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등급 받아도 인서울 못해" 자퇴 사태 부르는 '내신 5등급제'

지난 3월 27일 오전 고교학점제 수업을 시행 중인 서울 관악구 당곡고등학교에서 '스마트콘텐츠 실무' 수업이 진행되고 있다. 뉴스1

지난 3월 27일 오전 고교학점제 수업을 시행 중인 서울 관악구 당곡고등학교에서 '스마트콘텐츠 실무' 수업이 진행되고 있다. 뉴스1

 
지난 3월 서울 강남구의 여고에 입학한 A양은 지난달 중간고사를 치른 뒤 자퇴를 고심 중이다. 중간고사 영어 시험에서 실수가 몇개 나왔는데, 기말시험을 잘 본다고 해도 1등급은 받기 어렵다는 판단 때문이다. 

올해 고1은 고2(9등급제)와 달리 학교 성적(내신)을 5등급으로 나눠 평가한다. 1등급(상위 10%)이 9등급제(1등급, 4% 이내)보다 늘어났는데, 상당수 학생에겐 ‘1등급을 놓치면 원하는 대학·학과에 진학하기 어렵다’는 부담감으로 작용하고 있다. 

중학교 성적이 우수했던 A양은 의대 입학을 목표로 한다. 어머니는 “‘이대로는 의대는 물 건너간다’며 자퇴한 뒤 검정고시를 치고 수능에 ‘올인’하겠다는 딸을 말려야 할지 말지 몰라 답답할 뿐”이라고 하소연했다. 

올해 고1부터 시행되는 고교학점제, 내신 5등급제에 학생·학부모·교사가 혼란을 겪고 있다. 고교학점제는 대학처럼 학생이 흥미와 진로에 따라 과목을 선택하게 하자는 취지다. 고교학점제 도입에 따라 ‘성적을 잘 받을 과목에만 학생이 몰릴 것’이란 우려가 나오면서 내신 등급도 5등급제로 바꿨다. 

“‘인서울’ 모집인원보다 1등급 학생이 많아”

박경민 기자

박경민 기자

 
하지만 도입 취지와 반대로 대입에서의 유·불리 때문에 전학·자퇴를 고민하거나, 심화수업 개설 학교를 찾아다녀야 하는 ‘내신 유목민’이 양산될 거란 우려가 커지고 있다. 


실제로 서울 강남·목동 등 ‘교육 특구’ 고교에선 지난달 중간고사 이후 A양처럼 내신 등급에 대한 우려로 전학이나 자퇴를 고려하는 고1이 늘었다. 강남 일반고 1학년인 B군은 “중간고사에서 1등급을 기대했던 국어·영어·사회에서 2등급을 맞아 강북 쪽 고교로 전학을 갈 지 진지하게 고민 중”이라고 털어놨다. 

이 지역 일반고의 한 진학 담당 교사는 “요즘 상담하는 학생 대다수가 ‘1등급을 받을 자신이 없다’며 자퇴 전학을 고민한다고 털어놓는다”고 전했다. 이런 현상은 지난해부터 감지됐다. 대치동의 한 입시 컨설턴트는 “작년 상담을 왔던 중3 학부모는 이사해 올해 아들을 강동구 일반고로 진학시켰다. 이유는 오로지 내신을 잘 받기 위해서였다”고 전했다. 

2023년 6월 서울 시내의 한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이 하교하고 있다. 교육부는 이날 '공교육 경쟁력 제고방안'을 발표하고 고교학점제 관련 선택과목의 석차등급 병기를 폐지하고 공통과목은 석차 9등급을 병기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뉴스1

2023년 6월 서울 시내의 한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이 하교하고 있다. 교육부는 이날 '공교육 경쟁력 제고방안'을 발표하고 고교학점제 관련 선택과목의 석차등급 병기를 폐지하고 공통과목은 석차 9등급을 병기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뉴스1

 
자율형사립고(자사고)·외고에 진학한 학생도 비슷한 분위기다. 외고 1학년 C군은 수험생 커뮤니티에 “전공어 1등급을 제외하고 다른 과목에서 전부 3등급이 예상되는 점수를 받아 전학을 고민 중”이라며 “기말고사 때 점수를 올려 1학기 내신을 마무리하고 가는 게 나을지, 지금 당장 일반고로 전학을 가서 등급을 올리는 게 맞을지 고민이 된다”고 토로했다. 자녀를 지역 자사고에 보낸 한 학부모는 “열심히 공부해 2등급대로 올린다고 해도 ‘인서울’(서울 내) 좋은 대학에 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차라리 일반고 전학을 가거나 일반고 재수까지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내신 등급을 완화했지만, 학생이 느끼는 1등급에 대한 압박감은 오히려 커졌다는 얘기다. 특히 고1이 치르는 2028학년도 입시부터는 서울·고려·연세대 등이 정시에서도 내신을 일정 비율 반영하기로 하면서 이런 부담감이 한층 커졌다. 

