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규 원자력발전소 건설이 예정된 체코 두코바니에 원전 냉각기가 가동 중인 모습. 두코바니=임성빈 기자
전 세계에서 향후 짓기로 계획된 원전 규모가 최대 700기에 달하는 등 글로벌 원전시장이 확대되면서 ‘K원전’도 일대일우(一代一遇)의 기회를 맞았다. 하지만 치열한 경쟁 속에서 글로벌 시장 주도권을 잡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이 많다.
28일 세계원자력협회(WNA)에 따르면, 현재 전 세계에서 정부 등이 신규 원전 도입 의사를 밝힌(proposed) 규모는 307기다. 계획을 세우고, 인허가 등을 진행 중인(planned) 109기를 포함하면 400기가 넘는다. 여기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최근 원전 용량을 2050년까지 현재의 4배 수준(400GW·기가와트)으로 확대하기로 하면서 향후 계획된 원전 규모는 최대 700기에 달할 전망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의 원전 규모를 현재 약 100GW(92기) 수준에서 300GW를 늘리기로 했는데, 이럴 경우 1000MW(메가와트)급 대형원전 300기를 추가로 지을 수 있다. 현재 가동 중(439기)이거나 건설 중인 원전(67기)을 고려하면 향후 원전 규모는 현재의 2.5배 수준까지 확대된다. 그야말로 ‘원전 르네상스’가 열리는 셈이다.

정근영 디자이너
원전 도입 계획은 쏟아지는데, 기술을 가진 국가는 제한적이다. 원전은 1기당 수조원의 건설비용이 드는 사실상 국가주도산업이다. 대형 원전의 설계부터 시공·운영까지 가능한 원전 수출국으로 대상을 좁히면 한국·미국·프랑스·러시아·중국·일본·캐나다 등 7개국에 불과하다. 이들이 계획된 원전 700기를 사실상 나눠 짓는 구조다.
‘원전 르네상스’에 K원전에 대한 기대도 커지고 있다. 국내에서 원전 26기를 운영 중인 한국은 2009년 UAE(아랍에미리트) 바라카 원전을 시작으로 글로벌 수주 시장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특히 한국은 바라카 사업에서 공사기간(on time)과 예산(within budget)의 준수로 경쟁력을 인정받았다. 한국은 1999년 APR1400 모델 독자개발 선언 이후 까다로운 미국(NRC·2019년)와 유럽(ENSREG·2023년) 인증을 모두 받았다. 기술의 국산화율은 95% 이상이다. 건설·설계·정비·연료생산까지 수직계열화된 생태계를 보유한 것도 큰 장점이다.
하지만 K원전이 글로벌 시장 주도권을 잡기 위해서는 장애물도 많다. 우선 한국은 상대적으로 저렴한 공사비를 수주 경쟁력으로 내세우고 있는데, 마진(순익)이 크지 않은 ‘저가 수주’에 대한 우려가 그만큼 크다. 이번 체코 원전 수주 때 경쟁했던 프랑스(EDF)가 계약 절차를 문제 삼는 것도 한국이 정부 보조금으로 가격 경쟁력을 키운다는 인식이 있어서다.
한전과 한수원으로 이원화된 원전 수출 판로도 불안요소다. 2000년 분사한 한전과 한수원은 그동안 원전 수출 기능을 나눠 가졌지만 주도권을 놓고 수시로 충돌했다. 특히 바라카 원전에 함께 참여한 양사는 추가 비용 지급 문제로 갈등을 빚다 최근 런던국제중재법원(LCIA) 중재 절차에 돌입했다.
글로벌 시장에서 플레이어는 적지만, 경쟁은 더 강도 높다. 원전업계에선 “유럽 시장의 강자인 프랑스가 한국의 유럽 진출을 계속해서 어렵게 만들 것”이라고 지적한다. 또한 동유럽·아시아·아프리카 등 시장에선 러시아·중국의 영향력이 크다. 러·중은 원전 동맹을 맺고 해외 수주나 핵연료 조달 등을 협력하고 있다.
![원전 세일즈에 나선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왼쪽)이 26일 하노이 주석궁에서 르엉끄엉 베트남 국가주석과 악수하고 있다. 베트남은 원전 개발을 추진 중이다. [AP=연합뉴스]](https://pds.joongang.co.kr/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2505/29/75c7c15a-1916-4ef0-8230-7ff19af70ef1.jpg)
원전 세일즈에 나선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왼쪽)이 26일 하노이 주석궁에서 르엉끄엉 베트남 국가주석과 악수하고 있다. 베트남은 원전 개발을 추진 중이다. [AP=연합뉴스]
치열한 경쟁의 상징적인 사례가 베트남이다. 원전 4기 도입을 계획 중인 베트남에서는 6개국의 경쟁 구도가 펼쳐지고 있다. 베트남은 2016년 러시아·일본과 계약이 근접한 상황에서 사업을 중단했는데, 지난해 11월 사업을 재개하면서 기존 러시아·일본은 물론 다른 국가와도 협의 채널을 만들고 있다.
최근 베트남 정부는 미국과 관세협상 카드로 원전을 내세우고 있다. 응우옌 홍 지엔 베트남 산업무역부 장관은 “베트남과 미국 간 무역 균형을 이루는 데 (원전이) 중요한 원동력이 될 것”이라고 했다. 프랑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지난 26일 베트남을 방문해 르엉 끄엉 국가주석을 만나 원전 세일즈를 펼쳤다. 베트남과 경제·정치적으로 친밀한 중국도 관심을 보이고 있다. 한국은 한국전력이 뛰고 있다. 한전 관계자는 “향후 베트남 정부 인사를 국내 원전시설에 초청해 설명회를 개최하는 등 수주활동을 전개해 나갈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정부의 일관된 정책과 적극적인 지원이 절실하다. 원전 건설은 수십 년에 걸친 장기 프로젝트지만, 한국은 정권 교체마다 정책 기조가 탈원전(문재인 정부)과 탈탈원전(윤석열 정부) 등으로 급변하면서 시장에 혼란을 주고 있다. 실제 이번 대선에서도 “원전은 위험하고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와 원전 확대를 주장하는 김문수 국민의힘 후보 등의 입장이 엇갈린다.
정동욱 중앙대 에너지시스템공학부 교수는 “원전 300기를 짓는 미국 시장에 뛰어들 수 있는 국가는 사실상 한국·프랑스·일본 정도”라며 “미국이 한국의 조선업에 관심을 갖는 것처럼 차기 정부에서 외교력을 발휘해 K원전의 경쟁력을 미국 측에 잘 설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우선 국내 수요가 받쳐줘야 원전 생태계가 유지되고,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력도 커질 수 있다”며 “차기 정부에서도 원전이 필요하다는 기조를 유지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