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탁의 인문지리기행] ‘승리’에서 ‘견제’로 전쟁 목표 바뀌자 고지가 피로 물들어

철원 백마고지 전투와 국군 9사단

김정탁 노장사상가

김정탁 노장사상가

한국전에서 가장 치열했던 전투를 꼽으라면 백마고지 전투다. 이 전투는 1952년 10월 6일부터 15일까지 열흘간 국군 9사단이 중공군 38군 소속의 3개 사단과 맞서 밤낮으로 싸운 전투인데 12번의 공방전 끝에 고지 주인이 7번 바뀔 정도로 치열했다. 포탄만 27만5000발을 쏴 한국전에서 단위 면적당 가장 많은 포탄을 썼다. 이 작은 고지에 아군이 22만 발, 중공군이 5만5000발을 쏟아부었는데 아군이 포탄을 많이 쓴 건 병력의 열세 탓이다.

머리 더듬어 피아 판별
야간 백병전 때는 피아를 서로 구분하기 힘들어서 머리를 더듬어 판별했다고 한다. 중공군이 머리를 빡빡 깎아서다. 열흘이란 짧은 기간 전투인데도 국군 사상자가 3400명, 중공군 사상자가 1만4000명이나 됐다. 국군 전사자의 군번만 모아도 한 트럭 분이었다고 하니 중공군의 상황은 이보다 더 심각했다고 본다. 그래서 백마고지 전투의 승리를 가리켜서 ‘피로 쓴 신화’라 말한다.

“조기 종전” 이해 맞아떨어진 미·중
후방 공격 대신 치열한 고지탈환전  

395m 높이지만 양보 못할 전략 요충
열흘간 한 3400, 중 1만4000명 사상

국군 9사단, 중 38군 물리쳐 자신감  
정예 패배한 중 전쟁사에 짧게 기술
 


길게 뻗은 야트막한 백마고지, 주변의 들판이 철원평야다. [사진 김정탁]

길게 뻗은 야트막한 백마고지, 주변의 들판이 철원평야다. [사진 김정탁]

백마고지 높이는 해발 395m인데 실제 고지 주변 평지에선 170m에 불과해 정말로 보잘 게 없다. 이런 고지에서 전투가 치열했던 건 전쟁 발발 1년쯤 후부터 전선이 지금의 휴전선 부근으로 고착되자 여기가 전략상 중요해져서다. 이 고지는 철원-평강-김화를 잇는 철의 삼각지대 왼편에 넓게 자리한 철원평야를 한눈에 감제하고, 중부전선 일대의 적 병참선을 효과적으로 차단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를 뺏기면 철원 일대의 아군기지와 보급선이 전부 노출되는 데다 서울-의정부-동두천-연천이 골짜기로 길게 이어져 서울까지 위협받는다.

그런데 고지전은 피아 모두에게 엄청난 피해를 주지만 전과는 미미하다. 사상자 수와 비교해 확보하는 땅이 너무 작아서인데 한국전은 1951년 여름부터 고지전 중심으로 펼쳐졌다. 8월의 강원도 양구의 펀치볼 전투와 9월의 피의 능선 및 단장의 능선 전투가 그 시작이다. 펀치볼 전투에서 아군은 1000명의 사상자를, 적군은 1만 명의 사상자를 냈다. 그리고 피의 능선 전투에서 아군은 2500명의 사상자를, 단장의 능선 전투에서 3700명의 사상자를 냈는데 적군은 두 전투를 합해 약 2만5000명의 사상자를 냈다.

무수한 포격으로 수목이 모두 사라진 뒤 산의 형상이 마치 백마가 누워 있는 모습 같다고 해서 백마고지라 불렸다. 열흘간의 전투에 사용된 양측의 폭탄을 줄 세우면 서울~부산 거리라는 주장도 있다. [사진 김정탁]

무수한 포격으로 수목이 모두 사라진 뒤 산의 형상이 마치 백마가 누워 있는 모습 같다고 해서 백마고지라 불렸다. 열흘간의 전투에 사용된 양측의 폭탄을 줄 세우면 서울~부산 거리라는 주장도 있다. [사진 김정탁]

백마고지 전투에 이어서 벌어진 저격능선 전투에선 사상자 수가 더 많았다. 이 전투는 10월 14일부터 11월 25일까지 6주간 철의 삼각지대 안 금화 오성산 부근서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 아군 전사자가 1096명, 부상자는 3496명이었는데 적 사상자는 약 1만5000명이었다. 적 사상자 수가 아군과 비교해 3배 이상 많고, 또 적 사상자 대부분이 중공군이었음에도 몇 해 전 ‘상감령 전투’라는 제목으로 소위 중국식 국뽕 영화가 만들어져 중국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바 있다.

