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원 백마고지 전투와 국군 9사단

김정탁 노장사상가
머리 더듬어 피아 판별
야간 백병전 때는 피아를 서로 구분하기 힘들어서 머리를 더듬어 판별했다고 한다. 중공군이 머리를 빡빡 깎아서다. 열흘이란 짧은 기간 전투인데도 국군 사상자가 3400명, 중공군 사상자가 1만4000명이나 됐다. 국군 전사자의 군번만 모아도 한 트럭 분이었다고 하니 중공군의 상황은 이보다 더 심각했다고 본다. 그래서 백마고지 전투의 승리를 가리켜서 ‘피로 쓴 신화’라 말한다.
“조기 종전” 이해 맞아떨어진 미·중
후방 공격 대신 치열한 고지탈환전
395m 높이지만 양보 못할 전략 요충
열흘간 한 3400, 중 1만4000명 사상
국군 9사단, 중 38군 물리쳐 자신감
정예 패배한 중 전쟁사에 짧게 기술
후방 공격 대신 치열한 고지탈환전
395m 높이지만 양보 못할 전략 요충
열흘간 한 3400, 중 1만4000명 사상
국군 9사단, 중 38군 물리쳐 자신감
정예 패배한 중 전쟁사에 짧게 기술
![길게 뻗은 야트막한 백마고지, 주변의 들판이 철원평야다. [사진 김정탁]](https://pds.joongang.co.kr/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2506/17/894642e1-66a0-4c3e-8cb4-05dcd4efe0be.jpg)
길게 뻗은 야트막한 백마고지, 주변의 들판이 철원평야다. [사진 김정탁]
그런데 고지전은 피아 모두에게 엄청난 피해를 주지만 전과는 미미하다. 사상자 수와 비교해 확보하는 땅이 너무 작아서인데 한국전은 1951년 여름부터 고지전 중심으로 펼쳐졌다. 8월의 강원도 양구의 펀치볼 전투와 9월의 피의 능선 및 단장의 능선 전투가 그 시작이다. 펀치볼 전투에서 아군은 1000명의 사상자를, 적군은 1만 명의 사상자를 냈다. 그리고 피의 능선 전투에서 아군은 2500명의 사상자를, 단장의 능선 전투에서 3700명의 사상자를 냈는데 적군은 두 전투를 합해 약 2만5000명의 사상자를 냈다.
![무수한 포격으로 수목이 모두 사라진 뒤 산의 형상이 마치 백마가 누워 있는 모습 같다고 해서 백마고지라 불렸다. 열흘간의 전투에 사용된 양측의 폭탄을 줄 세우면 서울~부산 거리라는 주장도 있다. [사진 김정탁]](https://pds.joongang.co.kr/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2506/17/05c4d41a-74a3-41b4-9451-3c5010b06f01.jpg)
무수한 포격으로 수목이 모두 사라진 뒤 산의 형상이 마치 백마가 누워 있는 모습 같다고 해서 백마고지라 불렸다. 열흘간의 전투에 사용된 양측의 폭탄을 줄 세우면 서울~부산 거리라는 주장도 있다. [사진 김정탁]
한국전이 기동전에서 고지전으로 바뀐 건 미 합참의 변경된 방침 탓이다. 기동전의 하이라이트인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할 때만 해도 유엔군은 맥아더 사령관의 의도대로 38선을 넘어 북으로 쾌속 진격했는데 이는 한반도 통일을 염두에 두고서 벌인 작전이다. 그런데 중공군이 예상을 깨고 참전하자 유엔군의 후퇴가 계속되면서 서울은 다시 뺏기고 전선은 평택-삼척 선까지 밀렸다. 중공군의 1·2·3차 공세가 성공해서인데 이때 미군은 한국전 수행에 자신감을 잃고 한반도 철수를 심각히 고려했다.
