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일 오전 현대중공업 주주총회가 열린 울산대학교 체육관 내부가 아수라장이 되어 있다.송봉근 기자
"침체한 조선업을 살리겠다"며 정부가 추진하는 현대중공업-대우조선해양의 합병이 첫 단추부터 큰 상처를 남겼다. 지난 31일 현대중공업 임시 주주총회가 열린 울산대 체육관 내부는 아수라장이었다. 소화기와 의자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뜯긴 합판에서 나온 가루가 체육관 바닥을 뿌옇게 덮었다.
현대중공업은 이날 주총에서 물적분할안을 통과시켰다. 노조는 당초 주총장으로 공지된 한마음회관을 닷새 동안 지켰으나 안건 통과를 막지 못했다. 노조가 “주총장 변경은 위법"이라고 주장하고 있어 이날 처리된 물적분할안은 법원 판단에 맡겨질 예정이다.
노조가 전면파업과 점거 농성을 동시에 진행한 건 1994년 천연가스(LNG)선 점거 농성 이후 25년 만이다. 사측은 법 위반 부담을 안고서 주총장이란 강수를 두면서 안건을 통과시켰다. 현대자동차 노조가 현대중공업 노조와 연대하면서 물적분할안 후폭풍은 상당히 지속할 것으로 보인다. 양측이 강수를 둔 이유는 뭘까.
우선 31일 주총에서 통과된 분할계획서를 들여다봐야 한다. 핵심은 한국조선해양이란 이름의 중간지주사가 설립이다. 현대중공업지주-한국조선해양-현대중공업·대우조선해양으로 이어지는 지배 구조가 완성되는 것이다. 중간지주사인 한국조선해양은 투자와 연구개발(R&D)를 맡고, 자회사인 현대중공업은 생산을 담당한다. 현재 1만4200여명의 현대중공업 직원 중 500여명이 한국조선해양으로 옮겨간다. 인수를 추진하는 대우조선해양은 한국조선해양 자회사로 편입된다.
![31일 오전 현대중공업이 임시 주주총회를 열고 회사분할 안건을 통과시켰다. [사진 현대중공업]](https://pds.joongang.co.kr/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1906/02/13b0e99b-6955-4218-adaa-cb4e5a47bf14.jpg)
31일 오전 현대중공업이 임시 주주총회를 열고 회사분할 안건을 통과시켰다. [사진 현대중공업]
현대중 부채비율 115%로 늘어나
조선 불황에도 대주주에 수백억 고액 배당
이는 지난해 연말 현대중공업 지주의 고액 배당을 통해 확인됐다. 현대중공업지주는 지난해 12월 주주총회를 열고 2900억원의 배당을 진행했다. 정 이사장과 정기선 부사장은 각각 748억원과 147억원을 배당받았다. 조선업 불황 속 대주주에 대한 수백억 원의 고액 배당은 노조는 물론이고 회사 안팎에서 논란이 됐다. 지난 3월 현대중공업과 산업은행이 대우조선해양 매각 계약을 체결하면서 사측은 물론, 이동걸 산업은행 회장도 “인위적인 구조조정은 없을 것”이란 말을 되풀이하는 것도 노조가 사측과 정부를 믿지 못하는 이유다.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이 2015년 서울 용산구 그랜드 하얏트 서울 호텔에서 열린 '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탄생 100주년 기념식'에서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중앙포토]](https://pds.joongang.co.kr/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1906/02/7f25036e-1f34-4d4b-998f-74519c7f19aa.jpg)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이 2015년 서울 용산구 그랜드 하얏트 서울 호텔에서 열린 '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탄생 100주년 기념식'에서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중앙포토]
중간지주사 신설이 정기선 부사장이 대표로 있는 현대글로벌서비스의 내부 거래를 염두에 둔 것이란 지적도 있다. 2016년 설립한 현대글로벌서비스는 선박 유지·보수·수리 업체로 지난해 매출의 35.6%인 849억원이 내부거래를 통해 발생했다. 하지만 개정된 공정거래법이 올해부터 시행되면 현대글로벌서비스는 일감 몰아주기 규제 대상에 오른다. 이런 상황에서 중간지주사인 한국조선해양이 신설되면 현대글로벌서비스는 현대중공업지주의 손자회사가 돼 개정된 공정거래법 규제 대상에서 제외된다. 현대중공업이 물적분할을 서두른 데 대해 의구심을 갖는 이유다.
