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는 말로 한다.' 그들은 그렇게 합리화한다. 자기변명일 뿐이다. 의견과 견해가 달라서 싸우는 게 아니다. 다만 입장이 다르니 말 폭탄을 던진다. 여당이 야당 되면 여당 때 했던 말을 반대로 뒤집고, 야당이 여당 되면 야당 때 했던 말을 역시 뒤집는다. 그러니 문제라는 것이다.
정치는 그 색 그대로 사회를 물들인다.
지도층이라는 저들의 싸움이 온종일 TV에 비치니 사회가 온통 말싸움이다. 자동차 끼어들기는 절대 못 참는다. 내려 욕이라도 한바탕 해줘야 직성이 풀린다. 인터넷 기사에 붙은 댓글은 욕의 잔치다. 회사에서도, 학교에서도, 길거리에서도 말싸움은 일상이 됐다.
易地思之
입장을 바꿔 생각해라.
어려운 것도 아니다. 입장을 바꿔 생각하면 어지간한 건 다 풀린다. 그래도 그 쉬운 걸 안 한다.

영화 '내부자들'의 한 장면. 특권층의 비리, 이를 캐는 검사와의 치밀한 싸움을 그리고 있다.
힘없고, 배경 없는 서민들은 법이 나를 지켜줄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소송을 건다. 그러나 소송은 그 자체가 가시밭길이다. 1심, 2심, 3심…. 겹겹이 쌓인 재판 쫓아다니다 보면 일상은 망가진다. 변호사를 사느라 재산도 축난다. '유전무죄, 무전유죄'가 빈말이 아니다. 혹 이긴다 해도 상처뿐인 영광이 대부분이다.
서민들이 좀 더 쉽고 편하게 재판받을 수 있어야 한다. 죄지은 놈들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죗값을 치르게 해야 한다. 그게 사법 정의요, 우리가 지금 추진하는 사법 개혁의 핵심이다.
그러기에 '검수완박' 여야 합의는 야합이다. 선거사범 빼고, 공직자 비리도 빼고…. 저들 권력층의 이익만 굳혔을 뿐 서민들은 한 발 더 법의 벼랑 끝으로 밀려났다.
法不阿贵, 繩不繞曲
목공의 먹줄이 굽지 않듯, 법은 권력에 아부하지 않는다.
한비자(韓非子) 유도(有度)편에 나오는 말이다. 법이 어디 입장에 따라 앞뒤가 다르고, 귀천에 따라 높낮이가 바뀌는 것이었던가. 법이 권력의 편에 서고, 돈이 법을 사는 부조리는 쓸어내야 한다. 그래야 서민들이 소송에 기댈 수 있고, 궁극적으로는 사회 말다툼도 끝낼 수 있다.
법은 과연 우리 사회를 얼마나 정의롭게 바꿀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지금 관건의 시기를 지나고 있다.
주역 6번째 괘 '천수송(天水訟)'을 뽑았다. 하늘(乾, ☰) 아래 물(坎, ☵)이 있는 형상이다.
중국에서 하늘의 태양은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움직여진다. 물은 반대다. 서쪽에서 흘러 동쪽 바다에 이른다. 서로 반대 방향으로 흐르니 뭔가 틀어진 형상이다(天與水違行). 그래서 괘 이름이 '말로 싸운다'라는 뜻을 가진 '訟(송)'이다. 흔히 '소송(訴訟)의 괘'로 통한다.

