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만에 대목” 기대했는데…고속철 입찰에 외국계 참여로 ‘시끌’

지난해 12월 중부내륙선 이천~충주 구간을 운행하는 KTX-이음. 사진은 기사와 직접 관계 없음. 사진 충주시

지난해 12월 중부내륙선 이천~충주 구간을 운행하는 KTX-이음. 사진은 기사와 직접 관계 없음. 사진 충주시

 
국내 고속철도 시장에 외국계 기업이 진출 채비를 하면서 관련 업계가 들썩이고 있다. 세금까지 투입해 국내 철도 산업을 키워놨는데 자치 외국계 기업에 ‘안방’을 내줄 수 있는 데다 안전 논란까지 겹치면서다.  

5일 철도 업계에 따르면 한국철도공사(코레일)는 이르면 다음 달 평택오송선(EMU-320) 고속차량 120량 등 총 136량 규모로 고속차량 입찰 공고를 낼 예정이다. 대략 7000억원대 규모다. 스페인 철도차량 업체인 ‘탈고’는 국내 중견기업인 우진산전과 컨소시엄을 이뤄 이번 코레일 입찰에 참여할 예정이다. 이에 따라 국내 유일의 철도차량 업체인 로템과 수주전을 펼칠 것으로 보인다.  

“글로벌 호구 되려나” 국내 업계 반발

고속철도 수주를 위해 국내·외 업체가 경쟁을 하는 건 17년 만이다. 현대로템은 지난 2005년 프랑스 알스톰을 제치고 코레일 고속철도 낙찰자로 최종 선정됐다. 특히 올해에는 320㎞급 고속열차 112량 등의 입찰이 예정돼 있다. 업계로선 ‘20년 만의 대목’을 맞이하는 셈이다.  

탈고는 스페인 마드리드에 본사를 둔 업체다. 지난해 매출 5억5540만 유로(약 7500억원)로 세계 20위권 밖으로 평가받는다. 문제는 이 회사가 ‘동력집중식’ 고속차량을 주로 제작해 왔다는 사실이다. 이번에 코레일은 이와는 구동 방식이 다른 ‘동력분산식’ 열차를 발주할 예정이다.  

동력집중식은 열차의 양 끝 기관차에만 동력원이 달려 있다. 동력분산식은 열차에 동력을 골고루 분산해 속도 가감 능력이 뛰어나고, 승객을 동력집중식보다 25%가량 많이 실을 수 있다. 다만 제조 가격은 동력집중식보다 높은 편이다. 현대로템은 정부의 정책 지원과 자체 기술을 통해 동력분산식 고속철도(‘KTX-이음’)를 제작·납품한 바 있다. 지금까지 투입된 민·관 투자액은 2조7000억여 원에 이른다.  


업계에 따르면 코레일은 지난해 입찰 참가자격 규정을 없애 진입장벽을 낮췄다. 그동안은 시속 250∼300㎞ 이상 최고 속력을 내는 차량 제작·납품 실적이 있는 업체만 입찰에 참여할 수 있었다. 

이 같은 상황에 대해 국내 철도차량·부품 업계는 강한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먼저 탈고가 동력분산식 제조 경험이 없다는 이유로 안전 이슈를 거론한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막대한 국고와 인력을 들여 개발한 국산 기술이 자칫 사장될 수도 있다”며 “독일과 프랑스 등은 안전·기술 규격을 통해 실제로 자국 업체에만 입찰 기회를 주는데 왜 우리는 거꾸로 가느냐”고 주장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국내 업체들이 애써 전기버스 시장을 만들었다가 중국 업체에 빼앗긴 것처럼 이번에도 ‘글로벌 호구’가 되는 건 아닌지 의문스럽다”고 말했다.  

지난 2018년 코레일 대구본부 관계자가 동대구역 선로 부근에서 KTX가 출발하는 모습을 살펴보고 있다. 사진은 기사와 직접 관계 없음. 뉴스1

지난 2018년 코레일 대구본부 관계자가 동대구역 선로 부근에서 KTX가 출발하는 모습을 살펴보고 있다. 사진은 기사와 직접 관계 없음. 뉴스1

 

코레일 “똑같은 조건 제시한 것” 반박

철도차량 부품산업 보호 비상대책위원회는 지난 1일 호소문을 코레일에 전달하고 “경쟁을 명분으로 해외 업체의 무분별한 국내 고속차량 사업 입찰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고 촉구했다. 이 호소문에는 191개 국내 철도차량 부품업체가 서명했다.

코레일 측은 이에 대해 “조달 시스템에서 서류 제출 절차를 없애 국내·외에 똑같은 조건을 둔 것”이라며 “애초에 입찰 제한을 규정한 적이 없고, 법과 규정에 따라 공개경쟁 입찰을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우진 측은 “탈고는 고속철도 사업에서 사우디아라비아·우즈베키스탄 등에서 수주 이력이 있다”며 “스페인에서 일부 기술만 들여오고, 실제 제작은 국내에서 이뤄질 예정”이라고 전했다.  

전문가들은 경쟁 구도 조성은 당연하지만 중장기적으로는 철도차량의 안전한 유지·보수에도 역점을 둬야 한다고 지적한다. 최진석 한국철도학회장(한국교통연구원 박사)은 “국내 방산업체가 최근 폴란드에서 대형 수주를 했듯 국제 입찰은 자격 요건만 갖추면 문제가 없어야 한다”고 전제하면서도 “철도 산업에는 공급가 외에 관리에 상당한 비용이 발생한다. 단기간 예산을 줄이기 위해 값싼 외국산 차량을 구매하면 나중에 대가를 치를 수 있다”고 말했다.