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남철수 때 메러디스 빅토리호 타고 피란
당시 피란민 중에는 함경남도 함흥이 고향인 임길순(작고)씨도 있었다. 임씨 일행 등을 태운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28시간 만에 부산항에 도착했지만 부산은 이미 전국에서 모여든 피란민으로 넘쳐났다. 빅토리호는 뱃머리를 거제도로 틀었다.
거제에서 6개월 정도 머물던 임씨 가족은 진해로 가서 냉면을 만들어 팔다가 1956년 늦여름 무렵 통일호 열차에 올랐다. “큰 도시에 정착하면 생활이 나아지겠지”라고 생각하고 무조건 서울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미 10군단이 1950년 12월 흥남철수작전 당시 흥남부두에 모인 군인들과 피란민들을 촬영한 사진. 흥남철수작전은 1950년 12월 국군과 유엔군이 중공군의 개입으로 포위되자 함경남도 흥남항에서 10만5천명의 군인과 9만1천여명의 피란민, 차량 1만7천500여대, 화물 35만t을 193척의 함대에 싣고 거제 장승포항으로 철수한 작전이다. 연합뉴스
‘구호품’ 밀가루로 찐빵 만들어 팔기 시작
당시 신부는 임씨가 흥남부두를 탈출해 대전까지 오게 된 과정을 들은 뒤 미군이 나눠준 밀가루 2포대를 줬다. 대전의 대표 빵집인 ‘성심당’이 시작된 순간이다.
임씨 가족은 이 밀가루로 찐빵을 만들어 대전역 앞에서 팔았다. 밀가루 2포대를 그냥 식량으로 먹고 나면 또 살아갈 일이 막막하다는 생각에 빵 장사를 시작했다. 빵을 만들어 본 적이 없던 임씨는 가장 만들기 쉬운 찐빵부터 시작했다고 한다.
노점 앞에는 나무 팻말로 성심당(聖心堂)이란 간판도 만들어 세웠다. 예수님 마음을 담아 판다는 의미였다. 미군의 구호품인 밀가루가 대전역을 통해 유통되던 시절이어서 재료를 구하기도 쉬웠다고 한다.

성심당 임영진 대표와 부인 김미진 이사가 최근 문을 연 성심당 문화원 내에 설치한 '밀가루 포대'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프리랜서 김성태
빵 300개 만들면 100개 기부…66년의 실천
대전시민 김영숙(77·여)씨는 "대전 사람들에게 성심당 찐빵은 배고프던 시절 허기를 달래주던 추억의 먹을거리였다"며 "늘 신선한 제품을 저렴한 가격에 팔아 더 인기를 끌었던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당시 빵은 선진국인 서양의 음식이라는 이미지가 있어 장사가 더 잘됐다고 한다.
밀가루 2포대로 사업을 시작한 임씨 가족은 빵 장사를 하면서 이웃과 나눔 정신을 실천했다. 하루에 찐빵 300개를 만들면 100개 정도는 이웃에 나눠 줬을 정도다. 이런 나눔의 마음은 빵 장사를 시작한 지 66년이 흐른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1950년 12월 24일 마지막 철수선 베고(Begor)가 출항한 직후 폭파되는 흥남 부두. 공산군이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지만 그 이면에 아군이 이곳에 다시 오지 않는다는 의미도 내포되어 있다. 그렇게 북진은 좌절되었다. [사진 미 해군]](https://pds.joongang.co.kr/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2205/23/90f45dcd-6ca8-456f-86bb-7b5ecc528c73.jpg)
1950년 12월 24일 마지막 철수선 베고(Begor)가 출항한 직후 폭파되는 흥남 부두. 공산군이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지만 그 이면에 아군이 이곳에 다시 오지 않는다는 의미도 내포되어 있다. 그렇게 북진은 좌절되었다. [사진 미 해군]
이중 튀김소보루와 부추빵은 전국적으로 알려진 제품이다. 튀김소보루는 단팥빵·소보루·도넛 등 3가지를 동시에 맛볼 수 있다.
한국관광공사에 따르면 지난해 4월부터 1년간 대전지역 맛집 검색 순위 1위는 성심당이었다. 이동통신 이용, 신용카드 사용, 내비게이션 검색 등을 분석한 결과 대전의 상징 브랜드로 자리 잡은 게 확인됐다. 전쟁 통에 시작된 메러디스 빅토리의 기적이 현재까지도 계속되는 셈이다.

성심당 임영진 대표가 성심당에서 빵을 들고 있다. 프리랜서 김성태
임씨, 가톨릭 성도 200여명과 北 탈출
2대 사장인 임 대표는 가톨릭 교회의 사회운동인 '포콜라레(Focolare·벽난로)' 운동에 열심히 참여하고 있다. 기업가가 솔선수범해 이웃돕기에 나서야 한다는 게 이 운동의 골자다. 100% 정직한 납세를 기업가의 기본자세로 삼을 뿐만 아니라 한해 발생하는 기업 이윤의 15%를 직원에게 돌려주는 것을 경영의 원칙으로 삼는다. 요즘도 매월 3000만 원어치의 빵을 사회복지시설 등에 나눠준다.
성심당 창업자인 임씨는 원래 함흥에서 사과농장을 했다. 당시 흥남과 원산 일대는 일제 강점기부터 독일과 프랑스 신부들이 선교를 시작한 곳이었다. 1950년에 성당만 57개가 있었을 정도인데 임씨도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1967년 성심당 모습. 사진 성심당
이런 상황에서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났다. 그해 10월 압록강까지 진출한 국군과 유엔군은 중공군이 밀려오자 후퇴를 시작했다. 이런 소식이 약 2개월 뒤 임씨가 살던 흥남에도 전해지자 임씨는 피란을 결심했다. 공산정권 치하를 벗어나면 마음 놓고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 거란 기대감에서다. 성당 신도들의 리더격이었던 임씨는 가톨릭 성도 200여 명을 이끌고 피란길에 나섰다.

한국을 방문한 프란치스코 교황이 성심당이 제공한 빵으로 식사를 하고 있다. 사진 성심당
사람이 많아 배를 탈 수 있을지조차도 장담할 수 없었다. 이때 임씨 가족과 함께 있던 젊은 신부가 아이디어를 냈다. 흰 천에 빨간 십자가를 그린 깃발을 나뭇가지 위에 달았다.
그런 다음 날마다 십자가를 높이 들고 흥남부두에 서 있었다. 어느 날 깃발을 본 미군이 다가와 임씨 가족과 성당 식구를 배에 오르도록 했다. 당시 임씨 등이 탄 그 배가 메러디스 빅토리호였다.

임영진 성심당 대표와 부인 김미진 이사가 최근 문을 연 성심당 문화원에서 창업주 고 임길순·한순덕 부부 얼굴을 새긴 부조를 소개하고 있다. 프리랜서 김성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