실제로 종로학원이 지난해 전국 2375개 고교의 1~3학년 국어·영어·수학·사회·과학 학업성취도를 분석해보니 평균 A등급을 받은 학생 비율이 18.3%였다. A등급을 받더라도 절반 정도는 1등급(상위 10%)을 받기 어렵다는 뜻이다. 임성호 종로학원 대표는 “기존 9등급제에선 1.3~4등급이면 의·치·약대에 지원 가능했지만, 5등급제에선 1등급 초반대를 받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며 “실제로 전국 1등급 학생 수보다 ‘인서울 대학’ 모집인원이 적은 상황”이라고 했다.

박경민 기자

박경민 기자

 

“택시 타고 옆 학교 갈 판”…‘시간표 짜기’ 컨설팅도

 
고교학점제도 고1 학생과 학부모엔 고민거리다. 희망하는 대학·전공에 맞춰 들어야할 과목이 있어도, 담당 교사가 없거나 수강생이 적어 재학 중인 학교에 개설되지 않을 수 있다. 이 경우 수업이 개설된 학교에 가야 한다. 

이달부터 일선 학교에선 본격적인 선택과목 수업이 시작되는 내년을 대비한 수요 조사에 들어갔다. 서울 서대문구의 일반고 1학년 D군은 “분위기를 보니 내가 관심 있는 인공지능수학, 응용통계같은 심화 과목이 우리 학교엔 개설되지 않을 것 같다. 자칫하면 다른 학교로 택시로 통학할 판”이라며 했다. 수업 선택 폭이 넓은 만큼 수강 신청 자체가 부담이란 호소도 나왔다. 교육지원청의 진로진학 담당자는 “내신 등급 구간이 넓어지면서 변별력이 떨어지자 등급뿐 아니라 수강 이력 등도 평가에 반영하겠다는 대학이 늘고 있다”고 설명했다. 

사교육은 불안의 틈새를 파고들고 있다. 대치동의 한 입시학원에서는 매달 1~2차례 상담으로 선택과목 트랙을 설계한다며 학생을 모집하고 있다. 1회당 상담비는 30만원(1시간), 매월 2번씩 상담을 받을 경우 연간 720만원이다. 경기도 소재 일반고의 고1 부모는 “아이의 진로에 맞춰 시간표를 짜려면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하지만 학교는 진로지도를 할 역량이 부족한 것 같아 학원을 알아보고 있다”고 털어놨다.  

교사노동조합연맹, 전국교직원노동조합 관계자들이 지난 8일 오전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고교학점제 폐지 서명운동 결과 발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뉴스1

교사노동조합연맹, 전국교직원노동조합 관계자들이 지난 8일 오전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고교학점제 폐지 서명운동 결과 발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뉴스1

 

“대입 제도와 학교 변화가 엇박자”

전문가들은 고교학점제, 내신5등급제가 대입제도와 충돌하기 때문에 빚어지는 현상이라고 지적했다. 2018년 고교학점제의 설계에 참여한 김승겸 전 반포고 교장은 “원래 수능과 상대평가의 단계적 폐지를 전제로 준비했는데, 정책 방향이 바뀌면서 엇박자가 생겼다”고 말했다. 당시 문재인 정부는 내신을 절대평가로 전환하고 공통과목에만 석차를 표기하려 했으나, '내신 부풀리기' 우려에 전 과목에 상대평가 등급도 함께 표기하기로 방침을 바꿨다. 구본창 사교육걱정없는세상 정책국장은 “수능과 연계된 일반 선택 과목 위주로 수업 개설이 집중되면서 진로 중심 선택은 무력화하고 있다. 사실상 수능 과목과 평가 방식에 변화가 없는 현 구조에서 고교학점제가 설 자리는 없다”고 지적했다.  

고교학점제 정착을 위한 정부 지원을 확대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김인엽 공주대 교수는 “도시와 농촌, 학교 간 격차 때문에 학생들이 선택할 수 있는 과목 폭이 크게 다르면, 그만큼 교육 기회가 불평등해진다는 의미”며 “학점제의 조기 정착을 위해 행정적, 재정적 지원을 확대해야 한다”고 말했다.

교육부와 시·도 교육청은 학생·학부모 불안을 달래기 위해 무료 상담회, 교사와의 1대1 진로 컨설팅 등을 확대한다는 계획이다. 교육부 관계자는 “시행 초기 다양한 우려가 있을 수 있으나, 교사와 학생·학부모의 의견을 제도에 충분히 반영한면 고교학점제가 교육 현장에 긍정적인 변화를 이끌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