중간지주사 노동자에 불리한 구조
현대중공업이 산업은행과 인수 계약을 체결한 지 불과 두 달 만에 물적분할을 나선 것을 두고도 뒷말이 많다. 산업은행은 "계약서에 물적분할 시점에 대해선 정하지 않았다"는 입장이다. 노조는 "기업결합 심사 이후에 물적분할을 하는 게 상식에 부합한다"며 "정부 승인도 나지 않았는데 물적분할을 추진한 건 3세 승계가 아니면 설명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사측은 "물적분할로 회사를 물리적으로 나눠놔야 기업결합 심사에 유리한 것으로 판단했다"고 반박했다. 전문가들은 물적분할과 기업결합 심사가 관련성이 없다고 지적한다. 박창균 중앙대 경영학부 교수는 "물적분할은 기업결합 심사에 있어 고려요소가 아니다"며 "중요한 건 두 회사 합병에 따른 시장경쟁 저해 침해로 그걸 어떻게 볼 것인지 각국 공정거래 당국에서 판단할 것"이라고 말했다.
문제는 주총 이후에도 불확실성이 가시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현대중공업은 다음 달 공정거래위원회에 기업결합 심사 신청서를 제출할 예정이다. 현대중공업과 대우조선해양 합병은 공정위 문턱을 무난히 넘으리라는 관측이 많다. 정부가 합병을 주도하고 있는 만큼 공정위가 반대하고 나설 명분이 없어서다. 하지만 공정위가 어떤 논리를 만들어 기업결합을 승인하느냐에 따라 현대중공업과 대우조선해양 합병 과정도 크게 달라질 것으로 보인다.

현대중공업 주주총회 장소 변경공지. 위성욱 기자
공정위 합병 승인 논리, 세계 공정거래 당국도 주목
하지만 최근 에너지 전환 정책에 따라 급부상하고 있는 액화천연가스(LNG) 운반선을 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한국 조선업계가 올해 수주한 LNG 운반선은 이달 23일 기준으로 16척으로 올해 전 세계 발주된 LNG선 19척 중 84%를 가져왔다. 뒤를 이어 중국이 2척, 러시아가 1척을 가져가 LNG 분야에선 한국 조선 3사의 경쟁자가 없는 상황이다. 이런 이유로 공정위가 양사의 합병을 어떤 논리를 가지고 승인할 것인지도 관심을 끈다. 이미 중국 등 세계 각국의 공정거래 당국이 주목하고 있다.
세계 조선업계를 들여다보면 현대중공업과 대우조선해양의 합병이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 등 각국의 기업결합 심사를 쉽사리 통과할 수 없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장기 불황을 겪은 세계 조선업계는 그동안 발주자, 다시 말해 배를 주문하는 기업의 입김이 컸다. 이는 저가 수주의 원인으로 꼽히기도 했다. 하지만 양사 결합으로 메가조선소가 탄생할 경우 조선사 입김이 강해질 것이란 예상이 많다. 국내 조선 업계 관계자는 “현대중공업과 대우조선해양 기업 결합이 확정될 경우에는 발주사가 주도했던 조선 시장에서 조선사 파워가 강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발주사와 조선사의 시장 파워가 이동한다는 것이다.
EU, 조선사 파워 늘어나는 것 달갑지 않아
현대중공업은 다음 달 국내 공정위에서 기업결합 심사 신청서를 제출할 예정이다. 다음 차례는 EU로 잡고 있다. 현대중공업 관계자는 "EU에서 기업결합 승인을 받으면 중국 등 다른 국가에서도 승인받기 유리하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이번 합병은 EU·일본·중국 등 최소 10개국에서 승인을 받아야 하는데, 이 중 반대가 하나만 나와도 두 회사의 합병은 물거품이 된다.
반대표 나오면 산업은행 책임론 거세질 것
상처만 남은 주총은 정부의 준비 부족과 사측의 소통 부족을 그래도 보여줬다. 이재갑 고용노동부 장관은 주총이 끝나자 "불법행위는 법·절차 따라 조치할 것"이라고 했지만 만시지탄이다. 노조는 62장이 고소장을 받아 들었다. 사측은 물적분할에 반발하는 노조와 법정 공방을 벌여야 할 처지다. 정부는 "현대중공업과 대우조선해양을 합병해 조선업 경쟁력을 높이겠다"고 말했지만, 어떤 역할도 하지 못했다.
강기헌 기자 emckk@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