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탄광의 종언
![경동탄광에서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작업 중인 광부. 사진작가 전제훈의 '셀카'다. [사진 전제훈]](https://pds.joongang.co.kr/news/component/joongang_sunday/202506/14/49c99ddc-8a70-4d09-b42e-d8d712855cda.jpg)
경동탄광에서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작업 중인 광부. 사진작가 전제훈의 '셀카'다. [사진 전제훈]
전옥화(79)씨는 탄을 골라내는 선탄부였다. 막장을 파는 굴진부, 탄을 캐는 채탄부, 탄을 나르는 운탄부와 함께 광부의 한 축을 맡았다. “탄가루가 입안에서 뭉칠 정도로 쉴 새 없이 일했죠.” 그가 일했던 강원도 삼척시 도계 대방광업소를 함께 찾았다. 20년 만에 온다고 했다.
![지난달 30일 강원도 삼척시 도계광업소 도계갱구 입구. 지난 2월에 이미 마지막 채탄 작업을 했고 이후 정리 작업 중이었다. [사진 전제훈]](https://pds.joongang.co.kr/news/component/joongang_sunday/202506/14/b0fd835a-8cb3-412a-81b3-cdc266243a7a.jpg)
지난달 30일 강원도 삼척시 도계광업소 도계갱구 입구. 지난 2월에 이미 마지막 채탄 작업을 했고 이후 정리 작업 중이었다. [사진 전제훈]
![도계광업소 광부들이 지난달 30일 폐광을 앞두고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사진 전제훈]](https://pds.joongang.co.kr/news/component/joongang_sunday/202506/14/bd3f80d2-d6fd-479a-b8dc-fbb636faaa58.jpg)
도계광업소 광부들이 지난달 30일 폐광을 앞두고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사진 전제훈]
“여기도 쫄딱 구뎅이(작은 탄광), 저기도 쫄딱 구뎅이.” 수풀에 가려지고 흙과 바위로 메워져 대체 저기에 탄광이 있었나 싶었다. 1989년 석탄산업합리화 정책 이전 탄광 수는 347개. 실제론 2~3배에 달하는 탄광이 있었단다. 하지만 이달 말 도계광업소가 89년 만에 문을 닫으면 대한석탄공사 산하 국영 탄광은 이제 없다. 민영인 경동탄광 상동광업소 한 곳만 남는다.
“경동탄광도 2년 안에 문을 닫습니다. 제가 거기서 32년간 일했잖아요. 최초의 탄광인 평양사동탄이 생긴 지 124년 만에 ‘0’이 되는 거죠. 가히 ‘탄광의 종언’이라고 해도 무방합니다.”


1903년 평양 사동탄광이 개발된 이후 120여 년. 우리나라 탄광이 줄줄이 사라지고 있다. 2025년 6월 대한석탄공사의 마지막 '국영' 광업소인 도계광업소가 폐업하고, 2년 뒤인 2027년 하반기에는 마지막 '민영' 광업소인 경동 상덕광업소도 문을 닫는 것으로 알려졌다. '블랙 다이아몬드'로 부른 석탄산업의 종말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도계역 근처의 선탄장(석탄을 열차에 선적하는 곳) 이미 20여 년 전부터 사용이 중지된 채 검은 흔적만 남기고 있다. 김홍준 기자

“196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 20여 년이 탄광의 전성기였소. 개가 지폐를 물고 다녔어요. 나는 못 봤지만, 허허.” 이 회장이 쓴웃음을 지은 이유가 있었다. 마지막 광부들이 있는 도계의 위기 때문이다.
“1970년대 도계 인구는 4만5000명이 넘었어요. 주민등록상이니 실제론 6만 명에 달했을 겁니다. 그런데 지난달은 8900여 명입니다. 그중 강원대 삼척캠퍼스 학생이 2000명. 곧 여름방학에 접어들면 거리가 휑해집니다. 파독 광부 훈련소였던 도계가 이렇게 되다뇨. 일자리가 있어야 미래가 있어요. 퇴직한 광부를 재교육해도 도계에 일할 기반이 없는데 여기 있겠습니까. 다른 곳으로 나가죠. 남는 건 노인입니다. 저 앞에 도계중학교 관악부는 최민식 주연의 영화 ‘꽃피는 봄이 오면’의 모델이 될 정도로 실력이 좋았습니다. 지금은 인구 감소로 학생 수가 줄어 제대로 운영되지 않아 안타깝네요.”
노인이 많다는데, 도계의 평균 연령은 50.4세에 ‘불과’하다. 이곳에 사는 20대 초반 대학생들이 평균 연령을 끌어내리기 때문이다. 지난해 문 닫은 장성광업소 철암역두 선탄장이 있는 태백시 철암동은 60.9세다. 서울 자치구 중 평균 연령이 가장 높은 강북구는 48.9세다.
지난 5일 오후 6시30분. 연휴를 앞두고 흥청거릴 시각. 도계는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정도로 대학생 몇 명만 거리를 오갈 뿐 한산했다.