주역 6번째 괘 '천수송(天水訟)'은 하늘(乾) 아래 물(坎)이 있는 형상이다. 하늘의 태양과 땅의 물은 서로 어긋나 흐른다. /바이두
訟, 爭也. 以手曰爭, 以言曰訟
'訟(송)'은 싸우는 것이다. 주먹으로 싸우는 것은 '爭(쟁)'이요, 말로 싸우는 것은 '訟'이다.
3000년 전 중국에 법정이 있을 리 없다. 당시의 법정은 관정(官庭)이었다. 관청의 뜰에 나아가 여러 사람(公)이 듣는 가운데 말(言)싸움을 하니, 그게 곧 송사였다. 지금도 중국은 송사를 '관사(官司)'라고 한다. 관의 영역에 가서 하는 말싸움 행위다.
왜 말싸움을 하는가. 주역의 순서를 설명한 '서괘전(序卦傳)'은 이렇게 말한다.
飮食必有訟
밥을 먹으니 반드시 말싸움이 벌어진다.
밥그릇이다. 말싸움은 결국 내 밥그릇을 지키고, 내 밥그릇을 넓히려고 하는 데서 시작된다. 국회에서 치고받고 싸우는 것도 결국 밥그릇 때문이다. 제 식구 밥그릇 챙기려고, 남의 밥그릇 뺏으려고 저 난리다.
그렇다고 모두 다 싸우는 건 아니다. 서로 논의해서 밥의 경계를 정하고, 협력해 밥그릇을 넓힐 수도 있다. 입장을 바꿔 상대를 이해하고, 내 것을 양보할 수도 있다. 민주주의란 그런 것 아니던가. 그런데 저들은 그걸 안 한다.
왜 그럴까.
믿음이 깨졌기 때문이다. '천수송' 괘 괘사(卦辭)는 이렇게 말한다.
有孚窒, 惕, 中吉, 終凶
믿음이 막혔다. 경계해야 한다. 중간에 끝내면 길(吉)하나, 마지막까지 가면 흉(凶)하다.
주역이 3000년 이후의 한국 정치, 사회 현실을 예견하기라도 했단 말인가? 소름 끼칠 정도다. 입장이 바뀐다고 자기 의견을 180도 바뀌는 국회, 그곳에 신뢰는 없다. '여기서 밀리면 우리는 찬밥이다'라는 인식만 남아있을 뿐이다. 그래서 싸우고, 소송을 건다.
말싸움이 격화되고, 소송에 이르게 되면 뭐 좋을 게 있겠는가. 중간에 멈춰야 한다. 갈 데까지 가면 너나 나나 험한 꼴을 본다. 그래서 주역 '천수송' 괘는 '가급적 소송을 벌이지 말라'고 충고한다.

주역 '천수송' 괘는 '가급적 소송을 벌이지 말라'고 충고한다./바이두
돈 있는 사람(기업)은 비싼 돈을 주고 변호사를 산다. 심지어 전관예우를 노리고 막 판사 끝내고 변호사 사업을 시작한 자를 내세우기도 한다. 그러니 가급적 소송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힘없고, '빽'없는 서민들은 적당히 굽히고 살라는 충고처럼 들린다.
不永所事, 小有言, 終吉
길게 끌지 마라. 말썽을 줄여야 결국 길하다.
첫 번째 효사(爻辭)다. 대략 그런 식이다. 소송에서 이길 수 없으니 대충 마무리 짓고 착한 신민(臣民)으로 돌아가라고 말한다. 심지어 '소송에서 이기지 못하고 명을 따르니, 현 상황에 만족하고 안빈낙도하라(不克訟, 復則命, 渝安貞吉)'고도 했다.
그리고는 한마디 더 한다.
君子以作事謀始
군자는 시작할 때 심사숙고해 뒷날의 분쟁을 막아야 한다.
맞는 얘기다. 시작할 때 철저한 준비와 검토로 분쟁의 소지를 막아야 한다. 그게 군자의 모습이다.
그러나 복잡한 현대 생활에 어찌 군자의 길만 요구할 수 있겠는가. 말다툼은 끊이지 않고, 소송은 계속되는 게 우리 현실이다. 아무리 조심하고 삼가도 분쟁에 휩쓸리고, 소송에 휘말리게 된다. 씨족이 모여 살던 3000년과는 비교할 수 없다.
그러니 사법 개혁을 하자는 것이다. 그 뜻은 분명하다. 서민들이 정당하게 법의 보호를 받고, 죄 진 놈은 반드시 잡아 쳐넣을 수 있어야 한다. 그리하여 법을 사회 공정의 최후 보루로 남겨야 한다. 그걸 망각하고, 자기들 입맛에 맞춰 합의라고 해놨으니 '야합'이라는 비난을 받는다.
'목공의 먹줄이 굽지 않듯, 법은 권력에 아부하지 않는다(法不阿贵, 繩不繞曲)'라는 한비자의 말 뒤에는 다음 구절이 이어진다.
刑過不避大臣,
賞善不遺匹夫.
형벌은 대신이라고 피하지 않고,
포상은 필부라고 빠뜨리지 않는다.
한우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