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주출입구를 가로막은 색색의 긴 의자는 전시 '기울인 몸들: 서로의 취약함이 만날 때' 출품작이다. 15일 언론공개회 참석자들이 작품을 살펴보고 있다. 수어 사용자들도 마주 앉아 대화할 수 있는 구조다. 연합뉴스
서울 삼청로 국립현대미술관의 주출입구 야외 계단에 빨강ㆍ파랑ㆍ오렌지색 긴 의자가 놓였다. 출입구를 완전히 가로막아 강렬한 존재감을 보여주는 구조물이다. 선명한 색상은 국립서울농학교 학생들이 골랐다. 미국의 농인 건축가 리처드 도허티의 '농인 공간: 입을 맞추는 의자'로 전시 '기울인 몸들: 서로의 취약함이 만날 때' 출품작이다.
서로의 손과 입을 보며 대화하는 수어 사용자들도 편리하게 마주 보고 앉을 수 있는 구조다. 쉼터가 생긴 대신 출입구가 가로막혀 옆의 경사로를 이용해야 한다. 도허티는 15일 전시 기자간담회에서 "휠체어 사용자들을 위한 램프를 이제는 모두가 천천히 오르게 됐다"고 설명했다. 그의 수어는 영어 수어 통역사, 영-한 통역사와 한국어 수어 통역사의 입과 손으로 전해졌다. 실시간으로 이뤄지는 4중 통역을 모두가 바라보고, 귀를 기울였다.

'농인공간: 입을 맞추는 의자'를 만든 미국의 건축가 리처드 도허티가 수어로 작품을 설명하고 있다. 그의 영어 수어는 수어 통역사의 입으로 발화됐고, 영-한 통역사가 우리말로 옮기면 한국어 수어 통역사가 다시 전달했다. 연합뉴스
장애ㆍ비장애의 경계를 허물고 몸과 감각에 대한 생각을 확장하는 미술 전시가 전국 곳곳에서 열리고 있다. 보이지 않는 사람들은 미술관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시각이나 청각의 결여는 결핍이 아니라 또 다른 감각으로의 확장은 아닐까 질문한다.

알레시아 네오의 '돌봄 색인: 돌봄의 무보(舞譜)'를 보는 관람객. 전시 작품은 눈높이를 맞춰 걸었고 바닥에 점자 블록을 설치했다.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의 전시 ‘기울인 몸들’은 장애가 있는 몸, 나이든 몸, 아픈 몸 등 다양한 몸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 생각 거리를 던진다. 장애ㆍ비장애 작가 15팀의 40여점이 출품됐다. 평소에도 전시장이 많아 방문객들을 헤매게 하는 미술관이지만, 이 전시만큼은 출입구와 통로를 진분홍으로 칠했다. 바닥에는 점자 블록을 설치, 작품의 음성 해설 헤드폰이 걸린 지점도 표시했다.

한국계 미국 미술가 김 크리스틴 선의 '일상의 수어'. 영어 수어의 손동작을 종이에 목탄으로 그렸다.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음성 해설은 저시력ㆍ전맹 관람객의 대화로 구성했다. 전시장 초입에 걸린 김 크리스틴 선의 양면화 ‘일상의 수어’(2022)에 대해 “팔 한 번 벌려 볼래요?” “작품이 엄청 크네요. 둘이 한 작품인가요?”라고 주고받으며 회화의 크기를 가늠하는 식이다. 그림은 수어를 하는 손 모양을 보는 사람 방향에서 그린 것과 말하는 사람 방향에서 그린 두 점으로 구성돼 있다. 목탄으로 그린 그림이 ‘보는 언어’인 수어를 시각화했다. 대화 방식의 다양한 가능성과 아름다움을 조용히 보여준다.
김 크리스틴 선은 7월까지 미국 휘트니 미술관에서 개인전 ‘종일 밤낮으로(All day all night)’를 연다. 청각장애인인 그는 소리를 시각화한 작품을 통해 소리의 비청각적이고 정치적인 차원을 열어 보여준다.

천경우의 사진 '의지하거나 의지되거나' 전시공간에는 사진 속 퍼포먼스처럼 손을 맞잡고 서로를 마주볼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됐다. 권근영 기자
싱가포르의 알레시아 네오는 정신질환이 있는 가족을 돌보는 이들의 몸짓을 담은 영상ㆍ사진ㆍ편지를 내놓았다. 네오는 “치매와 우울증, 양극성 인격장애 등으로 가족이 뿌리째 변하는 걸 지켜보기는 버거운 일”이라며 “같은 경험이 있는 나 역시 작업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느꼈다”고 말했다. 7월 20일까지.

부산현대미술관 전시 '열 개의 눈'에 나온 라움콘의 '한 손 프로젝트'. 뇌출혈 이후 왼손을 쓰게 된 작가가 스스로 식사할 수 있게 고안한 수저다. 관객들도 착용해볼 수 있다. 부산=권근영 기자
부산현대미술관에서도 무장애 전시를 표방하는 ‘열 개의 눈’이 개막했다. 때론 열 손가락이 두 눈을 대신하듯 감각은 고정된 게 아니라 나이나 신체 조건, 환경에 따라 변한다는 의미다. 전시를 위해 미술관은 지난해 부산맹학교 학생들, 돌봄 단체의 발달장애인과 복지사, 감각을 주제로 활동해 온 예술가들과의 워크숍을 벌였다. 미국의 에밀리 루이스 고시오는 시각을 잃은 뒤 희미해 가는 기억 속 감각으로 되살린 아버지ㆍ여동생의 신체 일부를 그리고 빚었다. ‘터치투어’ 프로그램을 신청한 관람객은 만져볼 수 있다.
뇌출혈 이후 왼손으로 창작 활동을 이어가는 듀오 라움콘(Q레이터ㆍ송지은)은 왼손 식사를 도울 수저를 만들었다. 전시장의 사진에 따라 관람객도 직접 착용해볼 수 있다. 누구라도 타인의 도움을 필요로 할 상황이 벌어질 수 있으며, 꼭 최첨단 기기가 아닌 작은 변화와 관심으로도 일상이 나아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9월 7일까지.

시각을 점점 잃게 된 미국의 에밀리 루이스 고시오는 희미해 가는 기억 속 가족들의 신체를 그리고 빚었다. '터치투어' 신청 관객은 직접 만져볼 수 있다. 부산=권근영 기자
광주광역시의 국립아시아문화전당(ACC)에서도 ‘우리의 몸에는 타인이 깃든다’라는 제목의 관객 참여형 전시가 열리고 있다. 시각장애 학생들과 미술 프로젝트를 진행해 온 엄정순의 대형 코끼리 조각 ‘코 없는 코끼리’, 진동과 온도ㆍ촉감을 느끼게 하는 송예슬의 ‘보이지 않는 조각: 공기조각’ 등이 출품됐다. 6월 29일까지.

광주 아시아문화전당에 전시된 엄정순의 '코 없는 코끼리 no.2'. '장님 코끼리 만지기' 우화에서 착안한 작품이다. 사진 국립아시아문화전당
국립현대미술관 이지회 학예사는 “국제박물관협회(ICOM)에서 2022년 박물관의 정의를 개정하면서 ‘모두에게 열려 있어 이용하기 쉽고 포용적’이라는 과제를 포함했다”며 “같은 고민을 해 온 서울ㆍ부산ㆍ광주의 전시 작가들이 모여 대담하는 자리도 마련했다”고 말했다. 작가 대담은 다음 달 14일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