미군은 북진 희망, 미 정부는 기피
![백마고지 전투의 승리를 기리는 전승비. [사진 김정탁]](https://pds.joongang.co.kr/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2506/17/c4caaea0-7214-40b0-b2f0-c79ffd63e557.jpg)
백마고지 전투의 승리를 기리는 전승비. [사진 김정탁]
![국군 9사단의 심벌 마크. 백마고지 전투 승리 이후 백마가 심벌이 됐다. [사진 김정탁]](https://pds.joongang.co.kr/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2506/17/7d4468d3-c037-4c3e-b764-81d875d50e3a.jpg)
국군 9사단의 심벌 마크. 백마고지 전투 승리 이후 백마가 심벌이 됐다. [사진 김정탁]
한편 피어슨 유엔총회 의장은 한국전을 끝내는데 침략자의 항복이 꼭 필요하지 않을 수 있고, 공산군이 더 이상의 침공을 멈추면 유엔은 만족한다고 했다. 트뤼그베 리 유엔사무총장도 북한군과 중공군이 공격을 개시한 38선 너머로 쫓겨났으니 유혈사태를 멈출 적절한 때라고 했다. 애치슨 미 국무장관은 38선을 기준으로 신뢰할만한 휴전이 이루어지면 받아들이겠다고 해 유엔 책임자들의 말에 화답했다. 이에 따라 전쟁 목표가 ‘승리’에서 ‘견제’로 바뀌었는데 이는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한 1950년 10월 입장에서 한국전이 발발한 1950년 6월 입장으로 되돌아온 거다.
![백마고지 전투의 ‘삼군신’이라 불리는 강승우 중위, 안영권 하사, 오규봉 하사의 동상. 이들은 배낭에 수류탄과 폭탄을 넣고 중공군 진지에 돌진해 산화했다. 이런 육탄전을 펼친 끝에 백마고지를 탈환했다. [사진 김정탁]](https://pds.joongang.co.kr/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2506/17/c0cf1dcb-8ec9-48b1-aefc-d73db2eb7ac7.jpg)
백마고지 전투의 ‘삼군신’이라 불리는 강승우 중위, 안영권 하사, 오규봉 하사의 동상. 이들은 배낭에 수류탄과 폭탄을 넣고 중공군 진지에 돌진해 산화했다. 이런 육탄전을 펼친 끝에 백마고지를 탈환했다. [사진 김정탁]
한편 미국은 휴전협상에 임하면서 치명적인 전략을 적에게 노출 시키고 말았다. 더 이상의 북진이 없다는 미 합참의 속내를 적이 알아차려서다. 이에 적은 인천상륙작전처럼 자신들의 후방을 공격하는 일이 없을 거라고 안심하고, 전방만 철통같이 방어함으로써 전투가 고지전으로 변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북한이 침략했을 때 미군을 신속히 파견해 한국인에게 매우 고마운 존재였는데 이에 상응하는 평가를 받지 못하는 건 휴전협상 타결에 매달린 나머지 적의 후방을 치는 데 소극적이었기 때문이다.
이기려고도, 지려고도 하지 않은 전쟁
![백마고지 전적기념관에 이르는 진입로. [사진 김정탁]](https://pds.joongang.co.kr/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2506/17/fde358f7-17cb-4a18-a7f6-a768b1a4d4d5.jpg)
백마고지 전적기념관에 이르는 진입로. [사진 김정탁]
백마고지 전투는 큰 희생을 치렀음에도 국군에게는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개전 이후 국군은 중공군에게 계속 밀렸는데 그 정예 부대를 단독으로 물리쳤으니 그때부터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9사단과 격전을 벌인 38군은 군우리에서 미 2사단을 궤멸시켜 펑더화이(彭德懷) 사령관으로부터 ‘38군 만세’라는 축전을 받고 ‘만세군’이란 칭호를 얻은 부대다. 지금은 수도 베이징의 방어를 담당하는 인민해방군의 최정예 부대인 82군으로 거듭났어도 중공군 전사는 38군의 백마고지 전투 패배가 뼈아팠는지 간단히 기술하고 넘어간다. 김일성도 백마고지를 빼앗기자 3일간 식음을 전폐하고 애통해했다고 한다.
국군은 이 전투 승리로 미국으로부터 10개 사단을 증원받을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 현재와 같은 20개 사단 체제를 구축했다. 그런데 백마고지 전투 승리의 주역인 9사단이 1979년 12월 12일 쿠데타에 동원되었으니 선배들의 숭고한 죽음에 먹칠을 한 건 아닌지.
김정탁 노장사상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