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찰 CI 한가운데 직선은 정의를 상징하는 칼의 모양이다. 서울 서초동 중앙지검 모습. 연합뉴스
고려와 조선 시대에 행정과 정치를 담당하는 ‘문반’, 군사와 국방을 담당하는 ‘무반’ 이 둘을 합해 문무양반(文武兩班)이라고 했다. 이렇듯 공직을 수행하는 관리는 크게 문관과 무관으로 나누는 것이 일반적이다. 업무를 수행함에 있어 문관은 붓이 도구이고, 무관은 칼이 도구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칼이 아닌 붓을 쓰는 문관인 검사를 법무부에서 내보내는 정책을 ‘문민화’라고 하는 것은 어딘가 맞지 않는 표현으로 보인다. 법무부 문민화에 저항하는 의미로 “문신의 더러운 붓으로 무신의 칼을 더럽히지 말라”고 역설적인 절규를 한 검사도 있었다. 정책의 옳고 그름을 떠나 법무부 문민화 대신 ‘법무부 탈검찰화’라는 용어가 더 맞는 표현이 아닌가 싶다.
필자도 검사 시절 “검사도 총을 차고 다니느냐”는 농담 같은 질문을 가끔 받은 적이 있는데, 검사는 문관이지 무력을 갖춘 무관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런데도 범죄를 척결하는 검사의 업무와 그 이미지 때문에 검사가 총을 차고 다니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고, 검사의 검(檢)자가 칼 검(劍)자와 비슷해 칼을 쓰는 무관으로 비추어지는 경우도 있는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세상이 검사를 무사(武士), 즉 칼잡이로 부르거나 검사들 스스로도 자신들이 무사로 인식되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 세상을 어지럽히는 범죄와 맞서 싸우기 위해 검사에게는 무인의 정신과 용기가 필요한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이에 이명재 전 검찰총장은 “진정한 무사는 얼어 죽을지언정 곁불을 쬐지 않는다”는 말로써 검사들이 권력에 기웃거리거나 문약(文弱)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고 무사와 같은 기개를 가지도록 독려하기도 하였다.
어쨌든 검찰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칼에 비유된다. 검찰 CI(Corporate Identity)의 다섯 개 직선 중 한가운데에 정의를 상징하는 칼의 모양이 있고, 한 손에 저울을 든 정의의 여신 디케도 다른 한 손에는 칼을 쥐고 있다. ‘정의 없는 힘은 폭력이고 힘없는 정의는 무능’이라는 말이 있다. 즉 힘이 있는 것은 정의로워야 하고 정의로운 것은 힘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정의 실현을 위해 필요한 힘을 칼로 상징해 온 것이다.
그런데 같은 칼이라도 폭력배가 쓰는 칼은 흉기이지만, 명의(名醫)가 쓰는 칼은 병을 낫게 하는 칼이다. 따라서 검찰의 칼은 사람을 죽이는 칼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칼이 돼야 한다. 더 나아가 갈등의 심화가 아닌 치유의 결과로 국가와 사회를 살리는 칼이 되어야 한다. 환부만 정확하게 치료하는 명의와 같이, 검찰권은 문제 부분만 정밀하게 도려내는 방식으로 사회의 병리 현상을 치료하는데 행사돼야 할 것이다.

한손에 저울을 든 정의의 여신 디케는 다른 한 손에 칼을 쥐고 있다. 셔터스톡
얼마 전 63세 최고참 검사로 정년 퇴임한 정명호 전 검사가 후배들에게 “권세를 지녔다 해도 다 부리지 말라. 권세가 다하면 원수를 만나게 된다”라는 『명심보감』의 말을 남겼다는 언론 기사를 접하게 됐다. 누구보다도 긴 37년간의 검사 인생을 응축해 남긴 말이라 더욱 가슴에 와 닿는다. 검사가 문관으로 인식되든 무관으로 인식되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다른 사람의 인생에 총·칼 못지않은 위력을 가할 수 있는 검사는 문관이면서도 무관의 힘을 지니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검찰청법 제4조는 ‘검사는 그 직무를 수행할 때 주어진 권한을 남용하여서는 아니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검사의 권한은 절제된 가운데 품격있게 행사돼야 한다. 칼은 칼집에 있을 때 더욱 위엄이 있는 법이다.
로담(Law談) : 윤웅걸의 검사이야기
검찰의 제도와 관행, 검사의 일상과 경험 등을 알기 쉽게 소개함으로써 한국사회에 적지 않은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검사와 검찰에 대한 이해를 돕고, 이를 통해 바람직한 형사 사법제도의 모습을 그려 보고자 합니다.
※윤웅걸 법무법인 평산 대표변호사. 서울지검 2차장검사/대검찰청 기획조정부장/제주지검장/전주지검장.

윤웅걸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