폐광을 앞둔 도계광업소가 있는 강원도 삼척시 도계읍은 한참 흥청거릴 오후 6시 30분에도 거리가 한산했다. 상가 공실도 많다. 김홍준 기자

이달 말 폐광되는 강원도 삼척시 도계광업소 장미사택 골목. 1970년대 광부들 숙소가 들어선 뒤 늘 북적였던 이곳도 이젠 적막만 감돌고 있다. 김홍준 기자
기후위기가 부채질한 사양산업. 석탄 발전 비중도 어느새 3위로 내려앉았다. 지난해 국내 총 발전량 59만5601GWh 중 원자력이 18만8754GWh(31.7
“저도 2년 전 명퇴했습니다. 명퇴자는 셋 중 하나입니다. 백수거나, 저처럼 다행히 자영업을 하거나, 아니면 떠나거나.” 강호택씨의 말은 ‘근로자’가 거의 없다는 뜻. 그는 철암탄광역사촌에서 편의점을 운영한다. “아버지가 광산 노동자였던 이재명 대통령이 공약으로 청정에너지·의료·관광 등 새로운 성장 기반을 마련하겠다고 했는데, 특별히 새롭지 않습니다. 다 논의되던 거죠. 말만 나오고, 지지부진하다는 방증입니다. 좀 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방안이 필요합니다.”

“청정에너지 구호보다 당장 저 앞에 탄가루 날리는 선탄장부터 손봐야 할 것 같아요. 철암역에 무궁화호가 하루 2회 왕복합니다. 다음 열차를 탄다고 관광객은 고작 25분 머무르다 갑니다. 그 시간에 국수 한 그릇이라도 먹겠어요

강원도 태백시 철암역 인근의 철암역두(鐵岩驛頭) 선탄장과 철암탄광역사촌. 철암역두 선탄장은 장성광업소 산하로 1939년부터 가동된, 우리나라 최초의 선탄시설이다. 2002년 5월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가 됐다. 사진 왼쪽의 철암천 위에 기둥을 세워 만든 '까치발'은 과거 탄광촌의 번성을 보여주는 건물이다. 원래 있던 건물은 상가로 활용하고, 철암천 쪽으로 공간을 확장해 지층 아래 살 집을 마련하면서 건물을 지지하기 위해 까치발처럼 기둥을 만들었는데, 이곳이 ‘까치발 건물’로 부르게 됐다. 김홍준 기자
“바람 심한 날이면 하루 4t의 탄가루가 날립니다. 그런데 태백시 장성광업소에서 캐낸 석탄은 이곳 철암동까지 지하로 이동하기 때문에 탄가루가 날리지 않습니다. 장성에선 흰 운동화를 신고 철암에선 검정 운동화를 신는다는 뼈아픈 농담도 있죠.” 정연수 탄전문화연구소장은 “이런 스토리라인으로 탄광 유산을 키워 관광부터 활성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모두가 근대산업문화유산인 철악역두 선탄장과 태백 장성동의 장성이중교는 일제 수탈의 아픔을 겪었고, 광부 남편을 잃은 대가로 받은 선탄부 직업은 쓰라린 특혜였다고 정 소장은 평한다. 막장은 모순의 공간이었다. 구타와 얼차려, 사고가 빈번했지만 대한민국 산업의 희망이었다.
“탄광은 도시 주변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모이는 경제적 막장이었어요. 탄광촌은 가장인 남편에 전적으로 의지해야 생존이 가능했던 열악한 사회 구조였습니다. 가장 약자는 여성이었고요.”

