장 증축 현장을 포함 4곳이나 파악됐다.
또 안전 난간과 낙하물 방지망을 설치하지 않아 작업자가 추락·낙하물 위험이 노출된 공사장도 있었다. 경남도 관계자는 “문제를 지적하면 ‘해결하겠다’ 말하기보다 ‘사고 안 난다’ 답한 식이어서 경각심을 일깨워줘야 예방할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부산과 울산도 사정은 비슷했다. 부산시가 지난 3월 6~27일 행정안전부, 민간전문가 등과 함께 공사장 안전 관리 실태를 점검한 결과, 205건 지적 사항이 나왔다. ▶안전관리계획과 안전관리자 배치 ▶가스 용접·전기 사용·소방 분야 등 준수 ▶비계·낙하물·추락 방호·고소 작업·철골 작업 등 안전 조치 여부를 집중 점검한 결과였다. 건설 현장에
층마다 소화기를 비치하지 않거나 안전 난간·추락 방지망·배전반 방호울타리를 설치하지 않은 점 등이 주요 지적 사항으로 꼽혔다.
부산시가 지난 3월 민간전문가 등과 진행한 '공사장 안전관리 실태' 점검에서 나온 주요 지적 사항들. 사진 부산시 자료 캡처
울산시가 지난 2월 17~21일 진행한 공사장 안전 점검에서도 ▶화기 작업 주변 소화기·불티방지막 미설치 ▶소화기 유효 기간·적정압 유지 불량 ▶
자재 적치로 피난 통로 확보 미흡 등 화재예방 분야 11건의 위반 사항이 적발됐다. 반얀트리 화재 당시, 다수의 현장 인부들은 “심한 연기로 앞이 안 보이는 상황에서 현장 곳곳에 널브러진 자재 탓에 대피가 어려웠다”고 했다.
경남도는 안전 점검 결과를 바탕으로 지난달 말 고용노동부에 제도 개선안도 건의했다. 화재 감시자 배치의 실효성을 높이기 위해 안전보건규칙(고용노동부령)에 ‘화재 감시자의 전문 교육 이수’를 명문화하자는 내용 등이다.
지난 2월 14일 부산 기장군 반얀트리 호탤앤리조트 공사 현장에서 화재 사고가 일어나기 전의 모습. 페인트통과 철근 등 자재가 현장 곳곳에 쌓여있다. 사진 현장 인부
창녕·부산·울산=안대훈 기자 an.daehu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