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리 저는 말 우승시켰다, 혈통마=승리 공식 깬 전설의 은퇴

은퇴를 앞둔 김영관(65) 조교사가 지난 27일 부산 강서구 부산경남경마공원에서 말을 돌보고 있다. 송봉근 기자

은퇴를 앞둔 김영관(65) 조교사가 지난 27일 부산 강서구 부산경남경마공원에서 말을 돌보고 있다. 송봉근 기자

지난달 27일 오후 2시 20분쯤 부산 강서구 렛츠런파크 부산ㆍ경남 경마장. 평일인데도 수천 인파가 몰린 이곳에선 4경주(1800m)에 나선 경주마 11마리의 레이스가 한창이었다. 이  경기에 걸린 온ㆍ오프라인 마권 판매액은 19억원. 2번마 ‘인디고스트’가 경합 끝에 1분 55초9의 기록으로 피니시 라인을 끊으며 ‘코로 이기는’(경마에서 말 코 하나 정도 간격의 신승을 의미) 승리를 거두자 장내는 크게 들썩였다. 이날 경마장엔 경마팬 2386명이 찾았다.

 

‘숨은 지휘자’로 21년, 전설의 조교사 은퇴

이런 경마엔 ‘보이지 않는 지휘자’가 있다. 한국마사회 주관 자격 시험에 통과한 최고의 말 전문가로 마주에게 말을 위탁받아 대회 출전부터 기수 선정, 경주 전략 수립 등을 총괄하는 조교사다. 한국마사회에 따르면 조교사는 전국에 95명뿐이다.  

지난 27일 오후 2시20분쯤 부산 강서구 부산경남경마공원 경마장에서 관객이 4경주를 관람하고 있다. 이 경주에서 마권 19억원어치가 판매됐다. 김민주 기자

지난 27일 오후 2시20분쯤 부산 강서구 부산경남경마공원 경마장에서 관객이 4경주를 관람하고 있다. 이 경주에서 마권 19억원어치가 판매됐다. 김민주 기자

이 가운데 김영관(65) 조교사는 경마업계 자타공인 ‘신화를 쓴 조교사’로 통한다. 10대 시절 말을 타는 기수(騎手), 이후 마필 관리사를 거쳐 2004년 3월 불혹을 넘긴 나이(44)에 조교사로 데뷔했다.

데뷔는 늦었지만, 20여년간 7045전을 치르며 1539회 우승을 거뒀다. 경마사상 최단기 1000승(2014년 6월)과 첫 1500승(2024년 8월) 달성 모두 김 조교사의 기록이다. 같은 시기 데뷔한 조교사들 중엔 200~300회 우승에 그치는 경우도 많다. 그가 경기에서 타낸 상금 총액은 906억원(조교사 몫 8% 적용 시 72억4800만원)에 이른다.  


“‘혈통馬’ 알아보는 건 기본일 뿐”  

30일 정년 퇴임을 맞는 김 조교사를 지난 27일 렛츠런파크 부산ㆍ경남에서 만나 ‘활동 시기 전체를 전성기’로 일군 비결을 물었다. 데뷔 경기에서 다리 저는 말 ‘루나’를 우승으로 이끈 강한 인상 때문에 김 조교사에겐 ‘혈통 좋은 말 보는 눈이 남다르다’는 평가가 늘 뒤따랐다. 장애 탓에 경매에서 번번이 외면받던 루나는 김 조교사의 세심한 보살핌과 조교에 은퇴 때까지 쟁쟁한 준마들을 제치고 13번 우승을 거머쥐었다.

 
이와 관련, 김 조교사는 “말의 뼈대와 움직임, 걸음걸이, 유연성 등 좋은 말을 알아볼 수 있는 요건들이 있다”며 “하지만 그걸 모르는 조교사는 없다. 눈에 띄는 좋은 말일수록 더 알아보기 쉽다”고 했다. 요컨대 말의 자질을 알아보는 건 시작에 불과하단 이야기다.