강원도 태백시 철암역 인근의 철암역두(鐵岩驛頭) 선탄장은 장성광업소 산하로 1939년부터 가동된, 우리나라 최초의 선탄시설이다. 2024년 6월 장성광업소가 문을 닫았지만 이전에 캐낸 석탄은 아직도 운반하고 있다. 철암역두 선탄장은 2002년 5월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가 됐다. 김홍준 기자
탄광 전성시대를 열었던 1960년대. 광부는 전국에서 모였다. 탄가루 마시며 뼈 빠지게 일해 돈을 싸안고 돌아갈 꿈이었다. 하지만 대부분 그러지 못했다. 탄광의 시스템 혹은 환경 때문이었다.
탄광에서는 돈 대신 쌀로 임금을 치르기도 했다. 돈 반, 쌀 반으로 주기도 했다. 그나마 한 달, 두 달 늦게 준 곳이 부지기수였다. 그런데 광부들은 ‘쓸 곳’이 많았다. 정 소장은 “당시 ‘탄광 근처가 흥청거렸다’ ‘개가 지폐를 물고 다녔다’는 표현을 쓰는데, 광부들은 씀씀이가 컸어요. 그들은 ‘오늘도 살았다’며 술로 버텼고, 사고 시 자신을 구할 동료와 술로 서로 이어졌어요. 흥청거릴 수밖에요. 가전과 생필품도 사야 했죠. 외상을 하고, 가게와 ‘맞장부’라는 걸 작성해 갚아나갑니다. 이자가 붙었어요. 5부까지요. 그런데 탄광에서는 월급을 늦게 줍니다. 빚만 쌓이는 거죠. 광부 99%는 그랬습니다.” 나머지 1%의 상당수는 사고로 죽었다.
![석탄을 고르고 있는 선탄부들. [사진 전제훈]](https://pds.joongang.co.kr/news/component/joongang_sunday/202506/14/5ad7b8c0-118e-43ee-93db-2effcf9b94be.jpg)
석탄을 고르고 있는 선탄부들. [사진 전제훈]
‘진정한 위너(승자)’는 쌀장수였단다. 광부들은 회사에 임금 대신 지급한 쌀을 현금으로 바꿨다. ‘쌀깡’이었다. 쌀장수는 탄광에 판 '월급용' 10만원어치 쌀을 광부에게 7만원에 다시 사들였다. 대부분의 광부는 이런 상황의 악순환에 갇혀 돈을 모으지 못했다. 고향이나 타지로 떠날 엄두도 안 났다. 그래서 계속 탄광 지역에 살았고, 다른 산업 기반이 없는 그들의 아들들은 광부가 될 가능성이 컸다. 아주 극소수는 ‘독일 병정’이라는 빈축을 들으며 엄격히 생활해 돈을 거머쥐고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정 소장은 "나도 역시 태백에서 나고 자란 광부의 아들이자 전직 광부"라고 했다. 그는 10년간 일한 장성광업소에 받은 퇴직금을 쏟아부어 탄전문화연구소를 차렸다. 정 소장은 "대체산업은 그것대로 물색하되, 지역 정체성을 살린 관광 자원 활성화가 필요하고 수익은 그 다음 문제"라고 했다. 그래서 우리나라 탄광 문화를 유네스코에 등재시킨다는 목표다.
70~80년대 한 해 평균 175명 사망사고
![1960년대 탄광촌의 모습. [중앙포토]](https://pds.joongang.co.kr/news/component/joongang_sunday/202506/14/56c2661d-6a79-4dff-ac35-f0366f91ed4e.jpg)
1960년대 탄광촌의 모습. [중앙포토]

탄광
이구호(79)씨도 사키야마였다. 경북 예천에서 농사를 짓다 돈 벌러 가자는 동서들의 꾐에 태백에 왔단다. 37세 늦깎이 광부였다. “우리 식구가 6명이었소. 아내가 매일 도시락을 8개나 쌌지. 아내가 참 고마워. 그렇게 잠깐 일한다는 게 벌써 40여 년이 지났소, 쿨럭.” 진폐는 광부들의 훈장이자 평생 뗄 수 없는 동반자. 이씨가 텃밭 일을 잠시 멈추고 철암역두 선탄장을 바라봤다.

'대한민국 탄광의 종언' 취재 중 만난 '블랙 다이아몬드 전사'들과 취재원들.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전옥화 시인, 이명숙 문화관광해설사, 정연수 탄전문화연구소장, 이희탁 중앙진폐재활협회장, 강호택 철암동자치위원장, 이구호씨. 김홍준 기자
탄광의 종언. “탄광의 미남은 사키야마다/내일은 어데 가서 뗑깡을 놓나/옹헤야 뎅헤야 탄광이다 사키야마다.” 예비 광부들이 불렀던 ‘탄광가’도, “여기는 삼척이라 우리의 탄광/3억 톤 불이 되어 열을 뿜을 제/이 살림 뻗으리라 삼천만 행복.” 삼척탄광 사가인 ‘삼탄가’도 이젠 탄광과 함께 묻혀버리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