한국전이 기동전에서 고지전으로 바뀐 건 미 합참의 변경된 방침 탓이다. 기동전의 하이라이트인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할 때만 해도 유엔군은 맥아더 사령관의 의도대로 38선을 넘어 북으로 쾌속 진격했는데 이는 한반도 통일을 염두에 두고서 벌인 작전이다. 그런데 중공군이 예상을 깨고 참전하자 유엔군의 후퇴가 계속되면서 서울은 다시 뺏기고 전선은 평택-삼척 선까지 밀렸다. 중공군의 1·2·3차 공세가 성공해서인데 이때 미군은 한국전 수행에 자신감을 잃고 한반도 철수를 심각히 고려했다.

미군은 북진 희망, 미 정부는 기피

백마고지 전투의 승리를 기리는 전승비. [사진 김정탁]

백마고지 전투의 승리를 기리는 전승비. [사진 김정탁]

그런데 1950년 12월 교통사고로 사망한 워커 미8군 사령관의 후임으로 리지웨이 장군이 오면서 전선에 변화가 생겼다. ‘벼락작전’ 등 일련의 공세를 통해 북으로 조금씩 진격해서다. 또 리지웨이 사령관 후임인 밴 플리트 장군의 활약으로 중공군의 4·5차 공세를 성공적으로 막아냄으로써 유엔군은 1951년 여름 휴전선 부근까지 진격했다. 그러자 미군 장성들 사이에 중공군을 물리칠 수 있다는 자신감이 회복돼 휴전선보다 더 북상하길 바랐다. 이때 북진을 계속했다면 평양-원산 선 아래는 충분히 확보했으리라.

국군 9사단의 심벌 마크. 백마고지 전투 승리 이후 백마가 심벌이 됐다. [사진 김정탁]

국군 9사단의 심벌 마크. 백마고지 전투 승리 이후 백마가 심벌이 됐다. [사진 김정탁]

하지만 미 정부는 이를 허용치 않았다. 유엔군이 38선 부근에 이르자 한국전을 조기에 끝내고 싶어서였는데 6년 전 일본에 무조건 항복을 요구한 것과 너무 다른 조치다. 여기엔 이유가 있는데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압록강까지 진출했어도 맥아더의 장담과 달리 중공군 참전으로 유엔군이 여지없이 무너져서다. 미 육군 사상 가장 큰 패배로 기록되는 2사단의 청천강 부근 군우리 패배가 이를 잘 말해 준다. 장진호 전투에선 미 해병대 사단장의 기지로 파국은 면했어도 맥아더의 뜻대로 계속 진격했다면 해병 1사단의 운명도 같아졌다. 이것이 미 정부에 트라우마로 작용해 정책이 바뀌었으니 맥아더의 대책 없는 북진이 아쉽다.

한편 피어슨 유엔총회 의장은 한국전을 끝내는데 침략자의 항복이 꼭 필요하지 않을 수 있고, 공산군이 더 이상의 침공을 멈추면 유엔은 만족한다고 했다. 트뤼그베 리 유엔사무총장도 북한군과 중공군이 공격을 개시한 38선 너머로 쫓겨났으니 유혈사태를 멈출 적절한 때라고 했다. 애치슨 미 국무장관은 38선을 기준으로 신뢰할만한 휴전이 이루어지면 받아들이겠다고 해 유엔 책임자들의 말에 화답했다. 이에 따라 전쟁 목표가 ‘승리’에서 ‘견제’로 바뀌었는데 이는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한 1950년 10월 입장에서 한국전이 발발한 1950년 6월 입장으로 되돌아온 거다.