김영관(65) 조교사가 27일 부산 강서구 부산경남경마공원에서 은퇴를 앞두고 본인의 경력과 조교사로서이 노하우 등을 설명하고 있다. 송봉근 기자

김영관(65) 조교사가 27일 부산 강서구 부산경남경마공원에서 은퇴를 앞두고 본인의 경력과 조교사로서이 노하우 등을 설명하고 있다. 송봉근 기자

 
그는 “일본·호주·미국 등 좋은 경마 시스템과 마시장을 갖춘 곳이면 가리지 않고 다녔다. 그들은 말의 습성을 어떻게 파악하고 길들이는지 눈여겨 관찰했다”고 했다.

 
이어 “말의 습성을 정확히 파악해 (국내 사료보다) 20~30% 비싼 값에 근력ㆍ지구력 등에 좋은 사료를 해외 현지에서 공수했다. 경기 땐 말의 보폭과 실제 발걸음 수를 비교해 발밀림 정도를 계산하고, 결승점에 도착해 머리를 쳐드는지, 앞으로 뻗는지 등 '콧구멍 속까지' 세심히 관찰하며 조교했다”고 했다.

 
말 위 기수의 역할도 크다. 경마판엔 ‘경주 기여도는 마(馬) 7 인(人) 3’이라는 오랜 금언이 있다. 김 조교사는 “훌륭한 기수는 이걸 ‘마 3 인 7’로 바꿔낸다. 수시로 말을 관찰ㆍ분석하고, 습성을 정확히 파악하려 조교사와 소통한다. 조교사는 중요한 경기 때 그 기수를 선택하게 되는 것”이라고 했다.

 
이어 “말이 일찍 전성기를 맞는 조숙형인지, 완숙형인지도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며 “일찍부터 제 체질에 맞는 사료를 먹으며 최적의 레이스 자세를 갖춘 말이 전성기에 좋은 기수를 만나면, 혈통 좋은 말도 앞지를 수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걸 이뤄내는 순간 온몸에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도파민이 샘솟는다”고 말하며 그는 천진하게 웃어 보였다.

 

“‘남의 우승 뺏어갔다’ 원망, 이젠 이해돼”

퇴임을 목전에 둔 지난 4월에도 그는 뚝섬배 대상경주(큰 타이틀이 걸린 주요 대회)에 ‘즐거운 여정’을 출전시켜 우승을 거머쥐었다. 이처럼 좋은 성적만을 좇으며 조교사로서 영광을 이뤄온 그의 여정에도 미안하고 후회스러운 기억으로 남은 순간들은 있다.

 
김 조교사는 “좋은 결과를 많이 냈지만, ‘형님, 남의 우승 상금을 그렇게 많이 뺏어가면 어쩌느냐’는 주변 볼멘소리를 시샘 정도로만 여겼다”며 “하지만 이제 그 말의 뜻을 알겠다. 냉혹한 승부의 세계에서 살아남으려 늘 조바심을 내느라 주변을 둘러보거나 잘 챙기지 못했던 것 같다”고 했다.

 

지난 27일 김영관(65) 조교사가 부산 강서구 부산경남경마공원에서 말을 돌보고 있다. 송봉근 기자

지난 27일 김영관(65) 조교사가 부산 강서구 부산경남경마공원에서 말을 돌보고 있다. 송봉근 기자

퇴임을 앞두고 김 조교사가 마방의 좋은 말 43마리를 후배들에게 골고루 인계하기 위해 애쓴 것도, 마방 직원 11명이 계속 일할 수 있게 조건 좋은 자리를 백방으로 알아본 것도 이런 ‘은혜 갚기’의 일환이다.

 
김 조교사는 “조교사로 산 20여년 누린 영광은 결코 혼자 이룬 게 아니다. 김진우·이주현·안애환·미티키 등 톱니바퀴 같은 호흡으로 말을 돌봐준 마방 식구들에겐 각별한 고마움을 표하고 싶다. 마사회에도 깊은 감사를 드린다”며 “퇴임 이후에라도 우리나라 경마의 발전을 위해서라면 주어지는 역할을 마다치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