백마고지 전투의 ‘삼군신’이라 불리는 강승우 중위, 안영권 하사, 오규봉 하사의 동상. 이들은 배낭에 수류탄과 폭탄을 넣고 중공군 진지에 돌진해 산화했다. 이런 육탄전을 펼친 끝에 백마고지를 탈환했다. [사진 김정탁]

백마고지 전투의 ‘삼군신’이라 불리는 강승우 중위, 안영권 하사, 오규봉 하사의 동상. 이들은 배낭에 수류탄과 폭탄을 넣고 중공군 진지에 돌진해 산화했다. 이런 육탄전을 펼친 끝에 백마고지를 탈환했다. [사진 김정탁]

미국 내 반전 여론도 거셌다. 쉽게 이길 줄 알았는데 미군 희생자 수가 줄지 않아서다. 트루먼 행정부도 이에 압박을 받아 종전 협상을 서둘러야 했다. 중국도 내심 종전을 바랐는데 더 이상의 희생을 감내할 수 없어서다. 소련의 스탈린만 미국과 중국 양쪽 모두의 힘을 소모케 하고 싶어 종전 협상에 소극적이었는데 김일성은 여기에 붙었다. 이것이 휴전협상을 질질 끈 원인이었는데 스탈린이 사망하자 협상은 이내 타결되었다.

한편 미국은 휴전협상에 임하면서 치명적인 전략을 적에게 노출 시키고 말았다. 더 이상의 북진이 없다는 미 합참의 속내를 적이 알아차려서다. 이에 적은 인천상륙작전처럼 자신들의 후방을 공격하는 일이 없을 거라고 안심하고, 전방만 철통같이 방어함으로써 전투가 고지전으로 변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북한이 침략했을 때 미군을 신속히 파견해 한국인에게 매우 고마운 존재였는데 이에 상응하는 평가를 받지 못하는 건 휴전협상 타결에 매달린 나머지 적의 후방을 치는 데 소극적이었기 때문이다.

이기려고도, 지려고도 하지 않은 전쟁

백마고지 전적기념관에 이르는 진입로. [사진 김정탁]

백마고지 전적기념관에 이르는 진입로. [사진 김정탁]

미군 지휘관들도 곤경에 빠졌다. 합참의 지시가 싸우되 열심히 싸우지 말라거나 지지도 말되 이기지도 말라는 식이어서다. 그래서 한국전을 가리켜서 ‘이기려고 하지도 않지만 지려고 하지도 않은 전쟁’이라 평했다. 아니나 다를까 판문점에서 지루한 말싸움만 2년간 계속되었으니 미국 측의 전략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한국전이 미국인에게 ‘잊힌 전쟁’이 된 것도 혹시 이 때문이 아닐까? 유엔군 측 협상 대표인 조이 제독은 한국전이 끝나고 얼마 되지 않아 암으로 사망했는데 적의 말장난에 스트레스를 크게 받아서라고 한다.

백마고지 전투는 큰 희생을 치렀음에도 국군에게는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개전 이후 국군은 중공군에게 계속 밀렸는데 그 정예 부대를 단독으로 물리쳤으니 그때부터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9사단과 격전을 벌인 38군은 군우리에서 미 2사단을 궤멸시켜 펑더화이(彭德懷) 사령관으로부터 ‘38군 만세’라는 축전을 받고 ‘만세군’이란 칭호를 얻은 부대다. 지금은 수도 베이징의 방어를 담당하는 인민해방군의 최정예 부대인 82군으로 거듭났어도 중공군 전사는 38군의 백마고지 전투 패배가 뼈아팠는지 간단히 기술하고 넘어간다. 김일성도 백마고지를 빼앗기자 3일간 식음을 전폐하고 애통해했다고 한다.

국군은 이 전투 승리로 미국으로부터 10개 사단을 증원받을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 현재와 같은 20개 사단 체제를 구축했다. 그런데 백마고지 전투 승리의 주역인 9사단이 1979년 12월 12일 쿠데타에 동원되었으니 선배들의 숭고한 죽음에 먹칠을 한 건 아닌지.

김정탁 노장사상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